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복마전(伏魔殿). 금적금왕(擒賊擒王)(4)
사라락-.
대전에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라 탄성을 뱉었다. 고위영의 시체가 손가락 끝부분부터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재가 흩날리듯, 부서진 가루가 허공에 흩날렸다.
“형님. 왜 저러는 거죠?”
당황한 운휘의 물음에, 남량이 덤덤히 대답했다.
“마공의 부작용이야. 노력 없이 강한 힘을 얻으면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 저자도 분명 알았을 거다. 자신의 결말을.”
“그런데도 마공을 익힌 건가요? 대체 왜…….”
“글쎄다. 아마 천음선녀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남량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
비록 변절하고 마교의 간자로 전락한 자였지만, 폭약이 아닌 검으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나름대로 마지막 남은 무사로서의 자존심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로 정의로운 협사였건만, 끝은 비참하구나…….”
누군가 장탄식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맹주님. 고위영의 처리를 어찌할까요?”
누군가 물었다. 고경홍은 아들의 시체를 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대전의 천장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량은 고경홍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들을 제 손으로 참살(斬殺)한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긴 침묵이 흐르고 고경홍이 입을 열었다.
“고위영이 마교의 간자임을 밝히고 수색을 더 강화하라. 마교와 연관된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색출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맹주 자신의 명성에도 적지 않은 흠집이 생길 터였다. 비록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부는 이룬 셈이었다.
“피곤하군. 가서 쉬어야겠다.”
고경홍은 언월도를 든 채 홀로 대전을 벗어났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발걸음이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어느새 고위영의 시체는 전부 흩어지고 그가 죽은 자리에는 옷가지만이 허전하게 남아 있었다.
“옷가지는 태워 버릴까요?”
“아니다. 챙겨 두거라.”
총관 건옹은 고위영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만지며 나직이 울음을 터뜨렸다.
젊을 적부터 고경홍과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건옹에게 고위영은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멍청한 놈…….”
무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건옹의 울음을 못 본 척했다.
운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무겁게 말했다.
“참으로 무서운 놈들이야. 사람의 약한 내면을 파고들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다니.”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놈들을 쓰러뜨려야지. 더 이상 저런 안타까운 희생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유라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해가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숨는 시각, 매화오절은 낙양 저자에 위치한 객잔에 도착했다.
마교의 계략을 훌륭히 막아 내고 임무를 완수했으니 오늘 하루는 마음껏 먹고 마실 생각이었다.
객잔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중에는 무림맹의 무사들과 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남량 일행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도사님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자리가 조금 남습니다.”
그때 건너편에서도 남량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희와도 한잔하시지요!”
이내 남량 일행에게 이목이 집중되며 그곳에 있던 무림인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합석을 요구했다.
찬야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영웅은 자고로 어딜 가든 주목받는 법이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철면피가 따로 없네.”
“하하. 그것도 영웅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야.”
찬야는 유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앉았다.
“뭐 해? 어서 앉아. 오늘을 즐기자고.”
“그래. 다들 앉자.”
남량은 피식 웃으며 일행과 함께 착석했다.
점소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젊은 도사님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이 객잔에서 가장 자신 있는 요리로 전부 내오고 술도 한 말은 내오시오. 아, 물론 가장 비싼 술로. 싸구려 화주는 내오지 말고.”
찬야는 옷소매에 손을 넣어 금자를 꺼내 점소이의 손에 올려 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점소이가 금자를 몇 번 살펴보다 입에 깨물어 보고서는 감동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이고! 역시 화산의 도사님이십니다! 어쩜 이리 풍모가 남다르신지……. 소인, 대단히 감복하였습니다! 당장 주문하신 음식과 술을 내오도록 하지요!”
“좋아. 좋은 자세야! 하하!”
찬야는 금자를 하나 더 꺼내 점소이의 손에 얹었다.
“그리고 이건, 여기 객잔에 있는 모든 무림 동포들의 술과 음식값이오. 대신 치르도록 하시오.”
“네?”
점소이가 깜짝 놀라고 무림인들이 격하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멋있다, 화산! 역시 화산이다!”
“영웅의 기개가 돋보이는구나!”
객잔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차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위지혁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놈도 참 다른 의미로 화산의 명성을 드높이는군.”
점소이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는 혹여나 이 부유한 젊은 도사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재빨리 금자를 품에 넣고 주방으로 날다시피 들어갔다.
금세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일행은 각자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자, 술을 그냥 먹으면 재미가 없지. 이건 내가 새로 개발한 건데, 이렇게 두 술을 섞어서 마시면 더 맛있어.”
찬야는 각기 다른 술을 한데 섞어 일행에게 한 잔씩 나눠 주었다. 유라는 질색하며 술잔을 밀어냈다.
“치워.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조금 세긴 한데 이게 또 색다른 맛이…….”
“치워! 쟤한테 절대 술 주지 마! 절대로!”
남량이 기겁하며 술잔을 치우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심지어 유라마저 놀란 시선으로 남량을 응시했다.
“너희, 이 객잔 사람들 다 죽일 일 있어?”
남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량은 이미 유라의 고약한 술버릇을 알고 있었기에 자칫 객잔에서 칼부림이 날 것을 염려해 말린 것이었다.
허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해하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누군가 껄껄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남 소협이 불사검협을 아끼는 마음이 참으로 두텁습니다그려.”
“어서 잔 치우게! 남 소협 칼에 다들 죽고 싶은가? 허허.”
응? 이게 다 뭔 헛소리야?
뒤늦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남량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뜨거운 눈으로 자신과 유라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설마!’
남량은 당황하며 입을 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운휘가 의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혀, 형님! 설마 바윗덩이랑, 혼인하신 겁니까?”
“뭔 혼인이야 이 새끼야! 가도 너무 갔잖아!”
“우리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이성 간에 서로 아껴 주면 혼인하는 거라고…….”
“대체 너희 스승은 애한테 뭘 가르친 거야?”
위지혁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서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사실 그런 관계였단 말이야? 너희 혹시, 서로 때리면서 연정(戀情)을 느끼는 거야? 뭐 그런 미친…….”
위지혁의 얼굴에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라가 이를 부득 갈며 소리쳤다.
“넌 도사라는 새끼가 머릿속에 음마(淫魔)가 꼈냐? 뭘 때리면서 느껴!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그 와중에 찬야는 홀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훗. 너희는 아직 멀었어. 난 이미 이 날카로운 눈치로 예상하고 있었지. 벌써 그런 관계인지는 몰랐지만…….”
빠악! 남량의 손이 찬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다 너 때문이야, 닥쳐 이 새끼야!”
찬야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의자를 부서뜨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 광경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폭소를 터뜨리며 한바탕 자지러졌다.
“으하하! 이번 화산 제자들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거야?”
“보기 좋소! 괜히 점잖 떨고 하는 것보다 백배는 좋아!”
“그래서 확실히 하쇼! 둘이 연인이야 아니야? 궁금하다고!”
“이봐, 이미 간 사람으로서 충고하는데 혼인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제아무리 절세미인과 혼인해도 시간 지나면 얼굴도 보기 싫어질 때가 온다고! 지금 내가 그래! 에휴…….”
“내일부터 낙양 호사가들 바빠지겠네그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 죽여 버릴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유라한테 술 마시라고 할까?
그때 누군가 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강호 무림의 안녕과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건배!”
“건배!”
술이 넘치도록 잔을 치켜든 객잔 안 사람들이 소리쳤다.
흥분한 유라도 진정하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남량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단번에 잔을 비운 남량은 천천히 앞을 응시했다.
찬야는 많은 사람들을 앞에서 ‘내가 월아쌍노의 일노와 싸울 때 말이야. 놈의 일격을…….’라며 자신의 영웅담을 떠들고 있었고, 운휘는 찻잔으로 탑을 쌓는 묘기를 선보이고 있었으며, 위지혁은 상인들에게 중원 전역의 신기한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고 있었고, 유라는 또래의 여무사들과 명검, 신병 이야기 따위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따뜻하다-.
객잔을 비추는 은은한 등불, 저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와 웃음소리.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마시거나 취한 채 춤을 추며 바닥에 엎어지고 그걸 가리키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좋았다.
‘패왕의 좌를 향해 끝없이 달리며 환생한 이후로도 오직 복수만을 위해 달려왔다. 그저 피와 죽음만이 가득한 인생이라 여겼는데, 낯선 광경에 그리움과 따뜻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할 정도로 지금 이 순간이, 좋다. 허나 다음 날, 눈을 뜨면 나는 또 복수를 향해 달리겠지. 아아, 이 광경은 마치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구나.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기 위한 한바탕의 꿈인 것이다.’
때마침 찬야가 이쪽을 향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남 사제! 이리 와 봐! 이 사람이 강호를 돌면서 자기보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대! 지금부터 술 마시기 대회를 열 건데, 함께할래?”
“형님! 같이해요!”
운휘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걸어갔다. 달려갔다.
그래. 오늘만큼은 꿈을 꾸는 것이다.
아주 행복한 꿈을.
***
“자자, 한 잔 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먼저 쓰러지거나 토하면 지는 거야! 술 마시는 척하면서 밑에 버리거나 하면 안 돼! 내가 두 눈으로 딱 지켜보고 있어!”
“으아! 보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려!”
“대체 이런 야만적인 짓을 왜 하는 거야!”
“형님! 힘내세요!”
갑자기 성사된 술 많이 마시기 대회(?)는 어느새 남량과 자신을 말술이라 자칭한 상인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나머지 참가자는 반쯤 실신한 채 떨어져 나간 채였다.
매화오절은 경악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으로 남량을 응원했다.
“대체 도사란 작자가 술을 왜 이렇게 잘 마시는 거야! 허나 만만히 보지 말라고! 내가 이래 봬도 전국을 돌면서 술이란 술은 다 마셔 본 사람이야!”
상인은 술잔에 술을 잔뜩 채운 뒤 바가지를 남량에게 내밀었다.
남량은 홍조를 띤 얼굴로 바가지를 받아 들었다. 딱 봐도 제법 취해 있었다.
“당신, 분명 대회 시작 전에 말했지. 무림인들은 항상 내공을 써서 취기를 배출하니 주량을 알 수가 없다고. 다들 무서워서 도망치는 겁쟁이들이라고 말했었지. 어때, 이래도 내가 겁쟁이로 보이나?”
“좋아! 인정하지. 하지만 나한테는 안 될걸?”
남량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안에 든 내용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지만 전력을 다해 참아 내고 있었다.
‘천마의 자존심이 있지. 한낱 상인 따위에게 질까 보냐!’
남량은 눈을 부릅뜨며 술잔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우와아아!”
“남 사제! 대단해!”
“멋지다, 백매화!”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매화오절과 무림인들이 환호했다.
설마 남량이 술을 마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인지, 상인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남량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때, 이제 패배를 인정하나?”
“그, 그래. 인정해. 인정한다고! 제길.”
상인은 술잔을 던지며 한탄했다. 남량은 기분이 좋은지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남량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누구지?
평소였다면 기척만 느끼고 바로 누군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 취해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 소협. 잠시 할 말이…….”
“자, 잠깐만-. 온다, 와!”
어깨를 잡은 누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량은 그의 옷깃을 붙잡고 토사물을 쏟아 냈다.
“우웨에엑-.”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덩어리(?)들이 매우 값비싸 보이는 비단옷을 잔뜩 더럽혔다.
다음 순간, 남량의 뒤쪽에서 일제히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대체 누구길래…….’
남량은 표정을 찌푸린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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