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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134화 (134/164)

<134화>

혈마의 재림

스륵. 비단 옷자락을 끌며 탄영이 걸어 나왔다.

손에는 보자기를 들고 있었는데,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경홍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한 잔 내오지 않겠나? 명왕.”

“적의 수괴에게 내줄 차는 없다.”

고경홍의 목소리에는 중후한 내력이 실려 있어 주변 대기가 지르릉-. 하고 울렸다.

탄영의 양옆에 선 심복들은 표정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엄청난 위압감이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야.’

‘이자가 바로 남북 십성의 최강, 무신(武神) 고경홍인가.’

고경홍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스스로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발을 들였으니, 대가를 치를 각오도 되어 있겠지?”

탄영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흥. 늙은 용 한 마리 잡는 데 무슨 대가? 오는 길에 선물을 하나 가져왔으니 그거나 확인해 보시지.”

그녀는 들고 있던 보자기를 던졌다.

툭.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보자기가 풀리며 안에 담겼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을 구른 그것이 고경홍의 발치에 걸려 멈췄다.

직후, 고경홍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바로 남북 십성, 은왕 유서휘의 머리였다!

충격을 받은 고경홍을 비웃으며, 탄영이 말했다.

“후후. 내가 얻은 힘을, 그자를 상대로 가장 먼저 시험해 봤지.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고경홍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장포를 벗어 은왕의 머리를 감쌌다.

“조금만 기다리시게. 곧 장례를 치러 줄 터이니.”

몸을 돌린 고경홍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의 애병(愛兵). 비천언월도가 날아와 손에 잡혔다.

“한 가지는 성공했다.”

고경홍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장이 부르르 떨리며 먼지가 떨어졌다.

“나를 진심으로 분노하게 만든 것.”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탄영을 노려보았다.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인왕(仁王)의 형상이 보이는 듯했다.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하지. 반드시 이 자리에서 네년을 죽여, 유 대협의 영전에 바치겠다.”

“과연 네가 그럴 수 있을까?”

우우웅.

탄영의 전신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혈마의 힘. 그것이 발현된 것이다.

“이 힘만 있으면 누구도 두렵지 않아. 무림 최강이라 불리는 당신조차도, 내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고경홍은 허리를 낮추고 언월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리석은 것. 네년의 그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내가 지금 깨닫게 해 주마.”

드드드!

둘의 기(氣)가 충돌하며 궁전이 지진난 것처럼 진동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탄영은 고개를 돌려 수하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무림맹 놈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학살해라.”

“명을 받듭니다.”

사흉마의 제1위(位), 도올 사환. 그리고 제2위(位), 궁기(窮奇) 담승(譚承)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대전을 나가자, 탄영은 양손을 교차한 자세를 취했다.

삼천위, 천귀조(天鬼鳥) 탄영. 그녀가 익힌 마공은 묵룡마조(墨龍魔爪)라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조법(爪法)이었다.

고경홍이 언월도의 자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네년이 자신하는 그 힘. 바로 꺼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터엉! 바닥을 박찬 그가 탄영을 향해 쇄도하며 언월도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죽고 싶지 않다면!”

슈와앙!

황금빛 도강(刀罡)을 머금은 칼날이 태산 같은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탄영은 묵룡마조의 마혼경천(魔魂驚天) 초식을 펼쳤다.

그녀가 양손을 뻗자,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쩌엉! 두 기운이 충돌한 직후, 탄영은 눈을 부릅떴다.

혈마의 힘을 완벽히 흡수했으니, 쉽게 막을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고경홍의 일도(一刀)에 담긴 힘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고경홍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내 일격을 막아 낸 것은 칭찬해 주마. 허나, 방금 전의 일격은 2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는 3성의 공력을 담아 휘두를 테니 어디 막아 보거라.”

고경홍은 한 발을 내딛으며 힘껏 찌르기를 날렸다.

투콱-! 한 줄기 섬광이 탄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공격의 위력을 직감한 탄영은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콰앙! 섬광은 맹주전 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엄청나군. 과연 무신이란 칭호에 걸맞은 힘이야.”

탄영은 입술을 깨물며 혈마의 힘을 더욱 끌어냈다.

“허나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비호처럼 쇄도한 탄영이 묵룡마조의 폭렬백마격(爆裂百魔擊) 초식을 날렸다.

파파파파팟! 붉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허공을 메우며 고경홍을 공격해 왔다.

“어떤 공격을 해도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다!”

크게 외친 고경홍이 언월도를 휘둘러 공격을 모두 쳐 냈다.

그와 동시에 탄영의 목을 노리고 수평으로 도를 휘둘렀다.

쇄애애액!

자세를 낮춘 탄영은 고경홍의 도격을 피하며 그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직후, 묵룡마조 혈조격(血爪擊)으로 초식을 전개하며 공격을 가했다.

붉은 기운을 머금은 손이 고경홍의 심장을 향해 뻗어 갔다.

탄영이 안광을 번득이며 소리쳤다.

“죽어라. 명왕!”

그 순간, 고경홍의 전신에서 황금빛 기파(氣波)가 폭발하듯 터져 나와 탄영을 밀어냈다.

“크윽!”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한 그녀가 표정을 찌푸렸다.

‘반탄강기(反彈罡氣)인가. 빌어먹을.’

공격을 막아 낸 고경홍이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다고.”

황염(黃炎)을 온몸에 두른 그는 마치 신장(神將)과 같았다.

전신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탄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다.”

고경홍은 언월도를 비스듬히 치켜들며 기운을 끌어모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온다. 탄영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진천파(振天派).”

언월도에 기를 집중시킨 고경홍이, 탄영을 향해 휘둘렀다.

콰드드드득!

충격파가 바닥을 찌그러뜨리며 부채꼴로 쏘아져 나갔다.

탄영은 다급히 혈마의 힘을 끌어올려 보호막을 생성했다.

쩌어엉! 두 기운이 격돌한 순간, 탄영은 경악하고 말았다.

고경홍의 절기가 혈마의 기운으로 친 붉은 막을 부순 것이다.

그대로 밀려든 충격파가 그녀를 덮쳤다.

“끄아아아아악!”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탄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즉사할 정도의 부상이었지만, 혈마의 힘을 흡수한 그녀는 달랐다.

한 차례 붉은 섬광이 번쩍이자, 상처는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탄영의 모습은, 더욱 괴물처럼 변해 있었다. 온몸에 핏줄이 돋아나고 눈은 붉게 변했으며, 이빨과 손톱은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았느냐? 네놈의 가공할 힘도 불사(不死)의 몸이 된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혈마의 돌을 나누어 준 수하들은 돌이 부서지면 죽지만, 돌을 완전히 흡수한 내겐 그런 약점 따윈 존재하지 않지. 나는 죽음마저 초월한 절대자며 신(神)이다. 천마조차 오르지 못한 지고의 경지에, 나는 올라섰다.”

“하하하.”

분명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고경홍은 오히려 웃었다.

미소를 거둔 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웃는 거지?”

“진심으로 천마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고경홍은 단호히 말했다.

“위광은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무인이었다. 비록 가는 길은 달랐으나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헌데, 고작 네년 따위가 그의 명예를 더럽히려 들어?”

고경홍은 강철과 같은 투기를 뿜어내며 언월도를 고쳐 잡았다.

“너는 결코 천마를 넘어설 수 없다. 절대자도, 신도 아니다. 그걸 지금 깨닫게 해 주마.”

중원 최강의 무인과 혈마의 힘을 얻은 마인.

두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사흉마를 상대하던 무림맹 총대주 양악은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강하구나. 역시 마교의 간부인가.”

그의 주변에는 처참하게 당한 대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멍하니 부하들의 시체를 바라보던 양악이 고개를 돌려 사환을 노려보았다.

촤륵! 사환은 팔뚝에 난 검상을 순식간에 재생한 뒤 말했다.

“총대주답게 제법 강했다. 혈마의 힘을 부여받지 못했으면 더 치열한 결투가 되었을 터인데, 아쉽군.”

“크윽…….”

양악은 분한 듯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무림맹 7대주가 담승을 상대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발악해 봐야 헛수고다. 오늘 무림맹은 궤멸한다.”

“맹주님께서 버티고 계시는 한, 무림맹은 무너지지 않는다.”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마.”

사환이 마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왔다.

양악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흑영대주 비설이 다가왔다.

“돕겠습니다. 총대주.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비설 대주. 도망치지 않고 왜…….”

“흑영대는 무림맹의 그림자이며 저는 흑영대의 수장입니다. 제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조금만 버티세요. 맹주님이 오실 때까지.”

비설의 말에, 양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믿읍시다. 우리들의 무신을.”

맹주전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는 마침내 끝을 보이고 있었다.

“허억. 허억…….”

고경홍은 언월도로 몸을 지탱한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앞에는, 악의 화신이 된 탄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크하하. 가진 내력을 모두 소모했느냐?”

탄영은 손가락으로 고경홍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마를 죽이며 알게 되었지. 신처럼 보이던 네놈들도 결국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경홍은 이를 악물고 언월도를 휘둘렀다.

쩌엉! 충격파가 탄영의 어깨를 박살 냈다.

그러나 상처는 금방 재생되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보아라. 불사지체(不死肢體)가 된 내가, 신이라는 칭호에 더 가까워 보이지 않느냐?”

고경홍은 지친 와중에도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악귀에게 몸과 영혼을 바친 주제에 신은 무슨.”

그는 속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마지막이 될 것임을.

그렇다면 무신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최강의 일격으로 최후를 장식하리라.

‘내가 죽어도 무림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처억.

언월도를 높이 치켜든 그가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탄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나?”

고경홍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악을 처단할 것이다.”

그는 투지와 긍지를 담아 소리쳤다.

“나는 무신 고경홍이다-!!!”

쩌어어엉!

고경홍이 언월도를 휘두르자 폭발하듯 광채가 터져 나오며 최후의 섬광이 쏘아져 나갔다.

최강의 오의-. 일광천지(日光天地)를 시전한 것이다.

동시에 탄영이 손을 뻗으며 혈마의 기운을 방출했다.

두 기운이 충돌하며 거대한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이어 눈부신 빛이 무림맹 전체를 가득 뒤덮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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