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복마전(伏魔殿). 금적금왕(擒賊擒王)(5)
고개를 들어 상대방의 정체를 확인한 남량은 깜짝 놀라 옷깃을 잡은 손을 놓치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바로, 무림맹주 고경홍이었다!
놀란 사람은 비단 남량뿐만이 아니었다. 객잔 안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이 아연실색하며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남량은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맹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널 만나러 왔다.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그 전에…….”
고경홍은 토사물이 묻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겠군.”
고경홍은 점소이가 준비한 물로 몸을 씻은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량은 그동안 객잔 지붕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술기운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맹주가 이 밤중에 내게 무슨 볼일일까?’
얼마 후, 고경홍이 남량의 옆으로 다가왔다.
남량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까는 제가 너무 취해서……. 죄송합니다.”
“냄새가 독해 빼느라 고생 좀 했다.”
“그 정도는 아니던데요…….”
“농담이다. 술은 좀 깨었느냐?”
남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밤하늘을 응시하는 고경홍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놈이 농담 같은 걸 할 줄 알았던가?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낙양 저잣거리의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남량은 고경홍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표주를 나온 기간도 반년이 넘었지?”
“네. 그쯤 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화산으로 귀환할 때였다.
“화산으로 돌아가 수련에 매진할 것이냐?”
“네. 무림대회도 준비해야 하고…….”
“아, 그러고 보니 무림대회가 있었구나.”
고경홍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꺼냈다.
“남량, 무림대회 전까지 맹에 머물며 내 가르침을 받거라. 사제 간의 연을 맺자는 것이 아니다. 비무 상대로서 남북 십성의 도움을 받으면 경지가 더욱 빨리 오르지 않겠느냐. 남북 십성의 후계자들 중에서 오직 너만 그런 가르침을 얻지 못하고 있으니 내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하냐? 일전에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하여서 내 직접 찾아온 것이니 말해 보거라.”
“그 전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남량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남몰래 숨겨 둔 수양딸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친지 중에 혼례를 올리지 않은 분이 있다거나…….”
고경홍은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없다. 헌데 그건 왜 궁금한 것이냐?”
“중요한 거라서요. 다행입니다. 하하.”
처음 제안을 들었을 때, 남량은 고경홍이 제갈신, 남궁천 때와 마찬가지로 흑심(?)을 품고 남량에게 관심을 보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찰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고경홍의 말대로 남량에게 남북 십성과 같은, 자신보다 강한 고수들과의 대련은 매우 중요했다.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몸을 단련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즉,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남량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맹주께서 손수 지도해 주신다면 소인, 그 기대에 부합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음.”
고경홍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네 스승에게는 뭐라 말할 것이냐? 반대가 심할 터인데…….”
“스, 스승님이 반대를 하셨나요?”
“전서를 보내 허락을 구했더니 내게 욕을 하더구나.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내 평생 살면서 그런 욕은 처음 들어 봤다.”
남량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이 미친놈이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음? 방금 뭐라 했느냐?”
“아, 아닙니다. 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길을 막고 있길래…….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남량은 다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만 가 보마.”
고경홍은 남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자리를 떠났다.
남량은 즉시 유우화에게 서찰을 써서 보냈다.
반대하면 뭐 어쩔 것인가. 그 다리로 낙양까지 달려올 수도 없을 텐데.
그러나 천하의 남량도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남량은 자신의 앞에 떡하니 서 있는 유우화를 마주하며 입을 쩍 벌렸다.
“그래서 직접 오셨다고요? 절 설득해서 데려가려고?”
“그래!”
유우화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남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옆에 있던 구양중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차분히 무려 3시진을 설득했는데도 너를 화산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어찌나 난리를 피우던지……. 그래서 데려왔다.”
이거 실화인가? 내가 무슨 다섯 살 먹은 애야?
남량은 도무지 이 상황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님. 갑자기 왜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그러세요. 더군다나 몸도 불편하신 분이!”
짐짓 나무라듯 말하자 유우화가 벌컥 화를 냈다.
“너 같으면 자식 같은 제자가 남의 손에 홀라당 넘어가게 생겼는데 미치지 않고서 버티겠느냐?”
“그러니까 사제 관계를 맺는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대련 상대로…….”
“그게 그거지! 내 안 봐도 훤하다. 맹주 그 인간, 눈이 높아서 그동안 제자를 들일 생각도 못 했는데 네가 나타나니까 욕심이 생긴 게 분명해! 그래서 널 슬슬 회유하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니더냐! 내가 정녕 모를 성싶더냐? 내 눈은 절대 못 속이지! 감히 내 제자한테 눈독을 들여?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다! 아아암!”
유우화는 생각만 해도 분노가 솟구치는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구양중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다시피 이런 상태다.”
남량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체 이 새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돌아가자고 징징거리는 모습이 꼭 당과가 먹고 싶어 엄마한테 떼를 쓰는 서너 살 아이 같았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
‘아……. 진짜, 진심으로 부끄럽다.’
심지어 유우화는 남량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다. 결국 보다 못한 구양중이 유우화를 떼어 내며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
“유 도장! 자네 부끄럽지도 않은가? 무림맹 한복판에서 제자랑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다 창피해서 죽을 지경일세! 체통을 좀 지키시게, 체통을!”
“사형! 그러지 말고 설득을 좀 해요! 장차 화산제일검이 될 인재를 눈뜨고 빼앗길 셈이우?”
“안 간다고요! 안 간다고! 제발 좀 믿으세요 스승님! 제발! 제자 속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결국 남량까지 폭발해 유치한 말싸움은 삼파전(?)으로 변했다.
함께 따라온 도사들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느라 애를 썼다.
‘유 도장님. 제발 그만해요! 좀…….’
‘정말 누가 볼까 무섭다…….’
‘그래도 한때는 남북 십성이셨던 분인데…….’
남량은 이제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입을 열면 당장 불이라도 뿜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노망난 늙은이! 내 당장 목을 쳐 버릴…….’
그때, 소란을 듣고 무림맹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차. 내 명성을 위해서라도 성질을 내면 안 된다.’
남량은 초월적인 인내력으로 분노를 잠재우며 유우화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스승님. 저는 오직 한 분만을 하늘로 모십니다. 저에게는 평생 스승님뿐이에요. 봐요. 머리도 똑같잖아요. 저는 스승님의 분신과 다름없다구요. 그러니까 제발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말고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량아, 그래도…….”
“그러니까 스승님도 저를 믿고 의지하신다면 시원하게 보내 주세요. 솔직히 천하제일인에게 가르침을 받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제가 종종 서찰 보낼게요.”
‘제발 좀 알아듣고 꺼져라.’
남량의 간곡한 설득이 빛을 발했는지 한 시진 만에 결국 유우화의 인정을 받아 냈다.
“정말 자주 서찰 보내야 한다.”
“네네. 자주 보낸다니까요.”
유우화는 마차에 타기 전까지도 ‘열흘에 한 번은 해야 해!’, ‘할 거지? 까먹지 말고!’라며 몇 번이고 확답을 받아 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눈물겨운(?) 작별을 마치고 구양중이 조용히 다가와 남량의 등을 토닥였다.
“못난 스승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빌어먹을. 어째 싸울 때보다 더 진이 빠지는 것 같냐.
“수고하거라. 참, 무림대회 전에는 한 번 화산에 들러야 하니 미리 서찰을 보내 놓으마.”
“네. 그때 뵙겠습니다.”
구양중이 마차에 타는 모습을 바라보던 중, 고경홍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함께해서 좋구나. 앞으로 잘 부탁하마.”
마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유우화가 그 모습을 보고는 격노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맹주! 내 경고하는데 그 애한테 눈독 들였다가는 당장 사생결단 낼 줄 아시오! 지금 내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보일…….”
“이 미친……! 당장 출발하게! 유우화! 당장 들어오거라!”
남량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고경홍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다음 날, 남량은 매화오절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수련할 거다.”
매화오절들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남량과 함께 수련을 해 온 운휘는 당황하며 물었다.
“형님. 그럼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너도 이제는 나 없이 혼자서 수련하고 강해져야 한다.”
“제가 형님 없이 잘할 수 있을까요?”
“해야지. 훗날 날 호위할 무사로 성장하려면, 해야만 해.”
남량은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의 계략을 한 번 막아 냈지만 아직 놈들은 건재해. 앞으로 수많은 모략을 써서 우릴 노려 올 거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며, 의와 협을 실천할 힘을 가져야 한다. 각자 최선을 다해 강해지도록 해. 이게 내가 너희에게 주는 숙제다.”
남량은 표정을 바꾸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림대회까지는 앞으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쟁쟁한 실력자들이 대거 참여할 거야. 다시 만났을 때,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림대회를 휩쓸고 천하에 우리들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리는 거야. 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이제 시작이야.”
찬야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드시 강해져서 남궁월, 그녀를 내 손으로 이기고 말겠어.”
유라는 차분히 투지를 불태우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위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은 내가 인정한 천하의 무재들이다. 너희들이라면 훗날 반드시 남북 십성의 뒤를 이을 검호가 될 수 있어. 그러니 뒤처지지 말고 따라와라. 믿는다.”
남량은 가운데 손을 내밀며 동료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량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매화오절. 임무를 완수하고 다시 만나자.”
“그래.”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화산이여! 영원하라!”
일행은 동시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사흘 뒤, 남량을 제외한 매화오절은 무림맹을 벗어나 화산으로 향했다.
남량은 그들을 배웅하며 멀어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침 해가 떠오르며 그들의 가는 길을 밝게 비춰 주고 있었다.
‘그동안 정이라도 들은 건가, 괜히 섭섭하네.’
남량은 천천히 등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만날 때는 겨울이겠군.’
혹독한 시간이 되겠지만 본래 설중(雪中)에 핀 매화가 더 강한 법이다.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이 과연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남량은 기대해 보기로 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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