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무림맹 전투(5)
남량이 혈마의 목을 잡은 직후, 분신은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남북 십성이 백발의 사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건…….”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던 남궁천이 나직이 말했다.
“저 사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남량 도장이 맞는 건가?”
남북 십성은 남량의 기운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맑고 순수한, 그러면서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기운이었다.
방월 대사는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색의 화염……. 그건 화산의 전설적인 무공, 자하신공을 발현했을 때의 현상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남량 도장이 그 무공을 익힌 것인가?”
팽인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이 거대한 존재감……. 마치 맹주를 보는 것 같군.”
당지황도 끌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더욱 괴물이 되었군. 남량.”
유선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은 간절한 표정으로 남량을 응시했다.
“이제 모든 건 남량 도장의 손에 달려 있네.”
수라의 심장과 자하신공의 힘을 얻어 경지를 넘은 남량.
탄영의 몸을 차지해 완전한 힘을 되찾은 혈마.
과연 하늘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무림의 명운을 건 최후의 싸움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혈마는 자신의 목을 잡은 남량을 응시하다 눈살을 찌푸렸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군. 선기(仙氣)인가.’
직후, 혈마의 기운과 남량의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남량은 혈마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탄영을 불러와라.”
혈마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 몸을 차지한 이상, 불가능하다.”
검은 섬광을 터뜨리며 수라화를 마친 남량이 말했다.
“그럼 네 영혼을 먼저 소멸시키겠다.”
“그게 말처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직후, 남량이 순식간에 혈마의 앞으로 쇄도해 왔다.
쩌엉! 남량은 어깨로 혈마를 들이받았다.
혈마는 울컥 피를 내뱉으며 포탄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혈마가 이를 악물었다.
“크윽. 네놈이 감히……. 겨우 인간 주제에…….”
남량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소중한 것을 앗아 간 대가를, 지금 치르게 해 주마.”
“흥. 수라의 육체와 선인의 힘을 조금 얻었다고 해서 네놈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콰앙! 혈마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며 외쳤다.
“진정한 힘의 격차를 깨닫게 만들어 주지!”
지잉! 혈마가 손을 뻗자 붉은 기운이 쏘아져 나갔다.
남량은 즉시 몸을 틀어 혈마의 공격을 피해 냈다.
콰아아아앙!
날아간 기운은 맹주전 근처의 언덕 하나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렸다. 가공할 위력이었다.
혈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신의 힘이다. 손가락 하나로 언덕을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는 힘. 너도 시간이 흐른다면 가능하겠지. 허나 너에게는 힘에 적응하고 기술을 연마할 시간이 없다. 그게 네놈이 패배하는 이유다.”
남량의 표정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혈마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건방진……. 언제까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파팟! 재차 달려든 혈마가 연신 손을 휘둘렀다.
펑! 퍼엉! 폭음이 울리며 붉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남량은 월인비를 펼치며 섬광을 피해 물러났다.
그러나 곧 움직임을 따라잡히며 상처가 생겨났다.
물론 그 상처는 수라의 재생력에 의해 금방 회복되었다.
쇄애애액! 남량은 혈마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혈마는 놀랍게도 손으로 칼날을 붙잡아 멈춰 세웠다.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 힘과 속도 모두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수라의 재생력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혈마는 입을 크게 벌리며 붉은 광포(光砲)를 내쏘았다.
콰아아아앙! 남량의 신형이 섬광에 묻혀 사라졌다.
지켜보던 남북 십성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남량 도장!!!”
언덕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가진 섬광을, 지척에서 맞아 버렸다. 분명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순간, 혈마의 표정이 굳었다.
남량이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거리에서 날린 기운을 받아 내고도 멀쩡하다고?’
혈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남량은 싸늘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실을 깨닫지 못한 건 어느 쪽이지? 혈마여.”
“네, 네놈이…….”
“내 힘이 너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천만에. 방금 전은 너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가진 힘의 4할을 숨긴 채 싸운 것인데…….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둔하기 짝이 없구나. 네가 어째서 천마에게 당한 것인지 아주 잘 알겠다.”
남량의 도발에 혈마가 격노했다.
“닥쳐라! 하찮은 벌레 주제에 감히 나를 조롱해!”
혈마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우웅. 붉은색 기의 구체가 생성되며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탄영이 쓴 기술과 비슷하나,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저것이 놈의 주력 기술인가.’
혈마는 남량을 향해 구체를 던지며 소리쳤다.
“네놈과 함께 이 일대를 흔적도 없이 날려 주마!”
쿠구구구구구!!!
남량은 시야를 가득 채운 태양과 같은 기의 덩어리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검을 들었다.
“보여 주마. 네놈을 죽이기 위해 수련한 자하신공의 힘을-.”
남량은 칼끝에 자하신공의 선기를 집중시킨 뒤, 휘둘렀다.
자색 화염을 두른 검강이 수평으로 뻗어 나갔다.
“자하신공. 참천(斬天).”
그 순간, 혈마는 똑똑히 보았다.
천지가 둘로 갈라지는 광경을.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붉은 구체가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참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날아와 혈마의 허리를 베었다.
콰당. 잘려 나간 상체가 바닥에 먼저 떨어지고, 이어서 하체가 쓰러졌다. 혈마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남량이 검을 늘어뜨린 채 백발을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얀 귀신처럼 보였다.
그는 문득,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인간을 초월한 내가?’
혈마는 수치심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다.
“그럴 리 없다! 나는 혈마다! 천하를 다스릴 존재란 말이다! 너 따위 인간에게 죽을 것 같으냐!”
혈마는 결국 자신이 가진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흡혈마공(吸血魔功)의 능력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가 바닥에 손을 대자, 무림맹 전장에 흩뿌려진 피가 모조리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피를 흡수한 그가, 길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앙! 폭발이 터지며 그 자리에 괴물로 변한 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흐흐.”
그는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영광으로 알거라. 너를 상대하기 위해, 나는 또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직후, 혈마가 발사한 광선포가 남량의 명치를 관통했다.
남량이 순간 반응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남량은 피를 토하며 휘청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라가 외쳤다.
-놈의 힘이 재생을 방해하는군. 잘 들어라, 인간. 상처 회복은 나에게 맡기고 너는 싸움에만 집중해라.
‘알았다.’
슈웅! 순식간에 쇄도한 혈마가 남량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남량은 바닥을 구르다시피 해 혈마의 공격을 피해 냈다.
콰아아아앙! 주먹의 풍압만으로 바닥에 구덩이가 파였다.
혈마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목숨을 건졌군. 허나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다.”
마침 상처의 치유가 끝났다. 벌떡 몸을 일으킨 남량이 말했다.
“의미 없는 발악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니 말이지.”
그는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
검술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 상단세였다.
“광영자에게서 전수받은 자하신공의 마지막 기술. 사용하려면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이걸로 끝을 내자.”
그를 바라보던 혈마가 표정을 찌푸렸다.
‘뭐냐.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불길함은?’
혈마는 불길함을 지우기 위해 남량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남량이 수직으로 천천히 검을 내리그었다.
“자하신공. 섬월(纖月)-.”
화아아아아악!
시린 월광(月光)이 뿜어져 나오며 무림맹 전역을 가득 뒤덮었다.
남북 십성뿐 아니라 한창 외원에서 전투를 치르던 무인들도 눈부신 광채에 눈을 감았다.
‘맹주전 쪽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유라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음?”
그녀는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서 사기(邪氣)가 씻은 듯 사라진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유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세뇌가 풀렸다. 그 말인즉, 탄영이 죽었다는 뜻이다!’
잠시 침묵하던 무림 연합 세력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끝났다! 전쟁이, 전쟁이 끝났다!”
“우와아아아아! 남북 십성이 해냈다!”
세뇌에서 풀린 대원들은 길었던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매화오절은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기뻐하며 외쳤다.
“으하하하! 남 사제가 해낼 줄 알고 있었어!”
“역시 우리 형님이 최고다! 하하하하!”
“아야야야! 그만 좀 흔들어! 나 다쳤다고 이것들아!”
유라는 맹주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다. 남 사제…….’
“후우.”
한숨을 내뱉은 남량이 고개를 들어 혈마를 응시했다.
혈마는 이미 소멸되었고, 죽음을 앞둔 탄영이 있었다.
그녀는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끝이 날 줄이야……. 참으로 허무하군.”
남량은 탄영을 내려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대화로 정체를 밝히고 싶었지만, 주변에 남북 십성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알겠느냐?”
남량의 정체를 전해 들은 탄영은 경악한 표정과 황당한 표정을 번갈아 짓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단 말이지…….”
그녀는 남량을 응시하며 말했다.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군. 당신…….”
“가라. 효초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이제 남은 건 지월뿐인가? 하나 알려 주지……. 당신은 지월을 절대로 이길 수 없어……. 그는 나보다 더 거창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거든. 후후. 아주 재미있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탄영은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걸로 두 번째 복수의 끝인가.’
남량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월. 다음은 네놈 차례다.’
복수를 완수하는 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만, 탄영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창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라…….
지월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남북 십성이 달려왔다.
“남량 도장! 해냈구만! 정말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자네가 무림을 구했네. 정말 고맙네.”
그들에게 둘러싸인 남량은 씁쓸한 표정으로 구름을 응시했다.
‘청아. 내가 이겼다. 이제 편히 쉬거라. 편히…….’
제2차 마교대전. 무림맹 전투의 끝이었다.
***
달칵. 지월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있던 한 남자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대 표정이…….”
“아닙니다. 절친했던 친구가 죽은 것 같아서요.”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는 건가? 대단하구만.”
“그저 직감일 뿐입니다. 하하.”
가볍게 웃은 지월이 생각했다.
‘설마 탄영마저 죽일 줄이야. 나를 더 재미있게 해 주는군.’
남자는 멋들어진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무튼, 보름 뒤에 그대 말대로 남북 십성을 부르도록 하지.”
지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폐하.”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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