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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49화 (49/164)

<49화>

천음선녀(天陰仙女)(8)

남량 일행은 무림맹으로 돌아온 즉시 비설과 함께 총관 건옹을 찾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마교의 교인들이 중원에 암약하며 모략을 꾸미고 있음이 확실해졌네. 맹에서는 즉시 이 흑룡회라는 집단을 색출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할 것이야.”

현재로서는 흑룡회 조직원들의 몸에 새겨진 편익 문신만이 유일한 단서였다. 남량은 일단 맹과 흑영대의 정보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 이번 일을 해결한 자네들의 공을 매우 칭찬하셨네. 그래서 직접 자네들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 나와 함께 맹주전으로 가세.”

남량 일행은 건옹, 비설과 함께 맹주전으로 향했다.

매화오절은 소문으로만 듣던 무림맹주를 실제로 만날 생각에 매우 들떠 있었다.

무림맹주 고경홍(高瓊鴻).

남북 십성의 일원인 명왕(明王)이자 중원 무림의 최강자로 추앙받는 무신(武神).

무림에 들어오기 전, 조정의 군부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외적을 격퇴하고 북방의 안전을 지킨 수호신으로 만백성의 칭송이 높았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정에 공명정대하고 가식이 없는 태도로 무림인들에게도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강호를 어지럽히던 사파 무리를 몰아내고 정파 무림의 기강을 세운 장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과거 나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강한 친구였었지……. 그 불같은 성격은 여전하련지 모르겠군.’

맹주전 집무실에 도착하자 맹주의 호위 무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무사들이 남량 일행이 찾아왔음을 알리자, 문 너머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하거라.”

문이 열리고 남량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집무실 안에는 건장한 체구에 황룡(黃龍)이 수놓인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맹주 어르신. 매화오절을 데려왔습니다.”

“그래. 왔는가.”

맹주 고경홍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남궁천 못지않게 키와 덩치가 큰 고경홍은 눈빛이 매우 진중하며 위압감이 넘쳤다. 턱을 살짝 들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지고의 경지에 선 자의 오만함과 고고함이 느껴졌다. 허나 반대로 그가 남량 일행을 대하는 태도는 한없이 인자했다.

매화오절은 정중히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강호의 영웅을 뵙습니다.”

“반갑다. 하나같이 훌륭한 젊은이들이로군.”

남량을 제외한 제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 총관으로부터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은영단 사건 때에도 그들을 찾아내 본거지를 치는 데 공헌하고, 이번 사건에서도 크게 활약했다지? 우리가 흑룡회라는 조직에 대해 알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너희들 덕분이다. 참으로 장하구나.”

유라가 매화오절을 대표해 맹주의 말에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고경홍의 좌측에 앉아 있던 비설이 웃으며 말했다.

“함께 임무를 경험한 바, 매화오절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저희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경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도 알다시피 흑룡회는 맹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마공을 익힌 괴물을 만들어 냈다. 놈들은 필시 강호에 혼란을 일으켜 차후 중원을 침공할 때 유리하게 만들 속셈이 분명하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전처럼 흑영대와 협력해 중원 내에 숨어든 흑룡회의 단서를 찾는 데 힘을 보태도록 하거라.”

매화오절은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기대에 부흥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량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빛냈다.

‘잘되었다. 내가 직접 흑룡회에 대한 단서를 추적해 놈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리라.’

남량 일행이 집무실을 나가자, 고경홍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흑룡회의 조직원들이 몸에 새긴 편익의 문신은 분명 삼천위인 효초아, 그자의 문양이네. 마교가 드디어 몸을 움직인 것이야.”

고경홍의 시선이 우측에 앉아 있는 건옹을 향했다.

“총관. 중원에 숨어든 마교의 교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기 위한 좋은 계책이 있는가? 저들은 내전 이후 자신들의 정보를 철저히 은폐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네. 쉽지 않을 것이야.”

건옹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해서, 일부러 대대적으로 조사를 하겠다 공표한 것입니다. 놈들은 분명 중원 곳곳에 자신들의 눈과 귀를 심어 놓았을 터. 우리가 추적해 온다는 것을 알면 스스로 틈을 보일 것입니다.”

고경홍은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타초경사(打草警蛇:풀을 두드려 뱀을 놀라게 한다)라…….”

고경홍은 탁자를 치며 말했다.

“남북 십성을 소집해야겠군. 어느 때라도 만반의 준비를 갖춰 대비할 수 있도록 말이야.”

“네. 현재 중원에 숨어든 교인들 중, 삼천위나 그 휘하 칠령귀(七靈鬼), 사흉마(四凶魔), 복마십군(伏魔十君)이 있다면 남북 십성의 힘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십성에게 서찰을 보내도록 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고경홍이 눈살을 찡그렸다.

“문제?”

“예. 한 달 전쯤에 보고를 드렸었지요. 내정을 관리하던 도중,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해 아무래도 수상쩍어 흑영대로 하여금 조사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던 건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아냈는가.”

“알아본 바, 아무래도 본 맹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경홍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배신자라……. 허면, 그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냈는가?”

건옹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허나 타초경사의 계에 걸려든 놈들은 분명 꼬리를 드러낼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맹 내에 잠입한 마교의 끄나풀들을 철저하게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만약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놈들이 눈치를 채면 곧장 숨어 버릴 테니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이번 일은 비설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책임지고 배신자들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라.”

비설과 건옹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

한편, 운대산에서 도망친 낭연청은 어딘지 모를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자, 편익 문양이 새겨진 문이 나타났다. 낭연청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마치 황제의 방처럼 사치스럽기가 극에 달했다. 낭연청은 중앙에 놓인 거대한 침상을 응시했다.

얇은 천으로 가려진 침상 안에서는 짙은 아편 냄새와 함께 달뜬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허억, 허억…….”

“아아……. 아흑…….”

천 너머에서는 한 사내가 여러 미녀들과 함께 난교(亂交)를 벌이고 있었다. 낭연청은 익숙하다는 듯 난교가 끝날 때까지 눈과 귀를 닫은 채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신음 소리가 잦아들고 방 안을 감싼 음란한 기운도 가셨다.

그제야 낭연청은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주(會主)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내 하얗고 긴 팔이 천을 걷으며 한 사내가 나체로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붉은 장발에 피부가 매우 희었고, 여인처럼 곱상한 외모에 눈은 마치 뱀처럼 요사스러웠다.

“너도 참 대단해. 어떻게 표정의 변화가 없지? 맨날 그렇게 지켜만 보고 있는 게 불편하지도 않아?”

사내의 목소리는 옥이 굴러가는 듯 매끄러웠는데, 다소 경박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딱히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만…….”

낭연청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빨리 끝내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있습니다.”

“하하하!”

사내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 이뤄 주도록 노력해 보지. 아니면 같이 들어와서 즐겨도 되는데. 어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농담이야. 널 건드리면 지월이 가만있지 않을걸?”

사내는 피식 웃으며 침상 아래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붉은 장포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는데, 새하얀 등에는 커다란 편익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사내는 나체에 장포를 걸친 뒤,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탁자로 가서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보고해 봐. 갔던 일은 어찌 되었지?”

“천음선녀는 맹에서 보낸 이들에 의해 당했습니다. 정보를 발설하기 전에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를 주전자째로 벌컥 들이켠 사내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계집. 보잘것없는 인생에 기회를 주었으면 제대로 일을 처리했어야지……. 하긴, 한낱 창기 따위에게 기대를 건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 단순한 유희였으니 딱히 아쉽거나 하지는 않지만, 누가 죽였는지는 제법 궁금하네. 누구야? 흑영대인가?”

“매화오절이라 불리는 화산의 다섯 제자가 함께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매화검선의 제자였습니다.”

“당연히 죽였겠지?”

사내의 말에 낭연청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실패했습니다.”

“검오아가 실수를 했을 리는 없고, 누가 방해했나?”

“네. 도중에 검성이 나타나 저를 공격했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게 다행이네.”

사내는 이를 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그놈들이 문제야. 남북 십성! 내 기필코 그놈들을 잡아다 오체분시(五體分屍)해서 개 먹이로 주고 말 거야.”

낭연청은 못 들은 척 계속 말했다.

“아무튼 이번 일로 맹에서는 흑룡회를 추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업의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몸을 사려야 할 듯싶습니다.”

쾅! 주전자를 바닥에 던진 사내가 말했다.

“아니! 이참에 무림맹 그놈들, 제대로 골탕 좀 먹어 보라고 해. 준비하던 계책 있잖아? 그거 앞당기자고.”

낭연청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맹에 심어 놓은 간자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놈들이 우리 뒤를 추적하기도 전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서 무너지게 만들자고.”

사내의 시선이 낭연청의 뒤쪽으로 향했다.

“이봐! 알아들었지? 실수 없이 잘해.”

낭연청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검을 찬 한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무사의 얼굴이 반쯤 드러난 순간, 낭연청은 눈을 크게 뜨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놀랐어?”

“맹에 심어 놓은 간자가, 저자였습니까?”

“그래. 그야말로 최고의 간자라고 할 수 있지.”

무사의 정체는 바로 무림맹주 고경홍의 아들이자 무림맹의 무력부대를 총괄하는 총대주, 고위영이었다!

맹에 간자를 심어 놓은 사실을 알고 있던 낭연청도 그 정체를 알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고위영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효초아 님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효초아-. 흑룡회의 수장이자 삼천위의 일원인 그가 대답했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효초아는 고위영이 물러나자 낭연청에게 지시했다.

“너는 흑영대의 움직임을 잘 주시해. 아, 그리고 남량이라는 자도 좀 알아봐.”

낭연청이 순간 움찔했다.

“그자는 어찌…….”

“그놈이 은영단의 정체를 알아내고 이번에는 천음선녀까지 막아 냈다며? 어째 석연치 않아. 나중에 방해가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러니 일단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낭연청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도중, 낭연청의 뇌리에 남량이라는 사내의 얼굴이 스쳤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도 생생했다.

‘그때 나를 보던 눈빛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분명 처음 보는 자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조사해 둬서 나쁠 건 없겠지. 다음번에는 반드시 심장을 꿰뚫어 주마.’

낭연청은 복면 위로 드러난 두 눈을 차갑게 번득였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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