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복마전(伏魔殿). 미인계(美人計)(4)
흑영대 본거지로 돌아온 남량은 가발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알아냈습니다. 유통 과정을 기록한 장부와 보관소의 위치.”
“이쪽도 이미 들이칠 준비는 끝났어요. 바로 시작하죠.”
비설은 맹주의 명을 받아 대기하고 있던 풍운검대 및 여타 병력을 집합시키도록 지시를 내렸다.
남량 일행과 흑영대원도 무장을 하고 싸움을 준비했다.
잘 벼린 검을 검집에 넣고 허리춤에 찬 찬야가 물었다.
“남 사제. 내가 당부한 대로 잘했지?”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네 도움이 컸어.”
운휘가 머리를 질끈 묶으며 물었다.
“형님. 찬야가 뭐라고 조언했는데요?”
남량은 화양검의 칼날을 확인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 웃고, 칭찬 많이 하고, 살 부딪치고…….”
쾅! 유라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자 금이 갔다.
깜짝 놀란 일행들이 입을 닫으며 시선을 돌렸다.
암영은 고민하다 조심스레 불만을 표시했다.
“유 여협. 그, 웬만하면 기물 파손은 자제를…….”
유라가 암영을 째려보자 암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잽싸게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유라는 무장을 마치고 싸늘한 냉기를 풀풀 풍기며 방을 나갔다. 물론 그 전에 남량을 한 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설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짝사랑만큼 안타까운 것도 없다더니…….’
어느새 진지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하는 그녀였다.
한편, 찬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뜨거웠나 보군. 그래서, 결론은?”
“그래서, 진짜로 살을 부딪쳤어? 그, 그럼…….”
찬야와 위지혁은 ‘설마?’ 하는 눈으로 남량을 쳐다보았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손! 손만 잡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동해.”
“이 새끼가……. 아니면 아닌 거지 왜 때려? 이제는 내 뒤통수를 아주 그냥 동네북으로 알고 있어!”
위지혁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찬야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위지혁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저러니까 더 수상하지? 언제 술이라도 진탕 마시게 한 다음 천천히 알아봐야겠어. 후후.”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습격은 언제나 밤에 일어난다. 맹의 무사들은 모두 검은 무복과 검은 복면을 쓴 채 어둠에 녹아들었다.
풍운검대의 대주, 양악은 보관소를 먼저 살피고 돌아온 척후(斥候)에게 물었다.
“병력이 얼마나 되더냐?”
“호위 병력이 삼백 명. 그리고 나머지가 오십 정도 됩니다.”
무림맹에서 차출된 병력은 풍운검대를 비롯한 맹의 무사들, 그리고 문파와 가문에서 차출된 협사들, 마지막으로 매화오절까지. 다 합쳐서 대충 백오십 정도였다.
“일단 수적으로는 열세고……. 고수로 보이는 자가 있더냐.”
“아닙니다. 대부분 일류 정도의 경지로 보였습니다.”
“알았다.”
양악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모두 각자 검을 뽑아 들며 돌격할 준비를 했다.
“진입 후 호위 병력을 전부 제거하고 보관되어 있는 재물들을 회수한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생포하고 혹시라도 도망치는 자가 있다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장부를 가져오는 일은 남량이 맡았다.
“시작하자. 돌격-!”
양악의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무사들이 일제히 보관소로 돌격했다.
“웨, 웬 놈들이냐! 커헉!”
보관소 앞을 지키던 보초를 쓰러뜨린 무사들이 파도처럼 건물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곳은 순식간에 전장이 되었다.
“이것 참, 쓸 만한 놈이 없다는 게 아쉽네. 그럼 아쉬운 대로 칼춤 한번 춰 볼까!”
운휘는 히죽 웃으며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푹, 푸화악-!
거칠게 휘두른 검에 두 놈이 쓰러졌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운휘가 손등으로 피를 닦아 내며 눈을 번득였다.
야차와도 같은 운휘의 기백에 적들은 기가 눌리고, 아군은 기가 살아났다. 이래서 어떤 전투에서든 기선 제압이 중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월아쌍노와의 생사혈투로 인해 한층 기량이 상승한 찬야와 유라.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들과 함께 남량의 가르침을 받은 위지혁까지. 전부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선전했다.
그사이, 남량은 2층으로 이동했다. 모영옥의 말에 따르면 장부는 2층 끝 방에 있는 집무실 바닥에 숨겨져 있다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를 적들이 꽉 메우고 있었다. 남량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비켜라. 방해된다.”
“다들 한꺼번에 덤벼라!”
우르르르-!
남량은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검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콰아앙!
매화천수검의 7초식, 유성추월 초식이 발현되며 검기의 소용돌이가 적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후두둑-.
폭풍이 지나가고 천장에서 피와 육편 조각이 떨어졌다.
‘이런 것들을 상대로 굳이 검을 수십 번 휘두를 필요는 없지.’
일 초(一招)에 수십 명을 참살한 남량이 내력을 갈무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 방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간 남량은 바닥의 나무를 뜯어 안을 살폈다. 그리고 목함 하나를 발견했다.
뚜껑을 열자, 그동안 기록된 장부들이 전부 들어 있었다.
남량은 목함을 들고 아래로 내려와 소리쳤다.
“장부를 확보했다!”
마침 매화오절들이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억지로 열어 안에 든 상자 더미를 찾아냈다.
그리고 상자 안에 가득한 금자와 은자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와 이 사실을 알렸다.
“찾았습니다!”
“됐다. 이곳을 빠르게 정리한다!”
“존명!”
남량까지 가세하자 보관소를 지키던 병력은 채 반각이 되지 않아 전멸했다.
뚝뚝. 피가 흐르는 검을 깨끗한 천으로 닦은 남량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수고했다. 수고랄 것도 없지만…….”
자금을 전부 회수하고 보관소는 시체와 함께 소각했다.
확보한 장부를 펼쳐 살펴본 결과, 전부 호북, 호남, 강서, 안휘, 광동, 귀주 등으로 옮겨진 것을 확인했다.
이에 맹주는 즉시 맹의 7부대, 풍운, 추풍, 유풍(流風), 풍림(風霖), 질풍(疾風), 열풍(熱風)검대를 그곳으로 보내 각 무림맹 지부의 무사들과 함께 은신처를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지?”
“우린 중요한 일이 남았어.”
찬야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부총관 장각과 그 아내 모영옥을 추포한다.”
그 시각, 고위영은 다급히 서신을 써서 은신처 곳곳으로 날려 보냈다.
『위치가 발각되었다. 지금 맹의 무사들이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당장 자료를 태우고 몸을 숨겨라.』
이걸로 큰 불은 껐으나 피해가 막심했다. 그동안 빼돌린 자금으로 짓고 있던 은신처를 그대로 전부 내주게 생겼다.
“장각……. 이 등신 같은 새끼! 열흘만 버티라 그리 당부했는데 고작 그걸 버티지 못하고! 빌어먹을!”
고위영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치솟는 분노를 눌러 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만약 장각이 붙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고위영은 장각이 벌인 사고를 직접 수습하기 위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
장각의 거대한 저택을 포위한 무림맹의 무사들이 장각과 모영옥 부처를 추포하기 위해 대문을 넘었다. 장각의 사병들이 목숨을 버려 가며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얼마 버티지 못할 터였다.
“이 등신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해?”
모영옥은 숨겨 둔 패물을 보따리에 담는 장각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꽁지 빠지게 도망치지는 못할망정, 끝까지 돈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에 속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장각은 반쯤 정신이 나간 눈으로 패물을 쓸어 담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마련한 것들인데……. 이걸 다 두고 떠날 수야 없지. 암, 그렇고말고…….”
“어르신! 어서 가셔야 합니다!”
보다 못한 호위가 장각을 말렸다.
“조금만 기다려. 다 담았어!”
“세상 도움 안 되는 인간 같으니!”
보따리를 챙긴 장각은 모영옥과 함께 호위 세 명만 데리고 비밀 통로로 향했다. 회의 연락책이 은밀히 다니기 위해 마련한 통로였다.
“양봉 그 멍청한 작자는 이런 통로 하나 없어서 붙잡혔지. 하지만 나는 달라. 반드시 살아남을 거라고.”
“입 닥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자신이 미인계에 빠져 정보를 불었다고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영옥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조심성 없이 정보를 흘린 탓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통로를 한참을 걸어 빠져나온 곳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野山)이었다.
장각과 모영옥은 그곳에서 호위가 마련한 낡은 무명옷으로 갈아입은 뒤, 말을 타고 낙양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바로 그때, 숲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영옥은 그를 경계하며 물었다.
“누, 누구냐.”
호위들이 칼을 빼 들고 막아서는데, 장각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회에서 보내신 분이 아니시오?”
사내가 대답이 없자, 장각은 다시 물었다.
“회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빼내기 위해 보낸 게 맞지요?”
사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모영옥이 불안한 목소리로 장각의 옷깃을 잡았다.
“자, 잠깐만! 저자, 뭔가 이상해!”
“아니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이 통로는 우리가 아니면 회의 사람만이 아는 곳인데.”
“그게 아니라 저자의 기세가 수상하지 않냐고!”
장각은 자꾸만 달라붙는 모영옥이 거슬렸는지 짜증을 내며 떨쳐 냈다.
“여기까지 와서도 날 가르칠 셈이오? 언제까지 잘난 척……. 지겨워 죽겠구만. 그렇게 못 믿겠으면 혼자 잡히든가!”
장각은 호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왔다.
“다행이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겠소. 하하. 자, 이제 어디로 데려갈…….”
장각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벼락처럼 검을 뽑은 사내가 장각의 목을 그대로 쳐 버렸다.
스걱-!
장각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피가 철철 나오는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모영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내를 응시했다.
‘역시 회에서 우릴 버렸구나! 죽여서 입막음을 하기 위해 온 것이야!’
주인이 죽은 것을 본 호위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허나 그들은 모두 사내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털썩.
호위들을 처리한 사내가 모영옥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모영옥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한 번만 살려 주시오. 제발…….”
“이걸로 너희 두 연놈들의 역할은 끝났다. 회의 안녕을 위해 단념하고 얌전히 저승으로 가거라.”
사내는 싸늘한 눈으로 모영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을 마주한 모영옥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콰아앙-!
통로 문을 부수며 나타난 남량이 사내를 향해 질풍처럼 쇄도했다.
“거기까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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