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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검황-27화 (27/164)

<27화>

지하미궁(地下迷宮)(4)

“으아악!”

“크윽!”

모래 바닥이 갑자기 푹, 하고 꺼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일행은 모래에 휩싸인 채 엄청난 속도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고, 디딜 바닥도 없는 데다가 몸에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저항이 불가능했다.

“어푸푸! 모래가 입안에 계속 들어와!”

“도저히 중심을 잡을 수가…….”

찬야와 운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있어. 이 정도 거리라면…….’

“손! 손을 내밀어!”

남량은 가까스로 팔을 뻗어 운휘와 찬야의 옷깃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갈경의 기척을 찾았을 땐, 이미 그녀는 손이 닿지 않을 곳까지 밀려난 뒤였다.

“꺄아악!”

“제갈경!”

남량은 제갈경을 불렀다. 제갈경은 그대로 모래에 파묻혀 남량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기척도 빠르게 멀어졌다.

‘빌어먹을…….’

남량은 이를 부득 갈았다.

모래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손에 쥔 옷깃을 놓지 않으려 힘을 준 채, 하염없이 미끄러져 갈 뿐이었다.

콰앙!

한참을 떠내려온 남량은 천장을 뚫고 모래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중심을 잡은 남량은 공중에서 몸을 빙글 돌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눈가에 묻은 모래를 가볍게 털어 낸 남량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정말, 별의별 함정이 다 있군.”

하긴, 황제의 명을 받아 여의주라는 보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일 테니, 당시 중원의 제일가는 기술자들이 전부 달려들었을 터였다.

잠깐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남량은 제갈경의 활약으로 안일해져 있던 자신을 질책했다.

고개를 돌리자 엉망이 된 찬야와 운휘가 입안에 들어간 모래를 뱉어 내고 있었다.

“기대고 뭐고 이제는 지쳤어.”

“망할 기관술사들 같으니. 대가리에 뭐가 들었길래 이런 기관들을 만들어 낸 거야? 하여간 지독한 새끼들!”

“일어나. 제갈경을 찾으러 가야…….”

두 사람을 부르던 남량은 답답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남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떨어진 곳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석실에 불과했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통로가 없어.’

사방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밀실(密室). 완벽히 폐쇄된 공간이었다.

붕괴된 천장의 구멍을 타고 다시 올라가려고 해도, 모래에 막혀 올라갈 수가 없었다.

완전히 갇혀 버린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찬야와 운휘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콸콸콸-.

차가운 액체가 발끝을 타고 점차 차오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남량이 허리를 굽혀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물?’

일순, 일행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사방이 막힌 밀실에 차오르는 물.

가만히 있으면 천장까지 금세 차오를 것이다.

남량은 그제야 이 방의 진짜 용도를 깨달았다.

단순히 밀실에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에 잠겨 익사하게 만드는 함정이었던 것이다.

지하미궁의 수뢰옥(水牢獄). 이곳의 명칭이었다.

그 사실을 안 이상,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었다.

남량은 사방의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콰콱-!

검기가 석벽을 가르며 검상을 남겼다.

그러나 벽을 부수거나 하지는 못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찬야와 운휘는 금세 울적해졌다.

“젠장, 이런 곳에서 죽을 줄 알았다면 제대로 된 고백이라도 해 보는 건데…….”

“형님과 같은 곳에서 죽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크흑!”

빠악! 빡!

남량은 주먹으로 둘의 머리를 후려치며 말했다.

“난 죽을 생각이 없는데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남량은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임에도 여전히 덤덤했다.

“그럼 방법이 있어?”

찬야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남량이 대답했다.

“아직은 없다. 난 제갈경처럼 기관을 잘 다루지는 못해. 하지만 기관술사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오만하며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함정에 걸린 사람이 발버둥 치며 빠져나가는 과정을 즐기지. 무슨 괴상한 심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함정을 설치했다면, 역으로 함정을 파훼할 방법도 마련해 놨을 거라는 소리야.”

철컥.

남량은 고개를 돌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하물며 황제의 부름을 받은 장인들임에야 오죽하겠는가. 분명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모험이다.

만약 짐작이 틀렸을 시, 꼼짝없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남량은 조금도 떨리는 기색이 없었다.

찬야와 운휘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남량의 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대체 남 사제는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형님, 형님은 죽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운휘의 물음에, 남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한 번 죽은 목숨인데, 두 번은 뭐가 어렵겠는가.

죽으면 억울할지언정,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발버둥 친 사람’에게 오는 거야.”

위광, 그가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발버둥 쳤다. 광기에 가까운 삶에 대한 집착이 곧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다.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나? 운이 좋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남량이 말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마음대로 해. 울면서 하늘을 원망하든,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든.”

“그게 뭐야……. 바보 같아.”

실실 웃던 찬야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내리지는 않았다.

“제발 비극적인 결말만 아니길…….”

“살아 돌아가도 당분간 강이나 호수 근처에는 못 갈 거 같아…….”

운휘 역시 검을 뽑아 들고 남량의 곁에 붙어 섰다.

어느새 물은 허리를 지나 어깨, 그리고 목까지 차올랐다.

턱 아래 넘실거리는 검은 물결이,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몸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극도의 공포심과 긴장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꼬르륵-.

그리고 마침내 물이 천장까지 차올랐다.

최대한 숨을 들이마셨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찾아내. 파훼법을.’

남량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분함을 유지한 채, 기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과연, 활로(活路)를 찾을 수 있을까?

사방이 암흑에 휩싸인, 고요한 적막 가운데.

남량은 코끝을 스치는 미세한 ‘흐름’을 감지했다.

‘이건?’

남량은 희미한 흐름을 찾아 천천히 감각을 움직였다.

완벽한 밀실이라면 물결의 흐름이 이어질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딘가 외부로 이어진 통로가 있다는 뜻.

남량의 예상대로 흐름은 곧 밀실의 한 지점에 모여들고 있었다.

순간, 남량의 눈이 번득였다.

‘저곳이다! 저곳이 바로 활로야!’

남량은 물살을 헤치며 흐름이 이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흐름이 모이는 지점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만져 보았다.

벽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금, 갈라진 부분이 있었다.

‘외부로 연결되어 있다. 분명히.’

남량은 검에 내력을 주입시켜,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남 사제. 뭔가 찾은 거야?’

찬야가 눈짓으로 물었다. 남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똑같이 손짓으로 설명했다.

‘틈을 찾아냈다. 내가 검길을 만들 테니, 그대로 따라와.’

찬야와 운휘는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빠르게 물살을 저으며 남량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검을 빼 들었다.

남량은 내력을 칼끝에 집중시킨 뒤, 찌르는 자세를 취했다.

‘수중이라 저항을 받긴 하지만…….’

어차피 갈라진 틈으로 내력을 주입시키기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없었다.

틈 사이로 검기를 폭발시켜 벽을 무너뜨린다.

남량은 검날을 살짝 비트는 것과 동시에 무게를 앞으로 실으며 검을 내질렀다.

직후, 칼끝에 일렁이던 검기가 정확히 흐름이 모이는 지점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앙!

남량의 신호에 따라 찬야와 운휘가 똑같이 검을 내질렀다.

쾅! 콰아앙!

세 검의 끝이 한곳에 집중되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고, 이내 벽이 우르르 진동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성공인가.’

콰르르-.

마침내 벽이 무너지고 남량의 몸은 거센 격류에 의해 벽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방으로 나가떨어진 남량은 막혔던 숨을 내쉬며 연신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생각보다 물속에 오래 있었던 탓인지, 폐가 아팠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결국 살아남았나.

이번 생도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남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찬야와 운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으하하!”

“찬야! 네 낯짝이 이렇게 예뻐 보일 때도 있구나! 이리 와!”

‘미친놈들…….’

과도한 애정 행각(?)을 보다 못한 남량이 둘을 발로 차서 밀어내며 버럭 소리쳤다.

“정신 차려! 이제 막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을 뿐이야! 무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방심하는 때라는 걸 몰라?”

“네, 넵!”

한 차례 꾸중을 들은 둘은 금방 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다행히 이전처럼 밀실은 아니었다.

그곳은 원형으로 된 커다란 방이었으며, 곳곳에 괴상한 바윗덩이가 세워져 있고 중앙에는 해골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런 깊은 지하에 해골이?’

비단 해골뿐 아니라 이 방 자체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바윗덩이가 어색하게 선 것이나, 위치 등을 보면 진법(陳法)을 펼친 듯한데…….’

남량은 강호의 무학에 대해 풍부한 견식을 가지고 있었고, 진법에도 통달해 있었다.

그래서 바윗덩이가 진법의 진체(陳體)를 담당한다는 것과, 진법의 종류까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이 형태는 봉인진(封印陳)의 일종이다. 그러고 보니 제갈 공자가 그랬었지. 여의주의 감당하기 힘든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이인(異人)을 데려와 지하미궁을 지키게 했다고.’

그렇다면 이 해골의 주인이 그 이인을 가능성이 높았다.

‘죽어서까지 깊은 지하 속에서 진법을 유지하다니……. 대단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한 자로군.’

그때, 해골의 앞에 놓인 작은 석함(石函)에 남량의 무릎이 걸렸고, 뚜껑 부분이 덜컥거리며 밀렸다.

남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낡은 서책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인이 남긴 글인가?’

책은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했다.

남량은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해골의 생전 이름인 『각운(覺雲)』이라는, 법명(法名)으로 보이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기자 그의 필체로 추정되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하미궁에 들어온 이들이여.』

『무엇을 바라는가? 재물? 신병(神兵)? 영물?』

『이곳에는 네가 원하는 무엇도 없다.』

『돌아가라.』

움찔.

책장을 넘기던 손끝이 멈추었다.

***

한편, 남량 일행과 따로 떨어진 제갈경은 홀로 야명주 빛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남량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내지르느라 목이 쉬고 다리에 힘도 없었다.

그저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다 죽겠어.’

한숨을 내쉰 제갈경이 잠깐 앉아서 쉬려고 하는 그때, 야명주 빛이 커다란 성문을 비추었다.

“헉!”

깜짝 놀란 제갈경이 얼른 성문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 내성의 성문보다 훨씬 더 크고 두꺼워 보였다.

‘여기가 혹시 지하미궁의 끝이 아닐까?’

제갈경은 떨리는 손으로 성문을 만졌다. 무슨 짓을 해도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문을 매만지는 제갈경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잠깐만, 이거…….’

이윽고 제갈경의 손이 한 부분에서 멈추었다.

성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기관이잖아. 잘하면 열 수도 있겠는데?”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발행인ㆍ곽동현 / 발행처ㆍ(주)조은세상

이 책의 저작권은 (주)조은세상과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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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 지평을 열어 가는 (주)조은세상.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실 작가님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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