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수라의 심장(1)
남량은 단 보름 만에 소림이 위치한 숭산(嵩山)에 도착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그걸 보름 만에 주파한 것이다.
은왕은 국경을 넘는 즉시 남량을 업고 길을 달렸다.
마차나 말을 타는 것보다 이쪽이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길을 무시하고 산과 강을 건너 이동했다.
심지어 달리는 도중에 식사를 하지도 않았다.
반 각 정도 잠을 청하며 내력을 회복하는 때를 제외하고.
초인의 경지에 오른 남북 십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착했군. 저기가 숭산일세.”
은왕의 말에 남량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숭산 초입에는 세 명의 승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단 지객(知客)이 아니라 명망 높은 고승들이었다.
한 명은 손님을 받는 접객당의 당주이고, 다른 한 명은 소림 방장(方丈)을 보필하는 감원(監院)이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승려는 소림의 방장이자 남북 십성의 불제(佛帝)인 방월 대사였다.
은왕은 그들을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낭인회주 유서휘입니다.”
“은왕을 뵙습니다.”
방월 대사의 시선이 은왕의 등에 업힌 남량에게로 향했다.
“서신은 받아 보았습니다. 마기의 정수에 당했다고요.”
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월 대사가 다급히 말했다.
“남량 도장을 빨리 방장실(方丈室)로.”
“네. 방장.”
남량은 즉시 방장실로 옮겨졌다.
평상 위에 그를 눕힌 방월 대사가 아랫배를 확인해 보았다.
마기는 어느새 가슴 아래까지 퍼져 있었다.
방월 대사는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남량 도장의 정순한 도가 내력이 아니었다면 이미 고혼이 되었겠군. 아미타불.”
정신을 차린 남량이 힘겹게 대답했다.
“애써 막고는 있지만 그것도 슬슬 힘들군요. 기력을 꽤 많이 소모했습니다.”
“잘했네. 나머지는 빈승이 처리할 테니 걱정 마시게.”
“부탁드립니다.”
불제 방월. 한때 가장 성가신 적들 중 하나였던 만큼, 남량은 그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일신의 무력은 검성이나 명왕에 미치지 못하지만, 성스러운 기운을 품은 그의 법력(法力)은 마(魔)를 물리치는 힘이 있었다.
‘내 마기조차 막아 내던 자였으니 칠령귀의 마기 정도는 금방 몰아낼 것이다.’
천마가 불제의 힘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남량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월 대사는 남량의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도장의 몸에 법력을 흘려 마기를 몰아낼 것이네. 매우 고통스러울 테지만 버텨 주시게.”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방월 대사의 손바닥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크윽!’
남량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불덩이가 들어온 듯했다.
법력을 주입하자 마기가 반응해 날뛰기 시작했다.
남량의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왔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남량은 이를 악문 채 끔찍한 고통을 참아냈다.
시간이 지나자 정화된 마기가 검은 물이 되어 전신의 구멍을 통해 배출되었다.
방월 대사는 마침내 마기의 정수가 모인 장소를 찾아 그곳으로 법력을 집중시켰다.
화악-!
남량의 전신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기는 성스러운 기운에 의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남량은 기운의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잠시 의식을 잃었다.
***
남량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방장실에 있었다.
다만 누군가 옷을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방월 대사가 가만히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신이 좀 드시는가.”
남량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반나절 정도 지났다네.”
방월 대사는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목이 마를 터이니 물을 좀 마시게.”
“감사합니다.”
복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기는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역시 불제로군. 혹시 모르니 운기조식을 해 볼까.’
내력을 돌리려던 남량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력이……. 조금도 모이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불제는 남량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마기를 정화시키는 과정에서 내력이 빠져나간 듯하네. 허나 걱정하지 말게. 한동안 요양하면 며칠 안에 다시 찾게 될 것이니.”
“그렇군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량이 방월 대사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구해 주신 은혜, 보답하겠습니다. 대사.”
“보답이라. 남량 도장이 지금처럼 중원 무림을 위해 힘써 준다면 그것이 내게는 보답일세. 허허.”
남량은 내력이 돌아올 때까지 소림에서 머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은왕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낭인회로 돌아갔다네.”
“제가 북해에 가 있는 동안 별일 없었나요?”
“마교의 움직임은 아직 파악된 것이 없다네.”
남량은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대사의 후계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림대회 때에도 그렇고……. 남북 십성은 후계자를 최소 한 명 이상 가르치고 있는 걸로 아는데, 대사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늘 온화하던 방월 대사의 표정에 처음으로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자가 한 명 있긴 한데,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라네. 작은 죄를 지어 지금은 참회동(懺悔洞) 안에서 수련을 하는 중이네. 무림대회에 나가지 못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그렇군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방월 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속세의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이지……. 후우. 한창 수행에 집중해야 할 때에 여인을 보았으니…….”
남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려 주제에 여색을 탐했단 말이지? 기가 차는군.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누군가와 겹치는 기분이었다.
똑같이 여색을 밝히다 동굴에 갇힌 놈이 화산에도 있었다.
‘소림에도 찬야 같은 새끼가 존재했군.’
무예의 본향으로 불리는 소림의 제자들 가운데 불제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으니 범상치 않은 기재임에는 분명했다.
‘능력을 한번 보고 싶은데……. 하긴, 면벽 수련에 들었다고 하니 볼 일은 없겠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수련이 이틀 뒤에 끝날 것이라고는.
***
드드드-.
참회동의 입구를 막은 바위를 밀어내며, 젊은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랐지만 탄탄한 체격에 사내답게 잘생긴 외모였다.
그가 바로 남북 십성, 불제의 후계자인 홍선(洪宣)이었다.
“으음.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햇살이 눈부시네.”
중얼거린 홍선은 허공에 대고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터엉! 호쾌한 파공음과 함께 무형의 기(氣)가 뻗어 나갔다.
“역시. 자질 하나는 뛰어난 녀석이라니까.”
같은 배분의 제자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고개를 돌린 홍선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홍분. 그동안 대련을 못해서 그런데, 상대 좀 해 줄래?”
“사양할게. 너랑 대련하면 꼭 어디 한 군데 부러져서.”
홍분이라 불린 승려가 말했다.
“그것보다, 방장께서 너를 부르신다. 어서 가자.”
“제자 홍선이 방장을 뵙습니다.”
홍선은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방월 대사는 홍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새 더 강해졌구나. 확실히 수양이 부족하긴 하지만, 자질 하나만큼은 역대 소림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수준이다. 마교와의 전쟁이 코앞인 시점에 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방월 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참회동에 있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더냐.”
“세속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점.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너는 현 무림의 상황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느냐?”
“홍분에게 들었습니다. 마교의 발호(跋扈)에 대해…….”
“우린 지금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너 역시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지금부터 나머지 소림의 절예를 익히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하거라.”
“그리하겠습니다.”
홍선이 슬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방장. 제자가 한 가지 더 들은 것이 있는데……. 지금 이곳에 매화검선의 후계자인 남량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방월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북해에서 칠령귀를 격퇴하고 입은 상처로 인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지금은 치료를 끝내고 요양 중에 있다.”
홍선의 눈가가 반짝거렸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림 전역에 명성을 떨친, 고금을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업적을 남긴 자.
그가 은영단의 일백 자객을 홀로 격퇴하고 마교의 간자였던 양봉이나 잔혈검객 장제, 폭혈검객 장태정 같은 초절정의 고수들과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참회동에 있는 동안, 북해에 가서 칠령귀 중 한 명을 단신으로 상대해 쓰러뜨렸다고 한다.
남북 십성을 제외하면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마교의 간부를 말이다.
홍분은 말했다.
당금 강호에서 그의 위치는 남북 십성의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그 말을 들은 홍선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남량 도장.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는데, 설마 소림에 머무르고 있을 줄이야! 당장 만나러 가 봐야겠다.’
방장실을 나온 그는 곧장 남량이 머무르는 객청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
남량은 그날도 객청 마당에 나와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력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면 이틀 뒤에는 완전히 회복되겠어.’
비기, 연화세계를 터득하고 그의 경지는 한 단계 상승했다.
허나 삼천위를 상대하려면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 화경(化境)의 경지에 들어야 한다.’
남량은 자신이 화경의 벽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화경의 경지는 남북 십성과 같은 초인(超人)의 경지.
화경에 들지 않은 자들과 화경에 든 자들의 차이는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경에 들지 않고서는 삼천위를 상대하기란 영원히 요원했다.
‘응룡의 힘을 한 번만 더 얻으면 좋겠지만 여의주는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만 발동한다. 거기다 무조건 발동할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천운에 기대기보단 눈앞에 있는 자하신공에 더 집중하자.’
남량이 막 수련을 끝내고 검을 내렸을 때였다.
마당으로 젊은 승려 한 명이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자였다.
‘혹시 저자가 불제의 후계자인 홍선인가.’
참회동에 들었다더니 금방 나온 모양이었다.
‘흐음. 상당히 괜찮군. 역시 소림의 제자라는 건가. 이 정도면 남북 십성의 후계자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봐도 되겠어.’
남량은 홍선의 표정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거지?’
남량은 그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반갑소. 나는 화산파의 매화검수 남량이라고…….”
남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홍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다, 당신……. 설마 여자였습니까?”
“…….”
남량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홍선은 남량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 설마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고 보니 홍분이 엄청난 미인이라는 말을 했었지. 바, 반갑소. 남량 도장. 빈승은 홍선이라고 하오. 차, 참으로 아름답구려.”
“후우.”
남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찬야와 비슷한 놈인 줄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설마 처음 만나서 하는 짓까지 똑같을 줄이야.
“그럼 나도 똑같이 대응해 줘야겠지.”
남량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빨 꽉 깨물어라.”
쩌억! 남량의 주먹이 홍선의 안면에 적중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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