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검황-56화 (56/164)

<56화>

복마전(伏魔殿). 미인계(美人計)(2)

암영은 즉시 모습을 드러내 장각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남량이 손목을 붙잡고 막았다.

『왜 그러나? 놈이 마교의 간자임이 확실해진 이상, 당장 붙잡아야 하네!』

『조금만 더 대화를 들어 보지요. 더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남량과 암영은 계속 위층의 대화에 집중했다.

“자네들이 닦달하는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전국 각지에 은신처를 짓는 작업 말고도 일부를 자네들이 빼먹고 있으니까. 수입이 끊기니 똥줄이 탄 거겠지. 안 그런가?”

장각이 코웃음을 치자 함께 있던 사내가 싸늘히 대꾸했다.

“당신, 말조심하시오.”

남량은 조용히 눈을 번득였다.

‘은신처! 장각이 횡령한 맹의 자금으로 흑룡회의 비밀 소굴을 짓고 있었던 건가. 하긴, 많은 인원을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움직이려면 들키지 않을 거점은 꼭 필요하니까…….’

암영은 이를 부득 갈며 자책했다.

‘흑영대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지금껏 알아내지 못했다니…….’

장각은 기세를 몰아 사내를 밀어붙였다.

“자네들, 설마 회주님의 귓가에 이 말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잠자코 기다려. 돈주머니는 두둑이 불려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자금을 빼돌릴 뿐, 유통에 관해서는 책임지지 않아. 전부 내자(內子:아내)가 관리하고 있다고. 그러니 내게 칭얼대도 소용없어.”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유통 과정을 장각의 아내가 담당하고 있다고?

그때, 암영이 남량의 손목을 잡으며 전음을 보냈다.

『지금이 들이닥칠 때일세. 붙잡아서 고신을 가하면 모든 것을 불 것이야.』

『안 됩니다. 지금 장각을 붙잡으면 놈들은 꼬리를 끊고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그럼 추적이 힘들어집니다.』

그때 장각이 입을 열었다.

“이제 알았나? 한 번만 봐줄 테니 이만 돌아가. 그리고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따로 찾아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회주님에게 허튼소리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요.”

사내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량과 암영은 장각이 돌아오기 전 재빨리 그곳을 나갔다.

***

돌아온 남량은 비설과 일행에게 자신이 알아온 정보를 모두 말했다.

“……그래서 장각의 아내를 감시해야 합니다. 빼돌린 자금은 은신처로 보내기 전, 분명 1차적으로 보관하는 장소가 있을 터. 그곳의 위치를 알아낸다면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비설이 남량의 말을 받았다.

“또한 유통 과정을 책임졌다면, 분명 출납을 기록한 장부가 있을 겁니다. 그걸 손에 넣는다면 전국에 있는 은신처의 위치도 전부 알아낼 수 있어요.”

비설은 믿을 만한 흑영대원들로 하여금 장각의 집을 뒤지도록 했다. 그러나 장부로 보이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또 이틀 동안 장각의 아내를 철저히 감시했지만 이 또한 수확이 없었다.

“장각의 아내 모영옥(牟英鈺)은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사업체를 전부 관리하는데 조금도 빈틈이 없기로 유명해요. 시종들도 아예 모영옥을 주인어른으로 모시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또 항상 주변에 호위들을 배치해 가까이 다가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대비가 아주 철저한 여인이에요.”

식사 도중, 유라가 비설에게 물었다.

“차라리 중원에 퍼져 있는 흑영대원들을 전부 동원해 보관소와 은신처를 찾아내면 어떨까요?”

“이미 지시를 해 두었습니다만……. 아무리 흑영대의 정보력이라 해도 그 넓은 중원에 숨겨져 있는 건물을 금방 찾아내는 건 어려워요.”

암영도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더군다나 장각 그자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조사를 시작한 시점부터 횡령을 중단했네. 추적할 단서가 없어.”

그때, 밥을 먹던 찬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 문득 궁금해졌는데, 그 모영옥이라는 여자 말이에요. 혹시 사적으로는 특이한 점이 없나요?”

비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딱히 없는 것 같은데……. 뭐, 남편과는 사이가 많이 좋지 않아 자주 싸운다는 것 정도일까요? 장각의 행실이야 워낙 유명하고 모영옥도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요. 최근 들어서는 방까지 따로 쓴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 점을 한번 파고들면 어떨까요?”

찬야의 말에 숨은 뜻을 해석한 비설이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시도는 해 봐야죠. 모영옥이라는 여자는 저희 얼굴을 모를 테니까요.”

“무슨 시도? 방법이 있는 거야?”

위지혁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남량은 영 못미덥다는 표정으로 찬야를 응시했다.

저놈 머리에서 제대로 된 계책이 나올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찬야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간단해. 남편이 허구한 날 다른 여자들만 만나고 다니는데 얼마나 질투 나겠어? 심지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말이야. 내색하지는 않지만 내심 속이 끓어오르고 있을걸? 그러니 우리가 그녀에게 접근해 마음을 빼앗고 정보를 얻어 내는 거야. 어때?”

유라가 벌떡 일어나며 찬야를 노려보았다.

“미친놈! 지금 도사가 되어서 남창(男娼:남자 창기) 노릇을 하겠다는 거야?”

찬야도 표정을 굳히며 벌떡 일어나 대꾸했다.

“말 다했어? 누가 몸을 판대? 설마 진짜 남창짓을 하겠느냐고! 여인 한 명 홀리게 만드는 것 정도야 화술(話術)로도 가능해. 그리고, 이건 엄연히 병법에도 있는 전술의 일종이야. 미인계(美人計)라고, 몰라?”

위지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미인계는 예부터 많이 써 오던 술책이기는 하지. 실제로 성공한 사례도 많았고. 하지만 신중을 기해야 할 거야. 만약 실패한다면 역으로 이쪽의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작전에 들어가는 건 만반의 준비가 끝난 이후일 거야. 다들 이 작전에 동의하는 거지?”

운휘는 손을 들며 빠지겠다고 말했다.

“난 이쪽 일과는 적성에 안 맞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유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반대다. 절대 동의할 수 없어!”

찬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유라 너도 운휘와 함께 구경해. 나머지는 찬성이겠지?”

“천만에. 남 사제도 분명 반대할 거야. 그렇지?”

유라는 동의를 구하듯 남량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잠시 고민하던 남량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찬야의 말대로 하지.”

“남 사제! 우린 도사야! 본분을 잊으면 안 된다고!”

남량은 당황한 유라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유라. 잘 들어. 우린 지금 암투(暗鬪) 중이야. 그리고 이 싸움은 장차 중원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싸움이고. 너에게는 중원의 안녕과 도사의 자존심.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지?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전자가 더 중요해. 마교를 상대로,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필요하다면 손에 더러운 걸 묻힌다고 해도 망설이지 않아. 그게 내 정의야.”

물론 내 정의는 중원의 미래 따위가 아닌, 복수이지만.

잠시 고민했던 건……. 그냥 외모를 이용해 접근하는 방식이 귀찮았을 뿐이었다.

유라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남량은 유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나도 네 성정상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이번 일에서 빠져. 여자를 유혹하는 일이니 네 도움이 없어도 괜찮을 테고. 물론 이 작전이 화산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은 없을 거야. 안심해.”

“그것뿐만이 아니야. 난 네가……!”

울컥해 소리치던 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니야.”

유라는 시선을 떨구고 주먹을 쥐며 말없이 남량을 지나쳐 방을 나가 버렸다.

비설은 유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작전을 짜 볼까? 수장님. 모영옥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다요.”

“금방 전해 드리지요.”

남량과 찬야, 위지혁은 비설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모영옥은 장각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학문과 예술을 익혔군. 심지어 무예도 어느 정도 배운 것 같은데? 참, 사교 모임에도 자주 나가는 것 같다는데, 자연스럽게 접근해 호감을 얻으려면 이쪽이 나을 것 같아.”

“마침 보름에 한 번씩 하남의 귀족 집안 사람들과 사냥을 나간다는데, 이때를 노려 보면 어떨까?”

위지혁과 찬야의 말을 들은 남량은 비설에게 부탁했다.

“사교 모임에 저희가 참가할 수 있도록 신분을 위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장께서 도와주세요.”

비설은 이번에도 금방 일을 처리했다. 세 사람을 사천에서 유학을 온 귀족 집안의 자제들로 꾸민 다음, 모영옥에게 모임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다음 날, 모영옥으로부터 한 장의 서신이 도착했다. 이틀 뒤 있는 사교 모임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

이틀 뒤, 모임 날짜가 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각종 상류층 인사들은 한가로이 말을 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호위들과 시종들은 바삐 뒤를 따랐다.

휘익-퍼억!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나간 화살이 토끼의 몸통에 명중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시종들이 얼른 달려 나가 화살을 회수하고 토끼의 시체를 치웠다.

“장 부인. 오늘따라 유독 사냥에만 몰두하시는군요. 허허.”

한 중년 사내의 물음에 새 화살을 꺼내 든 모영옥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요 근래 모영옥의 심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남편 장각의 외도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요새 들어 그 행패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맹에서 마교의 간자들을 잡아내는 데 열을 올리는 지금, 사업체 관리와 더불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터라 모영옥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군요.”

사내의 시선이 훤칠한 키의 청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남자답게 매우 잘생긴 청년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모임에 참석한 인사들과 자연스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야찬이라는 이름의, 사천 지방에서는 제법 유명한 집안 자제더군요. 낙양으로는 잠깐 유학을 와 있다고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가서 인사라도 해야겠군요. 허허.”

야찬뿐만 아니라 위혁지라는 이름의 청년 역시 귀족다운 품위가 느껴졌다. 형식적인 모임에 지겨워하던 하남의 귀족들은 두 사람의 매력에 금방 빠져서 사냥은 뒷전으로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흥. 재미없는 노인네들 비위를 맞춰 주니 고맙군.’

청년들을 잘 초대했다고 생각한 모영옥은 홀로 말을 달려 산속 깊이 들어갔다. 호위 무사들에게는 따라오지 말라고 엄명을 놓았다.

일행과 한참 떨어질 무렵, 모영옥은 물가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사슴을 발견했다.

능숙하게 활시위에 화살을 얹은 모영옥은 숨을 가다듬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촉끝이 사슴의 목을 향하는 그때, 느닷없이 반대편에서 커다란 멧돼지가 콧김을 내뿜으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모영옥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뭐야! 왜 이곳에 저런 짐승이 있는 거야!’

본래 사냥터를 지정하면 그 산에 있는 위험한 짐승들은 모두 내보내고 사냥감만을 남겨 놓는 것이 상식이었다.

‘설마 옆 산에서 넘어오기라도 한 것인가?’

수하들의 실수를 탓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모영옥이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바로 그 순간, 바람처럼 날아든 화살 한 대가 멧돼지의 눈에 명중했다.

“끼에엑!”

화살을 맞은 멧돼지는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모영옥은 깜짝 놀라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검은 머리의 미남자가 천천히 활을 내렸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이 책의 일부나 전체를 어떠한 형태로도 복제하거나 재가공하여 옮겨 실을 수 없습니다.

ⓒ비류(沸流) / Good World Co.,LTD

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