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복마전(伏魔殿). 미인계(美人計)(3)
“백발은 흔치 않으니 금방 들통날 거예요. 그러니 가발을 쓰는 게 좋겠어요.”
남량은 비설이 준비한 가발을 받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일부러 직접 하는 겁니까? 재미 들려서?”
“그럴 리가요. 하하.”
깔깔 웃음을 터뜨린 비설이 툭 던지듯 말했다.
“유 여협이 많이 실망한 눈치던데요.”
남량은 피식 웃으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오히려 동의했으면 혼을 냈을 겁니다.”
“네?”
“유라의 말대로 화산은 명예 높은 도문입니다. 정파에서 명예란, 생명과 같지요. 그리고 명예는 그 자체로 문파의 커다란 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도사로서 굴지 않으면 화산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니 당연히 유라의 반응이 옳습니다. 허나 어느 조직이든 ‘이상’을 가진 인물이 있으면, ‘현실’을 직시할 인물 또한 필요합니다. 이상적인 자들만 넘치면 허상에 빠지고, 현실적인 자들만 넘치면 사파나 흑도가 되기 쉽지요. 그러니 이 균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유라처럼 화산의 명예와 의(義,) 협(俠)을 지킬 사람과 나처럼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할 사람. 마치 맹주님과 대주님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비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남 소협은 어린 나이임에도 큰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어린 나이라……. 남량은 아무 말 없이 웃고 넘겼다.
“남 소협이 얼마나 화산을 생각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이어진 비설의 말에 남량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왜 화산의 미래를 걱정하지? 막말로 화산 따위, 망하거나 말거나 알 게 뭐야? 난 복수만 하면 되는데. 복수가 끝나면 어차피 떠날 곳인데…….’
마음 한 곳이 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묘한 기분이었다.
비설은 남량의 머리에 가발을 씌워 주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다정하게 말해 줘요. 사소한 상처가 쌓이면 아무리 단단한 관계도 틀어지는 법이니까요.”
“그깟 말로 상처받을 여자는 아닙니다.”
“그래두요. 유 여협은 남 소협을…….”
‘여자로서 좋아한다.’라고 말하려 했던 비설은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꺼낼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비설이 말을 멈추자 남량이 물었다.
“유라가 저를, 뭐요?”
남량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비설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소중한 동료인데 따뜻하게 대해 달라고요.”
가발을 정돈한 비설은 멀리서 확인하고 엄지를 들었다.
“흑발도 너무 잘 어울려요! 이 정도면 모영옥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겠어!”
“역시 즐기고 있는 거 맞다니까. 설마 흑영대주 비설에게 이런 괴상한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남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이런 무능한 것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왜 사냥터에 멧돼지가 돌아다니는 거냔 말이다! 만약 장 부인께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면 네놈들 전부의 목숨을 바쳐도 모자랄 터! 이번 일,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모영옥이 무리로 돌아오자 귀족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호위들과 시종들을 향해 고함을 쳤다.
“장 부인,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아요. 멀쩡합니다.”
“다행입니다. 저놈들은 전부 처벌하도록 할 것이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당장이라도 모영옥의 불화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귀족들은 예상외로 그녀가 매우 차분한 태도를 취하자 의아해했다.
‘왜 저러시지? 갑자기 온화해지셨어.’
‘괜히 저러니까 더 무서운데…….’
놀란 가슴을 추스른 모영옥의 시선이 귀족들 너머로 향했다.
검은 머리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내가 나무에 걸터앉아 말없이 화살을 정리하고 있었다.
“……흐음.”
미묘한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하던 모영옥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갔다.
“인사가 늦었군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보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몸을 일으킨 사내는 정중히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피부에 맑은 보석 같은 눈동자. 무관심한 듯 차가운 눈빛에 차분한 품위가 느껴졌다.
모영옥은 사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물었다.
“처음 뵙는 얼굴이군요. 혹시 제가 초대한…….”
“네. 남화라고 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남 공자를 초대한 덕분에 제가 목숨을 구했는걸요. 보답을 하고 싶은데…….”
사내, 남량은 싱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보답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군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식사라도 같이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영옥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본래 그녀는 집 안에 누군가를 들이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식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한다?
남량은 그녀의 눈에 일렁이는 호기심을 발견하고 웃었다.
뭇 여인들의 애간장을 태울 그림 같은 미소였다.
모영옥은 살짝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괜찮겠습니까? 부군께서도 계실 텐데…….”
남량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부군’이라는 단어에 모영옥은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바깥사람은 집에 발을 들이는 날이 한 주에 이틀도 안 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제야 남량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긴 하군요.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그 말에 한순간 모영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급히 내려왔다.
모영옥은 다급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과 날짜에 맞춰 댁으로 마차를 보내겠습니다.”
“모 낭랑(娘娘:귀족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그에 맞춰야겠군요.”
“기대하죠.”
“오늘은 많이 놀라셨을 테니 쉬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인 남량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남량은 모영옥의 시선이 자신의 뒤통수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사냥터를 벗어나자 찬야와 위지혁이 자연스레 합류했다.
“어땠어? 분위기 좋던데?”
“모영옥은, 반응이 어때?”
남량의 물음에 찬야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돌아갈 때까지 정신이 살짝 나가 있던데? 단단히 빠진 게 틀림없어.”
위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멧돼지를 풀어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작전은 잘 먹힌 것 같다. 모영옥이 혼자 떨어졌을 때는 놀랐지만.”
남량은 가발이 더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가 날 자기 집으로 초대했어. 내일 저녁이야.”
“정말? 여자가, 그것도 남편이 떡하니 있는 사람이 집 안에 외간 남자를 들인다고? 세상에…….”
쯧. 남량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내일 끝장을 봐야겠어.”
***
다음 날, 남량은 모영옥이 보내 준 마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일부러 신경 써서 옷을 입었고, 여인이 좋아할 만한 값비싼 장신구까지 선물로 준비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반쯤 넘어온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휘어잡느냐가 이 계책의 모든 걸 결정한다.
거처에 도착하자 모영옥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 역시 옷차림과 장신구가 평소보다 화려했다.
남량이 마차에서 내리자 모영옥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는 길은 편안하셨나요? 정중히 모시라 명했는데…….”
“배려해 주신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남량은 가만히 모영옥을 응시했다. 모영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지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남량은 당황한 척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낭랑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모영옥의 볼에 홍조가 어리며 방심(芳心)이 드러났다.
“아아…….”
남량은 찬야가 미리 당부한 말을 떠올렸다.
‘너무 들이대지도, 그렇다고 너무 철벽을 치지도 마. 아슬아슬하게 밀고 당기란 말이야. 관심을 보이되, 선을 지키고 있다는 걸 보여 줘. 그럼 상대는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을 거야.’
이런 분야에서는 찬야의 말이 곧 진리였다.
남량은 죄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했군요. 저도 모르게 그만 본심이……. 무례를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모영옥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례라니요.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네.”
지금부터 더더욱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사천에서 오셨다 하니 그쪽 취향에 맞게 준비해 보았습니다만,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남량은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평소 모영옥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을 주제로 능숙하게 흐름을 주도했고, 모영옥은 남량의 풍부한 식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 공자께서는 참으로 견식이 넓으시군요.”
“낭랑께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활쏘기를 매우 잘하시던데요.”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무예를 조금 익혔습니다.”
“학문도 깊으시고 외모도 출중하시고 무예 실력마저 좋으신데 어찌 아직까지 혼례를 올리지 않으신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하! 글쎄요……. 저는 눈이 높은가 봅니다. 아직까지 제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더군요. 낭랑과 같은 분이 없지요.”
이 또한 찬야가 세운 계획 중 일부분이었다.
‘계속 대화를 이끌면서 칭찬을 해. 기분이 한껏 좋아지면 술도 쭉쭉 들어갈 테고, 그럼 금방 취하게 될 거야. 남자든 여자든 취했을 때 비로소 진심이 나오는 법이지.’
찬야의 예상대로 모영옥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남 공자께서는 참으로 무서운 분이십니다. 어쩜 그리 혀에 꿀을 머금은 듯 좋은 말씀만 하십니까.”
“제 진심을 그리 왜곡하시면 곤란합니다. 하하.”
분위기가 무르익자 모영옥은 숨겨 두었던 명주를 꺼내 들었다.
“이건 두강주(杜康酒)라는 하남 술입니다. 그리고 이건 검남춘(劍南春)이라는 술인데, 향이 진하고 독하기로 유명하지요. 또 이것은…….”
하나같이 값비싼 술이었다. 눈 깜빡할 새 몇 병을 비우자 모영옥은 금세 취해 버렸다.
남량은 내력으로 취기를 몰아내 멀쩡한 상태였지만 일부러 취한 척 연기를 했다.
“남 공자와는 참으로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어쩜 이리 생각이 같을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량은 한시도 놓치지 않고 모영옥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가 속마음을 털어놓도록 조심스레 유도했다.
“헌데, 낭랑의 눈에 심기가 가득한 것이 보입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누가 봐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모영옥은 울적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바깥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허구한 날 계집질에 도박에 빠져 사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으니 제가 모두 도맡아 하지요. 뿐입니까? 집에 돌아올 때면 폭언에 어쩔 때는 손찌검까지 일삼으니……. 제가 마음이 편할 수가 없지요.”
“저런…….”
남량은 나직이 탄식을 내뱉으며 모영옥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동안 얼마나 홀로 외로우셨습니까?”
“네…….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남 공자같이 마음이 잘 맞는 친우가 생긴 것이 기뻐요.”
남량은 모영옥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낭랑. 저는 낭랑과 친우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요?”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그 외롭고 빈 마음 한켠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남량은 손을 뻗어 모영옥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모영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남량의 품에 안겼다.
‘여자가 울음을 터뜨리고 안기면? 그때가 바로 기회야.’
남량은 모영옥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낭랑. 가슴에 올려 둔 무거운 짐, 저와 나누시지요. 제가 낭랑께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자, 어서 말해 보세요.”
“남 공자…….”
“어서요.”
남량은 덜덜 떨리고 있는 모영옥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토닥였다.
모영옥은 감격한 표정으로 남량을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와 남편은…….”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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