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복마전(伏魔殿). 미인계(美人計)(5)
남량은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들어 수직으로 내리쳤다. 사내는 모영옥을 베던 검을 급히 회수해 공격을 받아쳤다.
채앵!
그런데 오히려 남량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 보통내기가 아니군.’
뒤이어 통로 밖으로 나온 매화오절은 쓰러진 장각과 모영옥을 발견했다. 모영옥은 가슴을 베인 채 간신히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모영옥은 내가 살릴 테니 그동안 저자를 막아!”
“알았어!”
매화오절이 사내를 막는 사이, 남량은 모영옥에게 달려가 신유유합의 능력으로 상처를 치료했다. 그러나 베인 상처가 너무 깊었다.
‘조금만 더 일찍 왔어도…… 젠장.’
그때, 힘겹게 눈을 뜬 모영옥이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나, 남화 공자? 공자가 왜 여기에…….”
“정신 똑바로 차려. 살려 줄 테니.”
틀렸다. 제아무리 신통한 능력이라도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를 살려 낼 수는 없었다.
피를 울컥 내뱉은 모영옥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르지 말 걸 그랬어……. 단순히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서……. 멍청하게도…….”
모영옥은 남량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거사……. 거사가 있어. 닷새 후에…….”
“거사? 무슨 거사를 말하는 거지?”
“아편……. 서역에서 들여온 아편을 이용해 맹주를 몰아내려고……. 낙양상단의 하추……. 그자가 바로 간자…….”
더듬거리며 쥐어짜듯 말을 꺼낸 모영옥이 반쯤 눈을 뜬 채 고개를 떨구었다.
남량은 그녀를 눕히고 눈을 감겨 준 다음, 검을 집어 들었다.
“으아아-!”
운휘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채채챙!
호기롭게 정면으로 달려들었으나 세 합을 넘기기 전에 운휘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운휘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응시하며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검을 부딪치는 충격만으로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운휘! 위험해!”
사내가 운휘의 목을 날리기 직전, 찬야가 운휘를 밀쳐 내며 사내의 검을 막아 냈다.
“크윽!”
검에 실린 무게를 이기지 못한 찬야가 신음을 토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 힘, 그리고 속도……. 월아쌍노와는 비교도 안 돼. 이 복면인, 최소한 초절정의 고수가 틀림없다! 아니, 어쩌면 그 위의……. 화경(化境)의 경지일지도…….’
‘과연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찬야의 머릿속을 채웠다.
“운휘! 어서 검 주워! 찬야, 일어나!”
이번에는 유라와 위지혁이 각각 좌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챙! 채채챙! 채챙!
내공을 전부 쏟아 내 검을 휘둘렀으나 사내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다. 반면, 사내는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 내며 반격에 나섰다.
쩌엉!
검이 부딪치며 생긴 풍압(風壓)에 유라와 위지혁이 밀려 나갔다. 사내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유라와 위지혁은 팔과 옆구리를 베이며 쓰러졌다. 사내가 마무리를 지으려는 찰나, 남량이 비호와도 같은 속도로 날아들었다.
“하압!”
남량이 사내를 막는 동안, 유라와 위지혁은 빠르게 옷을 찢어 출혈을 막았다.
채챙! 카카칵-.
남량은 검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틈이 벌어져도 금방 목이 날아갈 듯 위태로웠다. 검을 받아치기는커녕, 간신히 흘려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량은 환생한 이후, 가장 강력한 적을 만났다고 확신했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마침 매화오절이 모두 합세했다. 남량은 그들에게 외쳤다.
“검진(劍陳)을 펼쳐라! 매화검진(梅花劍陳)을!”
일행은 즉시 남량의 말대로 사내를 에워싸고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남량은 언젠가 강력한 고수를 만날 때를 대비해 다섯 명이 완벽한 합일(合一)을 이루는 검진을 구상해 왔다. 매화검진 특유의 장점을 살리며 매화오절의 검술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검진을.
그 결과가 이 자리에서 펼쳐진 남량의 작품, 만천매화검진(滿天梅花劍陳)이었다.
채채채챙! 채챙!
매화오절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쉴 틈 없이 돌아가며 사내를 밀어붙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꽃잎의 파도에 휩싸인 듯, 사내는 점차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지금이다.’
남량은 눈을 번득이며 단번에 내력을 끌어모아 검을 휘둘렀다.
번쩍! 하며 섬광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남량의 일검이 사내를 베고 지나갔다.
‘낙영용섬-.’
그러나 날이 살을 깊게 파고드는 감각이 없었다. 남량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사내를 응시했다.
사내는 팔의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다 산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불빛이 일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남량이 검을 고쳐 쥐며 물었다.
“맹의 무사들이 오고 있군. 여기서 끝장을 보겠느냐?”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 검을 내렸다.
이미 장각과 모영옥을 죽였으니 목적은 이뤘다. 사내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내의 기척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남량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뱉었다.
‘살았다. 만약 일다경만 더 늦었다면 검진이 무너지고 우린 전부 죽었을 테지…….’
그래도 목숨을 건 덕분에 놈들이 꾸미는 계획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거사, 그리고 아편.
효초아. 이게 네놈이 꾸미던 계획이었느냐.
허나 내가 안 이상, 네놈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량의 곁으로 다가온 찬야가 물었다.
“어떡하지 남 사제? 장각에 모영옥마저 죽었으니…….”
“알아내고자 하는 건 전부 알아냈어.”
남량이 고개를 돌려 매화오절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비설에게 간다.”
이제 제대로 된 반격을 준비할 차례다.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복면 사내가 초에 불을 붙이고 복면을 내렸다. 복면 사내의 정체는 바로 고위영이었다.
고위영은 팔을 걷어 상처를 확인하고 약재를 상처 위에 골고루 뿌렸다. 그런 다음 붕대를 감았다.
“후우…….”
고위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남량. 설마 그자를 죽이지 못할 줄이야…….’
사사건건 거사를 방해하던 화산의 도사. 양봉을 색출해 내는 데 큰 공을 세워 이름을 알린 강호의 풍운아.
장차 회의 커다란 적이 될 것이 분명해 이번 기회에 처단하려 했는데…….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아무튼 이걸로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
장각과 모영옥의 입을 막았으니 거사가 들통날 염려는 사라졌다. 그때, 방의 창문이 벌컥 열리며 불이 꺼졌다.
고위영은 벌떡 일어나 벽에 걸어 둔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회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대답에 고위영은 검을 내렸다.
“무슨 말을…… 전하라 하시더냐.”
“‘은신처를 빼앗긴 것은 뼈아픈 실책이나 여전히 거사에 변함은 없다. 나도 네 잘못을 따지지 않을 테니 거사를 성공시킴으로써 실책을 만회하라.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 네놈의 자리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네.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야.”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불이 다시 환하게 타올랐다.
고위영은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촛불을 응시했다.
자신의 처지가 꼭 바람 앞에 선 촛불과 같았다.
***
그 시각, 비설에게서 남량과 매화오절의 활약을 전해 들은 맹주 고경홍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그런 훌륭한 일을 해냈단 말이지?”
“네. 궁장문명이라는 암호로 장각의 정체를 알아낸 것도, 모영옥을 속여 정보를 알아낸 것도 전부 매화오절의 활약입니다. 덕분에 보관소에 있던 자금 일부를 되찾았고 마교의 은신처를 모두 찾아 놈들을 와해시켰으니 정말 큰 공을 세웠지요.”
비설이 한껏 추켜세우자 매화오절이 고개를 숙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또 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자를 놓쳤으니 과가 적다 할 수 없습니다.”
“그자는 초절정의 고수라고 하지 않았더냐. 헌데 그자를 상대로 팔에 검상까지 입혔다지? 그게 어찌 과가 될 수 있겠느냐.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고경홍은 짐짓 나무라듯 목소리를 높인 뒤, 웃으며 말했다.
“화산의 젊은 도사들이 이렇게 든든하니 정파 무림의 앞날이 밝구나. 허허.”
“과찬이십니다.”
고경홍은 그 와중에 은근히 남량을 향해 애정을 드러냈다.
“특히나 남량. 내가 너를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네?”
“혹여라도 내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란 말이다. 난 언제나 환영이니까.”
고경홍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우화에게 거절당한 뒤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였다.
‘본인이 직접 원하면 유 도장도 뭐라 못하겠지. 이번에야말로 내 손아귀에 넣고 말겠다.’
나머지 매화오절이 부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남량을 쳐다보았다.
‘매매, 맹주님의 가르침이라니! 말도 안 돼!’
‘천하제일인의 가르침까지 받으면 또 얼마나 강해지는 거야? 빌어먹을. 백 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나 있을는지…….’
‘우리 형님, 대단해!’
‘있는 놈이 더한다더니…….’
그러나 정작 본인은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저 새끼 눈빛……. 그래. 분명 제갈신, 남궁천이랑 비슷해.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이것들이 왜 나한테 계속 지랄이야! 얼씨구, 아주 그냥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는구만. 내 평생 저 바위 같은 놈이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이러다 또 혼인 얘기 나오는 건 아니겠지? 잠깐, 저 새끼한테 딸이 있었던가……. 아무튼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남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그것보다도 먼저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라.”
“모영옥이 죽기 전,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말했습니다. 닷새 후, 서역에서 들어온 아편을 이용해 맹주님을 몰아낼 것이라더군요.”
고경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 아편이라고?”
“네. 낙양상단을 언급한 걸로 봐서는 그들을 통해 아편을 밀수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단주인 하추의 이름 또한 나왔으니 그도 한패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고경홍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놈들이 허튼수작을 부리려 하는구나.”
비설이 웃으며 말했다.
“네. 이번에는 저희가 계획을 먼저 알아냈으니 역으로 놈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계책을 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총관과 상의해서 빈틈없이 준비하도록.”
“존명.”
“그리고 남량은 화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날 한번 찾아오너라. 차나 같이 한잔하자꾸나.”
“…….”
고경홍은 남량이 대전을 나가기 전까지 찔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고경홍은 매일 미시(未時:13∼15시)에 아들인 고위영과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도 부자(父子)는 맹주전 집무실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러니 너도 남량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도록 하거라.”
“아버지. 남량의 이름만 벌써 서른 번은 넘게 들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고위영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타고난 성정이 오만한 탓인지 원체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다. 그런데 남량이라는 청년에 대해서는 반 시진째 한시도 빠지지 않고 칭찬만 늘어놓는다.
“마음에 들 수밖에. 이제 곧 혼란이 닥쳐오고 많은 영웅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뒤를 이을 다음 세대가 중요한 것이다. 남량 그 아이는 무재를 타고났을 뿐 아니라 총명하며 용감하고 또 정의롭다. 당금 강호에 그런 인재를 또 어디서 찾아보겠느냐? 그 아이라면 무림을 충분히 바르게 이끌 것이야. 나는 그 전에 충분히 많은 것을 그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
고위영의 눈빛에 한순간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그렇군요. 아마 남 소협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검선이 저리 막고 있으니 원…….”
쯧쯧 하며 혀를 차는 고경홍의 눈이 고위영의 팔로 향했다.
“그 상처, 언제 다친 것이냐?”
고위영은 황급히 내려간 옷깃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 이건 칼을 손질하다 잠시 조는 바람에…….”
“그래? 약간 베인 것치고는 붕대를 많이도 감았구나.”
“하하…….”
고위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고경홍은 조금 전, 남량에게 받은 보고를 떠올렸다.
‘자객의 왼쪽 팔에 상처를 남겼다…….’
마침 고위영이 다친 부분도 왼쪽 팔이었다.
설마-.
고경홍이 굳은 표정으로 고위영을 응시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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