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수라의 심장(2)
“하하하!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홍선은 연신 민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남자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선녀처럼 아름다우셔서요. 정말,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하하.”
“그 아름답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죽는다.”
남량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실력이 궁금해서 왔다고?”
홍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주(施主)의 영웅담은 질리도록 들었습니다. 은영단의 일백 자객을 홀로 격퇴하고 순찰당주 양봉, 잔혈검객 장제 등 초절정의 강자들을 차례대로 무찔렀으며 폭혈검객 장태정을 넘어 이제는 칠령귀인 유회와 백야마저 단신으로 처리! 하나같이 대단한 업적이더군요.”
홍선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궁금했습니다. 이런 대단한 일을 자꾸만 해내는 사내는 대체 누구일까? 얼마나 강할까? 과연 내 힘이 얼마나 통할까?”
“…….”
“마침 소림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와 한 번만 대련해 주세요.”
“흐음.”
남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막무가내로 도전해 오는 것까지 찬야 놈과 똑같군.’
안 그래도 홍선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이 땡중. 자세히 안 봐서 몰랐는데, 초절정의 경지를 넘었어.’
전설로 전해지는 소림의 72절예를 익힌 불제의 후계자.
그의 잠재 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목검을 구해다 줄 수 있겠나?”
남량의 말에, 홍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저와 대련해 주시는 겁니까?”
“한 수 가르쳐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당장 구해 오겠습니다!”
홍선은 크게 기뻐하며 연무장으로 몸을 날렸다.
***
잠시 뒤, 남량과 홍선은 마당 가운데 마주 보고 섰다.
목검을 휘둘러 가볍게 몸을 푼 남량이 물었다.
“소림의 72절예 중, 얼마나 익혔지?”
“절반 정도 익혔습니다.”
“대단하군. 역근경(易筋經)은 익혔을 테고…….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와 소림오권(少林五拳), 심의권(心意拳), 통배권(通背卷). 그리고 소림삼절수(少林三絶手), 항마십상장(降魔十三掌),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탄지신통(彈指神通)은 모두 익혔나?”
“탄지신통은 아직 수련 중에 있습니다.”
홍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량을 응시했다.
‘전부 소림 72절예 중 우선적으로 수련해야 할 무공들인데……. 외부인이 저걸 어떻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남량이 매화천수검의 검세를 취하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라.”
“아직 내력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너 정도는 가뿐하게 이기니 걱정 말도록.”
일순 홍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우우웅.
홍선의 전신에서 금색의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퍼엉! 몸을 박찬 홍선이 질풍 같은 권격을 날렸다.
남량은 빠르게 목검을 휘둘러 홍선의 주먹을 막아 냈다.
쩌엉! 한 차례 충격파가 터지며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묵직하군. 뛰어난 외가권(外家拳)에 소림의 최상승 내공이 더해진 결과인가.’
‘나름 제대로 날린 일격이었는데, 저렇게 간단히 막는다고? 역시 백매화는 대단하군.’
남량이 검을 들어 상단세를 취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잘 막아 보도록 해.”
공중으로 몸을 날린 남량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매화천수검의 4초식, 뇌전포화였다.
벼락을 동반한 검격이 떨어지자, 홍선은 다급히 권을 내질렀다. 소림오권의 창룡출수(蒼龍出手) 초식이었다.
쩌엉!
직후, 홍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벼락이 치는 듯 강력한 일격이었다.
‘공력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내상을 입었을 거야.’
남량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제법이군. 무릎 정도는 굽히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홍선은 남량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저 여유로운 표정……. 가진 힘의 절반도 안 쓴 게 분명해.’
같은 초절정의 경지인데도 이 정도의 격차라니.
그의 힘을 실감할수록, 홍선의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았다.
‘조금 더 확인해 보고 싶다. 백매화의 실력을!’
남량의 검을 쳐 낸 홍선은 권(拳)에서 장(掌)으로 변화시키며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을 내쏘았다.
파파팟!
월인비를 펼쳐 장력을 피해 낸 남량은 홍선의 측면으로 찔러 들어갔다.
쇄애애액!
남량의 검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홍선을 공격해 왔다.
홍선은 손으로 얼굴과 급소를 가린 채 방어에 집중했다.
그리고 남량의 빈틈을 발견한 순간,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소림의 백련신권(白蓮神拳)이 대기를 가르며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홍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피하지 못할 거다.’
그 순간, 남량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홍선은 깜짝 놀라며 남량의 기척을 추적했다.
남량은 홍선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상승의 경공이 발휘된 것이다.
쇄애액!
남량은 홍선의 등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홍선은 혀를 차며 연환신퇴(連環神腿)로 받아쳤다.
남량은 낙영용섬 초식을 펼치며 연격을 가해 왔다.
홍선은 방어 무공인 옥금강(玉金剛)으로 방어했다.
쩌엉!
홍선은 남량의 일검을 막는 데 성공했으나 방어가 풀리며 빈틈이 드러났다. 홍선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남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낙영용섬 난참(亂斬)으로 홍선의 전신을 타격했다.
퍼퍼퍼퍼퍽!
홍선은 비명을 지르며 공중을 날아 바닥에 엎어졌다.
검을 내린 남량이 쓰러진 홍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세게 나갔나. 제법 쓸 만한 물건이야.”
칭찬의 말이었지만, 기절한 홍선은 듣지 못했다.
그를 널찍한 바위에 눕힌 남량이 내력을 주입했다.
신음과 함께 눈을 뜬 홍선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대의 실력도 훌륭하더군.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 중에서는 단연 최강이야.”
“마교의 간부를 상대하려면 멀었지요.”
“당장은 그렇지만 곧 넘게 되겠지.”
“화산의 다른 제자들도 하나같이 뛰어난 인재라 들었습니다. 언제 한번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러지. 그들 중 한 명은 그대와 비슷한 부류이니 말이 잘 통할 거 같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남량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승려 무리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지?”
“수라동(修羅洞)을 지키는 승려들입니다. 저희는 저들을 흑승(黑僧)이라고 부르지요.”
“수라동? 소림에 그런 장소도 있었나?”
“듣기로는 사악한 힘이 깃든 물건을 봉인하는 장소라더군요.”
홍선이 나직이 말했다.
“아마도 이름이……. <수라의 심장>이었을 겁니다.”
***
밤이 깊었다. 복면을 쓴 흑승들은 그날도 수라동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흑승을 이끄는 대주 공원(空原)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응시했다.
‘어쩐지 오늘은 공기가 좋지 않구나.’
그의 곁으로 흑승 두 명이 다가와 말했다.
“대주님. 이만 교대하시지요.”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무래도 오늘은…….”
순간, 그들은 어둠 속을 향해 일제히 봉끝을 겨누었다.
“누구냐.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공원이 서늘히 내뱉었다. 이내 한 승려가 걸어 나왔다.
상대를 확인한 두 흑승이 경계를 풀며 봉을 내렸다.
그러나 공원만큼은 여전히 봉끝을 겨눈 채였다.
“이곳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오.”
젊은 승려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방장의 명을 받고 잠시 수라동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공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장께서? 이상하군. 매번 직접 오셨는데……. 그리고 사람을 보낼 거면 감원이 와야 정상 아닌가?’
공원은 승려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법명이 어떻게 되시오?”
“그건…….”
말하기를 주저하던 승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 정말 짜증 나네. 그냥 좀 들여보내 주면 어디가 덧나?”
도저히 사내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공원은 내력을 끌어올리며 승려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당장 정체를 밝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며 공원의 가슴팍에 피가 튀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명치 부근의 살점이 뜯겨 있었다.
공원은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당했다!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빨라!’
공원은 거친 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곁에 있던 두 명의 흑승도 이미 당한 뒤였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고개를 든 공원은 두 눈을 부릅떴다.
승려가 있던 자리에는 퇴폐적인 미모를 뿜어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나를 순순히 보내 줬으면 좀 좋아? 네 부하들이 죽은 건 전부 너 때문이야.”
공원은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
“네, 네년은 대체 누구냐…….”
“내 정체가 궁금해? 후후.”
콰직!
공원의 머리를 날려 버린 여인이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나는 효초아 님을 모시는 칠령귀의 요귀(妖鬼). 화령(花翎)이야. 어차피 말해 줘도 못 듣겠지만.”
***
그 시각, 남량은 홍선과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순, 남량은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홍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남량 시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남량은 산 아래를 응시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 기운은 설마……. 틀림없어. 마기다!’
그것도 마교의 간부쯤 되는 자들의 기운이었다.
‘그들이 왜 숭산에?’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남량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수라의 심장.’
수라의 심장에 대해서는 남량도 알고 있었다.
수백 년 전, 악한 사교 집단의 강마(降魔) 의식으로 인해 인세에 강림한 수라가, 세상을 어지럽혔다.
결국 높은 법력을 가진 고승들이 나서 수라를 제압했고, 어떤 물건에 수라를 봉인시켰다. 그것이 바로 수라의 심장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승들은 수라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물건을 다섯 조각으로 나누고 오행의 힘이 깃든 오악(五岳)에 안치했다고 하지. 만약 효초아가 그것을 노린다면…….’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남량은 마기가 느껴지는 부분을 가리키며 홍선에게 물었다.
“저쪽에 수라동이 있지 않나?”
“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빌어먹을.”
남량은 화양검을 챙겨 들고 객청을 나왔다.
그리고 산 아래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마교의 간부가 수라의 심장을 노리고 침입했으니 어서 가서 이 사실을 알려!”
***
터억.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도착하자, 복면을 쓴 승려들이 바닥에 쓰러진 광경이 보였다.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
‘한발 늦었구나. 효초아 이놈…….’
남량은 혀를 차며 수라동 내부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사기(邪氣)가 짙어졌다.
지하 깊은 곳에 내려오자 커다란 공동이 있었다.
고개를 돌린 남량의 시선에, 한 여인의 등이 보였다.
여인은 멍하니 공동의 중앙에 있는 제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것인가.”
여인은 제단 위에 놓인 붉은 구슬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라의 심장이.”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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