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자하신공(紫霞神功)(1)
개방의 거지가 무림맹의 소식을 알려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비보(悲報)를 전해 들은 매화오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입니까? 맹주가 전사하고 무림맹이……. 궤멸되었다고요?”
유라가 그녀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노학개는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왕 유 대협도 죽었네. 전부 탄영, 그 여인의 짓일세.”
운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서, 설마요. 남북 십성인데. 무림 최강의 무인들이 그리 쉽게 당했을 리가 있겠어요? 맹주는 천마와도 호각을 이룬 사람인데 그 부하한테 죽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노학개는 깊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찬야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돌아가셨다고? 스승님이? 그런…….”
낭인회를 떠나던 날,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네가 화산의 제자로 남아 있어도 나는 네 스승이다. 그러니 어떤 일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거라.’
그게 스승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찬야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남량은 무거운 표정으로 찬야의 등을 토닥였다.
충격을 받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낭연청에게 들었을 때, 어느 정도 불길한 예감이 들긴 했다.
그런데 설마 고경홍이 당했을 줄이야.
‘혈마의 힘이 현경의 경지마저 뛰어넘을 정도란 말인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위지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떡하지?”
노학개는 개방의 거지를 불러 명했다.
“일단 남북 십성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해야겠다. 당장 서신을 보내도록 하거라. 낙양에서 오는 소식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네. 방주님.”
“아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을 전부 불러라.”
마교대전 이후, 강호에 또다시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운휘는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무신이 죽었다니…….”
위지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무림의 최고 전력을 둘이나 잃었으니 사기가 바닥을 치겠군.”
눈물을 그친 찬야가 노학개에게 물었다.
“방주님. 낭인회는 지금 누가 이끌고 있습니까?”
“장탁이라는 인물일세. 은왕의 보좌였다고 하는군. 그도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이네.”
노학개는 방을 나서며 말했다.
“곧 전쟁이 벌어질 걸세. 마음을 단단히 먹게나.”
남량은 밤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는 술병을 든 채였다.
한참을 걷던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홍. 자네를 처음 만난 날, 나는 알 수 있었네. 우리는 장차 서로의 대적(大敵)이 될 것임을. 헌데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손에 죽지 못했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도 나는 자네가 부럽네. 나처럼 믿고 있던 부하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고 싸우다 죽었으니 적어도 명예로운 죽음 아닌가. 하하하.”
남량은 오랜만에 천마 위광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술병의 마개를 뽑은 다음 바닥에 부었다.
“이건 평소 자네가 좋아하던 술이네. 한때 자네의 대적이었던 사람으로서 가는 길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가져왔네.”
절반을 부은 남량이 남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길고 길었던 마교와 무림의 전쟁도 이제 곧 끝이 날 걸세.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모르겠네만.”
남량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마교를 멸할 생각이네. 탄영, 그 배신자의 머리를 잘라 자네의 영전에 바칠 테니 지켜보게나.”
그러니 이만 편히 쉬시게. 나의 오랜 친구여.
***
서신을 보낸 뒤,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죽은 두 사람을 제외한 남북 십성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 장소는 무림학관 후원의 정자였다.
그들을 소집한 금왕 노학개가 말문을 열었다.
“무림맹을 정찰한 방도들이 어젯밤에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무림맹을 점령한 탄영은 혈마의 힘을 이용, 무림맹의 대원들을 세뇌시켜 자신의 수하로 만든 모양입니다. 과거 혈마도 그 힘을 가지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숫자는 대략 오천 정도입니다.”
검제 태화 진인이 이를 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골육상쟁을 벌이게 만들 셈인가. 악독하군. 탄영…….”
불제 방월 대사는 나직이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도제 팽인호가 가볍게 혀를 찼다.
“결국 전면전인가. 그럼 본가에 서신을 보내 가문의 정예들을 낙양으로 집결시켜야겠군.”
용제 유선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마교대전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탄영은 천마조차 이기지 못한 맹주를 이겼어요. 그런 괴물을 상대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요?”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남북 십성의 일원이 그런 약한 소리를 내뱉으면 쓰겠는가. 우린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걸세.”
독왕 당지황이 곰방대의 연기를 내뿜으며 웃음을 흘렸다.
“무서우면 빠지시게. 나는 낙양으로 가서 혈마의 힘을 흡수한 탄영을 연구해 볼 참이니까. 끌끌끌.”
도군 유종학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전략을 세워야겠군. 일단 적들의 전력을 먼저…….”
그때, 노학개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받았다.
“전략을 세우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맹주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남북 십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노학개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게.”
방문이 열리고 남량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곱 명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남북 십성의 자리는 한순간이라도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남북 십성 중 누군가 죽게 되어 공석(空席)이 생긴다면, 그 자리에는 백매화 남량을 세우도록 하라. 그는 유일하게 십성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이것이 맹주께서 남기신 전언입니다.”
“맹주님이…….”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남량이 남북 십성의 칭호를 얻기에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남궁천은 턱수염을 긁으며 말했다.
“우리들 중에 남량 도장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네. 무려 효초아를 쓰러뜨린 사내야. 그가 세운 공을 따져 보면 자격은 차고 넘치지.”
나머지 십성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그 말에 동의했다.
노학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 순간부터 화산파 도사 남량은 남북 십성의 칭호를 얻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남북 십성이 된 남량의 별호는 ‘검황(劍皇)’이 되었다.
남량은 그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궁천은 미소를 지으며 포권의 예에 답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연회를 열도록 하지.”
본래대로 돌아와, 남북 십성은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벽은 무림맹의 오천 대원이네.”
“이쪽도 전력을 모으면 숫자는 비등할 것 같은데…….”
용제 유선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쪽은 저와 노 방주님이 맡도록 하지요.”
“좋소. 그럼 다음은 탄영의 심복인 사환과 담승이오.”
“사환은 이 남궁 모가 상대하지요.”
“그럼 담승은 소승이 맡겠습니다.”
“알겠소이다. 그럼 다음은 호법당과 순찰당인데…….”
***
회의를 마친 남량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화산파의 장문인 공월 진인이었다.
남량은 그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방금 전에. 회의는 끝났느냐?”
“네. 집결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보름 뒤입니다.”
“그렇군. 이화정에게 서신을 보내야겠구나.”
공월 진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날씨가 좋구나. 후원에서 차나 한잔하자.”
두 사람은 후원의 평상 위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은 공월 진인이 말했다.
“그래. 네가 남북 십성이 되었단 말이지?”
“네. 아직은 조금 어색하군요.”
공월 진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장하다. 네 스승이 하늘에서 기뻐하고 있을 거야.”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멀리서 유우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역시 내 제자야! 검황이라! 아주 멋진 별호로구나! 하하하.’
그는 차를 홀짝이며 문득 차오르는 그리움을 달랬다.
남량을 응시하던 공월 진인이 갑자기 물었다.
“량아. 너는 탄영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느냐?”
잠시 생각하던 남량이 나직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남량과 정신을 공유하는 수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내가 직접 현신(現身)하면 그깟 잡귀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소멸시킬 수 있다.
수라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남량이 말했다.
“물론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지 승패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그렇군. 혈마에게는 수라의 힘도 통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
“덕분에 나도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남량은 눈을 깜빡였다. 무엇을 결정했다는 건가?
공월 진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량아.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수련하거라.”
그 말에 남량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장문인. 자하신공은 화산의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닙니까. 헌데 그것을 제가 어떻게?”
“강호를 마교로부터 구하기 위함이다.”
화산의 도사로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도사들은 도문의 규율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노도인의 경우, 더욱 그랬다.
이 결정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공월 진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역대 화산의 장문인들 가운데,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이유를 아느냐?”
“그만큼 익히기 힘든 무공이기 때문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다.”
공월 진인은 품에서 약도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매원향(梅園鄕)이라는 곳이 있다. 화산파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으로 가면 시조(始祖)인 광영자가 계실 것이다.”
남량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광영자라면 수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은 오래전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셨다. 문파 내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다.”
공월 진인은 계속 말했다.
“매원향으로 가서 그분에게 너를 보여라. 그럼 그분이 너의 자질을 판단하고 자하신공을 전수할지 결정하실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너는 충분히 선택받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평상에서 내려온 남량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반드시 자하신공을 전수받고 돌아오겠습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상대가 화산의 시조든 신선이든 간에 거부한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전수받을 생각이었다.
공월 진인은 남량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믿고 있으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남량은 몸을 돌려 후원을 벗어났다.
***
남량은 매원향으로 떠나기 전, 매화오절을 불러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매원향에 들렀다 바로 낙양으로 갈 생각이야. 늦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알았다.”
“그럼 결전 당일 날 보자.”
슈육! 말을 마친 남량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떠난 방향을 응시하던 유라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우리도 각자 전쟁을 준비하자.”
“그래.”
세 명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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