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복마전(伏魔殿). 가화어인(嫁禍於人)(1)
“흑영대에서 추려 낸, 마교와 결탁한 걸로 의심되는 이들의 정보입니다. 여러분은 흑영대와 함께 이들을 감시하고, 마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좌를 찾아내시면 됩니다.”
비설은 남량 일행에게 각자 감시해야 할 자들의 정보를 건네주었다.
정보를 받아 든 일행은 서로의 건투를 빌며 방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정보를 받은 남량은 종이에 그려진 이의 면모를 유심히 살폈다.
“이자는 누구입니까?”
남량의 물음에, 비설이 대답했다.
“순찰당(巡察堂)의 당주(堂主), 양봉(楊奉)이라는 자입니다.”
순찰당주라면 맹의 최고 직책 중 한 자리가 아닌가.
정말 이자가 마교의 간자라면, 마교는 생각보다 더 깊숙이 무림맹에 파고들었다는 뜻이 된다.
“남 소협. 지금부터 저희 흑영대를 제외한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가능한 모두를 의심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남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부터 맹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서늘한 칼날이 목을 파고들 수 있는 곳. 가히 복마전(伏魔殿)이라 할 수 있었다.
***
낙양의 명월루에는 항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늦은 밤, 가마 한 채가 명월루의 문을 넘어왔다. 가마가 멈추고 그곳에서 갓으로 얼굴을 가린 한 사내가 내렸다.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듯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때, 기녀 한 명이 살며시 다가와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모이셨는가.”
“네. 어서 가시지요.”
“음.”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기녀를 따라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안쪽 깊숙이 위치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곳에는 두 명의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사내는 갓을 벗으며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항상 서찰로만 연락하다 직접 만나 뵙는 것은 처음이로군요.”
좌측에 앉은 푸근한 인상의 사내가 말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사내는 무림맹 부총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장각(張閣)이라는 자였다. 그리고 갓을 벗은 사내의 이름은 양봉. 무림맹 순찰당주 직책을 맡은 인물이었다.
“양 당주, 주변에 미행은 없었소이까?”
“네. 하 단주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봉은 우측에 앉은 화려한 옷차림의 노인에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노인의 이름은 하추(河推). 그는 무림맹과 연을 맺은 낙양 제일의 상단인 낙양상단(落陽商團)의 단주였다.
양봉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들 소식 들으셨습니까? 고 맹주가 중원 내 잠입한 마교를 색출해 내는 대대적인 조사를 공표할 것이라 합니다.”
하추가 수염을 쓸며 중얼거렸다.
“예. 아무래도 맹주와 총관이 회(會)의 존재에 대해 눈치를 챈 것 같더이다.”
장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우릴 이 자리로 부른 자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양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양 당주. 하 단주께서는 그자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간 저희들에게 회의 밀명을 내리던 그자 말입니다.”
장각의 물음에 하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역시 밀서를 주고받았을 뿐, 그자의 정체는 알지 못하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테지.”
세 사람은 초조한 기색으로 자신들을 부른 ‘회의 연락책’을 기다렸다.
대략 일다경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직후, 그들의 표정이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째……. 다들 못 볼 걸 보았다는 표정이십니다.”
“다, 당신은, 고 대주가 아닙니까?”
양봉은 눈앞에 서 있는 고위영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말도 안 된다. 고 대주가 회의 일원이었다고? 맹주의 아들인 그가?’
고위영은 불신과 두려움에 찬 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제가 바로 회의 연락책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걸 보시지요.”
고위영은 옷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편익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세 사람은 고위영이 회의 인물임을 확신했다.
“이제야 저를 믿으시는 눈빛이로군요.”
고위영은 자리에 앉아 세 사람에게 술잔을 따라 준 다음,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제가 여러분을 한데 소집한 이유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고위영은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회주의 전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준비해 왔던 거사를, 실행시킬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맹주와 총관이 회의 존재를 눈치채고 조사를 시작한다면 장차 회의 대업에 큰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전에 저희가 먼저 손을 쓸 것입니다. 바로 이번 거사의 목적인-.”
고위영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현 맹주를, 몰아내는 작업을 말입니다.”
양봉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드디어 시작하는 것인가.’
고위영은 장각을 향해 물었다.
“빼돌린 맹의 자금은 어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장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믿을 만한 놈들로 하여금 장부를 조작하게 했으니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빼돌린 자금은 회의 은신처를 짓는 데 들어가고 있습니다.”
“총관은 매우 교활한 자이니 모쪼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위영의 시선이 양봉을 향했다.
“양 당주. 흑영대와 맹주, 총관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알아냈는지, 누굴 의심하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네.”
“마지막으로 하 단주. 그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위영이 하추에게 물었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아편(阿片)의 거래 날짜가 언제입니까?”
“대략 한 달 뒤.”
“더 앞당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맹주를 끌어내리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니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물론이오.”
고위영은 술잔을 다시 채우며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우리는 회의 대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가장 큰 공헌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심을 다해 임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또한, 도중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고위영은 뒷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양봉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회는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때는 너뿐만 아니라 네놈의 식솔들까지 전부 몰살당할 것이다.’
그때, 장각이 분위기를 바꾸려 술잔을 들었다.
“물론입니다. 하하! 자, 거사의 성공을 위해 다들 잔을 듭시다.”
네 사람의 잔이 한데 부딪쳤다.
***
거처로 돌아온 양봉은 즉시 수하를 불렀다.
“지금부터 흑영대와 총관, 맹주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하거라.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그리고 어르신…….”
양봉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따로 보고할 것이 있느냐?”
수하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틀 전부터 저희를 감시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뭐라?”
양봉은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들키기라도 했단 말인가?
절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냐. 누가 감히 나를 감시한다는 것이야! 흑영대인가?”
“아닙니다. 그것이…….”
수하는 애매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남량이라는 화산파의 제자입니다.”
“남량? 남량이라면…….”
남량의 이름을 곱씹던 양봉이 입을 살짝 벌렸다.
“그래. 은영단의 실체를 파악한 백매화 말이렷다?”
“예. 매화검선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그자입니다.”
“헌데 그자가 어찌 나를……. 설마, 흑영대와 함께 움직이는 것인가?”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양봉은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만약 그자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면……. 위험해. 거사가 성공하기 전까지 내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수하가 넌지시 물었다.
“일단 위에 보고할까요?”
“그럼 회주께서 내 능력을 의심하실 것이다. 이건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양봉의 눈이 순간 붉게 일렁였다.
“거사 전까지……. 치워 버리는 수밖에.”
“암살입니까?”
“일단 살려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거라. 취조해서 흑영대와 관련이 없다면 거사가 끝난 뒤 풀어 줄 것이다.”
양봉은 서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들어 수하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온갖 패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비밀리에 고용한 암살자들 중, 실력이 확실한 자들로 엄선해서 보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백매화의 무예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실패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마침 혈삼랑(血狼)과 도살객(屠殺客), 유령객(幽靈客)이 들어와 있으니 그들을 시키면 될 듯합니다.”
전부 잔혹하기로 이름난 절정의 살수들이다. 양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확실히 잡을 수 있겠군. 좋다.”
***
남량은 어두운 밤거리를 홀로 걷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순찰당주의 행적을 감시하고 흑영대에 보고한 뒤, 거처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갓을 쓴 한 사내가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
“…….”
남량은 묘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뒤쪽에서 수레를 끌고 오는 사람 한 명. 그리고 좌측에 장신구를 정리하는 여성 한 명…….’
남량은 절뚝거리는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하나 부족한 점이 있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살기다. 제아무리 완벽한 작전을 세웠다고 해도, 살기를 감추지 못하면 금방 들키고 말지.”
“…….”
“누가 보냈느냐.”
한 차례 싸늘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파팟!
그 순간, 절뚝거리던 사내가 벼락처럼 지팡이로 위장한 검을 뽑아 들고 남량을 공격했다.
남량은 곧장 허리를 젖혀 검을 피해 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장신구를 정리하던 여인이 장신구로 위장한 암기를 던졌다.
채채챙!
남량이 암기를 쳐 내자 이번에는 수레를 끌던 남성이 수레 안에 숨겨 두었던 거대한 도끼를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카앙!
도끼를 막아 낸 남량이 뒤로 밀려났다. 세 명의 살수는 재빠르게 남량을 포위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구나.’
갓을 쓰고 검을 든 사내가 말했다.
“기습을 막아 낸 것은 칭찬해 주마. 허나, 살고 싶다면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량이 검을 뽑아 들며 냉소를 흘렸다.
“서로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으니, 긴말하지 말고 덤벼라.”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세 명의 살수, 혈삼랑이 남량을 에워싸고 조금씩 다가왔다.
직후, 남량의 눈이 번득이며 그의 검이 움직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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