<150화>
우주검의 경지(2)
남량은 남궁천을 따라 지하 서고에 도착했다.
각등(角燈)을 든 채 걷던 남궁천이 한 곳에 멈춰 섰다.
그는 책장에 손을 뻗어 낡은 고서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책을 남량에게 건네주었다.
“받거라. 이곳에 우주검의 단서가 적혀 있다.”
서책을 받아 든 남량은 천천히 책자를 펼쳤다.
역대 남궁 가주들의 저서는, 그 인생이 검술 비급 자체와 같았다.
‘과연 천하제일의 검가(劍家)로 불리는 남궁세가답군.’
저서의 내용을 한참 살피던 남량은, 우주검에 관한 내용을 발견했다.
저자(著者)는 남궁세가 11대 가주, 검신(劍神) 남궁탄(南宮彈)이었다.
그는 우주검이라는 경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검은 검학(劍學)의 끝이자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베는 검이다.
남량은 당황했다.
이게 끝인가? 이래서는 심득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남량의 표정을 살피던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주검에 관한 기록은 그것뿐이다.”
“이것만 봐서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남궁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평생 검의 최고 경지를 목표로 삼았다. 스스로 그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하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쩌면 우주검이라는 경지는 실제로 존재하는 경지가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낸 상상의 경지가 아닐까?”
그는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우주검의 수련을 포기했다. 남량, 너는 도전해 볼 것이냐?”
거사일까지 남은 시간은 보름.
남량은 선택해야만 했다.
우주검이라는 경지에 모험을 걸 것인지, 말 것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남궁천은 남량의 어깨를 토닥이고 서고를 나갔다.
고민하며 서책을 넘기던 남량이 일순 멈칫했다.
서책의 마지막 스무 장이 모두 빈장인 것이다.
남량은 이 스무 장에 무언가 있다고 느꼈다. 일종의 예감이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우웅. 남량의 두 눈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천양신경의 첫 번째 능력인 ‘통찰안’을 발현한 것이다.
통찰안으로 책장을 살핀 남량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글자가 숨어져 있었다. 우주검에 관한 내용이 분명했다.
“하하하!”
남량은 크게 기뻐하며 숨겨진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우주검은 쉽게 말해 공간(空間)을 베는 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체를 베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베는 것이니 방어조차 불가능한 필살(必殺)의 검술. 그것이 우주검이다.
남량은 깜짝 놀랐다.
공간을 벤다니! 그것이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과거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지만 우주검의 경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간을 베는 감각을 익히는 건 순전히 기연(奇緣)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기연을 얻어 공간을 베는 감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기연을 얻기 전에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검사였다.
-감각을 한번 익히게 되면 공간(空間)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다음은 인지한 공간을 정확히 벨 수 있는 속도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나는 말년에 들어서야 우주검의 경지를 깨달았다. 조금만 더 일찍 우주검을 얻었다면 나는 능히 천하를 발아래 두고 지배했을 것이다.
남량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공간을 베는 검술. 우주검의 경지는 과연 대단했다.
문제는, 우주검을 익히려면 먼저 기연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연은 얻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연(奇緣) 아닌가?
남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다음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평생을 고민했다. 누구나 나 같은 기연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럼 우주검의 경지는?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그걸 막기 위해 어떤 주술사의 도움을 빌려 기연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남겨 두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후손이여. 네가 우주검의 경지에 들 자격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라.
그 장소의 위치는 마지막 장에 적혀 있었다.
-검인전(劍人殿) 지하.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세 번 쓰다듬으면, 길이 열릴 것이다.
‘어딘지 모르겠군. 남궁세가의 조상이 후손에게 남긴 것이니 남궁천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책을 덮은 남량은 통찰안을 해제했다.
너무 오랫동안 통찰안을 유지해서인지 눈이 따가웠다.
남량은 서책을 원래 자리에 놔둔 뒤, 몸을 돌려 서고를 나갔다.
그리고 곧장 남궁천을 찾아가 숨겨진 내용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내용을 들은 남궁천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검인전은 역대 남궁세가 가주의 연공실이다. 그런 곳에 지하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어서 가 보자.”
검인전에 도착하자 천장에 붙은 용의 석상이 보였다.
‘서책에 적힌 용은, 저걸 말하는 거였구나.’
남량은 가볍게 뛰어올라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를 세 번 쓰다듬었다.
직후, 검인전 전체가 부르르 떨리며 바닥에 숨겨진 통로가 나타났다.
남궁천은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바로 우주검의 비밀이 숨겨진 장소인가.”
남량은 남궁천을 향해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남궁세가의 조상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장소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들어가는 것이 맞아. 난 그 책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고 우주검을 포기했어. 반면 자네는 그걸 알아냈지. 어쩌면 처음부터 자네가 익힐 운명이었던 걸지도 몰라.”
“가주님…….”
“어서 들어가. 내가 후회하기 전에.”
남궁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남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우주검을 익히고 돌아오겠습니다.”
남량은 지하 통로로 뛰어들었다.
***
휘이잉. 바람을 가르며 남량은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기연의 장소는 얼마나 깊은 곳에 위치한 것일까?
마침내 바닥이 보이자 남량은 내력을 일으켜 떨어지는 속도를 줄였다.
터억. 바닥에 착지한 남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남량은 금방 깨달았다.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을 리 없다. 분명 진법의 영향일 것이다.
‘평범한 장소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장포를 입고 손에 검을 든 미형의 청년이었다.
남량은 그가 남궁탄일 것이라 짐작했다.
남량의 앞에 선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연의 장소에 온 자여. 우주검의 경지에 들고자 하느냐?”
남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말했다.
“나를 쓰러뜨리면 너는 경지에 들게 될 것이다.”
청년이 검을 들었다. 남량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간단하네.”
쇄애액! 남량은 낙영용섬의 초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섬전과 같은 일검(一劍)이 청년의 목을 가르는 순간!
청년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량은 눈을 부릅떴다.
이건 초속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감각에 걸리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마치 환상처럼.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남량의 등 뒤였다.
파팟! 남량은 재빨리 몸을 날려 청년과 거리를 벌렸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다면 공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무슨 술수를 쓴 거지?’
그때, 머릿속에서 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을 사용해라. 인간. 그럼 보일 거다.
남량은 수라화한 다음 적안(赤眼)을 들어 청년을 응시했다.
‘다시 확인해 보자. 이번에는 안 놓친다.’
남량은 유성초월 초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득-! 검강의 소용돌이가 청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청년이 또다시 사라졌다. 그 순간, 남량은 보았다.
청년이 있던 자리의 공간(空間)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남량은 처음으로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저것을 베어야 한다는 뜻인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 모습을 드러낸 청년이 검을 내리쳤다.
퍼억! 왼쪽 어깨가 갈라지며 피가 흘렀으나, 금방 회복되었다.
남량은 웃음을 머금고 청년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준비한 우주검, 잘 가져가겠다.”
남량은 바닥을 박차고 청년을 향해 쇄도했다.
청년이 사라지는 그 순간, 남량은 공간이 일그러지는 지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격은 헛되이 허공만을 갈랐다. 직후, 묵직한 충격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남량은 포탄처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군.”
***
그로부터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결전의 준비를 마친 남궁천은 검인전의 앞에서 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남궁월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남량 도장님이 실패하면 어떡하죠?”
“그는 성공할 것이다.”
덤덤히 말했지만 남궁천 역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세가의 무력 부대인 청룡대(靑龍隊) 대주가 다가와 말했다.
“가주님. 출정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으음.”
침음을 삼킨 남궁천이 말했다.
“예정대로 금일 유시(酉時:17∼19시)에 출정한다.”
“존명!”
남궁천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검인전 앞에 두었다.
‘늦게라도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열흘 내 우주검을 익히는 건 역시 무리였을까.’
“가자. 월아.”
“네, 아버지.”
두 사람이 몸을 돌린 바로 그때, 검인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남량은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남궁천과 남궁월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늦은 건 아닌 모양이군요.”
“아슬아슬했다.”
남궁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남궁월이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남량 도장님! 우주검의 경지에 드신 건가요?”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검으로 지월을 처리할 것입니다.”
남궁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너에게 물건을 하나 보냈더구나. 확인해 보거라.”
남량에게 온 물건은 새하얀 바탕에 금실로 매화를 수놓은 도복이었다.
도복을 보낸 사람은 선의관의 주인, 원영이었다.
도복이 담긴 비단 보자기 안에는 편지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건 유 도장님이 남북 십성에 오르시던 날, 지어 드린 도복이야. 너도 똑같은 옷으로 준비했어.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꼭 이기길 바랄게.
도복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도복을 입고 겉옷을 걸친 뒤 동경(銅鏡:거울) 앞에 서자, 유우화와 똑 닮은 사내가 서 있었다.
‘유우화. 너와 나의 비원을 이룰 때가, 마침내 왔다. 지켜보고 있어라.’
남량은 굳은 표정으로 화양검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는 우주검의 경지에 들지 못했다.
남궁월에게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우주검의 경지까지는 고작 반 걸음 정도 남겨 두었다. 이번 전투에서 경지에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해낼 것이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드디어 출정이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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