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복마전(伏魔殿). 금적금왕(擒賊擒王)(3)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남량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고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도 괜찮겠는가? 지금은 내가 급히 해야 할 일 있어서 말일세.”
“긴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먼저 가네. 살펴 가시게.”
고위영은 가볍게 목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남량은 영 찝찝한 표정으로 고위영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자 찬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남 사제. 총대주님께 할 말이 뭐였는데?”
“별거 아니야. 그런데…… 어디 다친 건가? 걸음이 불편한 것 같아 보여.”
“그래? 난 그닥 모르겠는데. 무림맹 총대주가 다칠 일이 뭐가 있겠어?”
“하긴…… 들어가자.”
남량은 별채로 들어서며 고위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급히 해야 할 일이라…….
‘임무를 완수한 기념으로 비싼 음식 먹을까?’, ‘좋지. 술 한잔하자.’라고 떠들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비설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당연하죠! 하하. 그깟 놈들쯤이야…….”
남량은 도포를 벗어 벽에 걸며 말했다.
“다들 저자에 가서 소소하게 축하라도 하려 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밖에 얼굴을 드러내면 안 되는 처지라…….”
웃으며 거절한 비설이 뭔가 주저하듯 입술을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남량이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말씀하실 거라도…….”
“그게 아까부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요. 총대주에 대해…….”
총대주라는 말에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죠?”
“사실 이번 작전을 처음 계획했을 때는 총대주로 하여금 맹의 부대를 움직이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맹주께서 반대하셨죠.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으니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해야 한다면서……. 그리고 뭔가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씀을?”
“저에게 ‘칼을 닦다가 팔목을 베여 본 적 있나?’라고…….”
남량은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생각에 빠졌다.
칼을 닦다가 팔목을 베였다라……. 칼로 팔목을…….
‘잠깐, 팔목을 칼로 베여? 이거 어디선가…….’
그 순간, 한 장면이 남량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량의 두 눈이 크게 뜨이며 눈동자가 떨려 왔다.
‘그 자객! 내가 칼로 팔목을 벤 자객과 같아!’
남량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남량은 비설에게 다급히 물었다.
“대주님. 대주님과 만나기 전, 맹주께서 총대주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네. 매일 같은 시간에 두 분께서 차를 마시거든요.”
“설마…….”
“왜 그래요?”
남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곧장 검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매화오절이 당황하며 외쳤다.
“남 사제! 무슨 일이야? 어디로 가는데!”
“남 소협! 뭔가 알아냈군요. 그게 뭐죠?”
비설의 물음에 몸을 돌린 남량이 말했다.
“그 자객과 검을 부딪쳤을 때 눈을 봤습니다. 그 눈빛, 이제 보니 총대주의 것과 같아요. 만약 제 추측이 확실하다면, 총대주가 바로 마교의 간자입니다!”
“뭐뭐, 뭐라고? 총대주가, 간자?”
매화오절이 일제히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남량은 혀를 차며 비설에게 말했다.
“당장 고위영을 잡으러 가야 합니다.”
이걸로 머릿속을 찝찝하게 했던 위화감의 정체가 밝혀졌다.
고위영의 집무실 앞으로 도착한 남량을 두 명의 무사가 막아섰다.
“이곳은 총대주님의 집무실이니 함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총대주님, 안에 계십니까?”
“네. 조금 전에 안으로 들어가셨…….”
한발 먼저 통찰안으로 건물 내부를 살핀 남량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무사들에게 외쳤다.
“이것들이 어디서 거짓을 말해!”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마침 풍운검대의 대주, 양악이 이끌고 온 부대원들이 고위영의 집무실 앞으로 도착했다.
대원들이 무사들을 포위하고 칼을 겨누자, 무사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고위영 총대주, 어디 있느냐!”
양악이 버럭 소리치자 무사들이 당황하며 대꾸했다.
“총대주님은 안에 계시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고위영. 그자가 바로 마교의 간자라는 흑영대의 정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총대주님이 간자라니!”
무사들은 당황하며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이, 이게 대체…….”
“고위영이 언제 집무실로 들어갔는지 말해라. 어서!”
“그, 그것이…….”
양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사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제 보니 이놈들도 수상하군. 당장 이자들을 추포해라!”
“존명!”
대원들은 즉시 무사들을 붙잡아 땅에 처박았다.
그때 흑영대원이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왔다.
“찾았습니다. 고위영이 일다경 전에 맹주전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맹주전, 맹주전이라고?”
“네. 그리고 고위영이 맹주전에 들어갔을 때, 손에 긴 목함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목함이요?”
남량은 고개를 돌려 거대한 금색 궁전을 응시했다.
‘급히 해야 할 일……. 그리고 고위영에게서 나던 희미한 냄새. 그건 분명 화약 냄새였어. 저들이 준비했던 거사의 목적은 바로 맹주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남량은 양악과 흑영대원을 향해 외쳤다.
“당장 전 병력을 맹주전으로 집합시키시오!”
***
터벅터벅.
어두운 대전을 홀로 걸어가던 고위영은 화려한 태사의(太師倚)에 앉아 있는 고경홍과 마주했다.
주변에는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경홍의 시선이 잠시 고위영의 손에 들린 목함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몸이 아파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고 들었다.”
“네. 이제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냐?”
“아버지 얼굴 뵈러 오는데 꼭 할 말이 있어야 합니까?”
고위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경홍을 응시했다.
고경홍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노와 슬픔, 증오와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고경홍은 한참을 말없이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아.”
“네, 아버지.”
“대체 왜 그랬느냐.”
“무엇을 그리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위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쾅! 바로 그때, 태사의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려친 고경홍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노호성을 터뜨렸다.
“네가 정녕! 이 애비를 배신하고 마교의 편에 서서 간자 노릇을 했단 말이냐! 네가! 이 고경홍의 자식이!”
다음 순간, 고위영의 입꼬리가 내려오며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가져온 목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교는 온 강호의 대적(大敵)이자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 간 원수다! 헌데, 무림맹의 무력 부대를 이끄는 총대주가 되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 어찌하여!”
고경홍의 눈에서 불이 번쩍거리며 범과 같은 기세가 터져 나왔다.
하늘과 같은 아버지의 분노에 고위영은 입매를 비틀었다.
“소자의 평생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것만으로 나는 항상 당신에게 비교당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어요. 호부견자(虎父犬子). 그것이 나를 향한 세상의 평가였습니다. 명왕. 그 태양과 같은 위상이 나를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몰아넣었단 말입니다. 남량, 그 아이를 칭찬하며 웃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나는 그토록 노력해도 얻지 못한 당신의 인정을, 그는 받았으니까요.”
수십 년 묵은 감정이 전부 분출되면서 격렬한 감정의 격류(激流)가 고위영의 정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고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이상, 난 영원히 세상에 소룡(小龍)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당신을 넘을 수 없다면, 당신을 이 세상에서 치워 버리는 것으로 내 염원을 이룰 수 있다면. 난 그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고경홍이 입술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교더냐? 스스로의 나약함을 주체하지 못해 놈들이 내미는 손을 잡은 것이냐? 이 한심한 놈!”
고위영은 미친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쿠당탕!
그때, 문을 박차고 무림맹의 무사들이 우르르 대전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들은 즉시 검을 뽑아 들고 고위영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남량과 매화오절도 함께 도착해 그 광경을 목격했다.
고위영은 자신을 둘러싼 무사들의 칼날을 바라보다 목함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목함에서 검은 가루가 바닥에 쏟아졌다.
“마지막을 이걸로 끝내면 섭섭하지. 그래…….”
스릉.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든 고위영이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도 끼어들지 마라. 결판은 오직 맹주와 지을 것이니!”
“뭣들 하느냐! 고위영을 붙잡아라!”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려는 때였다.
“그마안-!”
천둥과도 같은 고경홍의 외침이 맹주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고경홍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내가 만들어 낸 괴물이니 내 손으로 끝내는 것이 옳다.”
맹주는 벽에 걸린 자신의 애병(愛兵), 비천언월도(飛天偃月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단상을 내려와 고위영의 앞에 섰다.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는, 이 손으로 직접 받아 내마.”
언월도를 옆구리에 끼운 채 자세를 잡은 고경홍은 태산처럼 거대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위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고쳐 쥐었다.
“무엇 하고 있느냐. 어서 덤벼라.”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고위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맹의 무사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마공(魔功)! 마공이다!”
“고위영 이놈……. 결국 마공까지 익힌 것이냐!”
마공은 일반적인 무공과 궤를 달리하며 힘을 쌓는 방식이 실로 기괴하고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한번 익히게 되면 급속도로 경지가 올라 단시간에 강력한 힘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당장 화경의 경지를 넘지 못했던 고위영의 내력이 잠깐이지만 화경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해졌다.
고경홍은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 타락한 네놈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로구나.”
“으아아-!”
고위영은 마기로 몸을 두른 채 고경홍을 향해 돌진했다.
“이것이 아비로서 멍청한 내 자식에게 다하는 마지막 도리다.”
고경홍은 언월도의 날을 수평으로 세우며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후웅-!
비천언월도가 허공을 가르며 고경홍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위영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맹주의 움직임을 제대로 본 자가 없었다.
쨍그랑.
검을 떨어뜨린 고위영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에 혈선(血線)이 그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누구 하나 경솔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무사들은 한때 자신들이 모셨던 상관을, 매화오절과 협사들은 존경했던 무인을, 남량은 용감했던 적을 말없이 응시했다.
고위영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것마냥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무사로서 끝내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털썩. 그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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