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지하미궁(地下迷宮)(5)
남량은 순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설마 전설이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여의주라는 대단한 물건이 아니라면 이런 거창한 궁전을 만들었을 리도 없을뿐더러, 봉인진과 각운 선사(禪師)-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선사로 칭했다-도 전설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사락-.
남량은 한 장을 더 넘겼다. 이번에는 각운 선사의 한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아아, 이 글을 보았다면 분명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이겠지. 실로 안타깝구나……. 지하미궁을 찾아온 이여,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앞에 있는 것들은 그대가 지금껏 헤쳐 온 난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니…….』
남량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은. 내가 알고 싶은 건 여의주의 실존 여부뿐이야.’
그리고 다음 장에, 각운 선사는 남량이 원하는 질문의 답을 내놓았다.
『나는 황제의 명을 받아 여의주의 기운을 봉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강대한 여의주의 기운을 봉인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지닌 사람은 내가 유일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평생의 법력을 담아 만든 봉인진으로 여의주를 잠재우는 역할을 맡았고, 황제는 도굴꾼들의 침입을 대비해 거대한 지하미궁을 만들었다.』
글을 읽던 남량은 크게 기뻐했다.
‘여의주가 실재했구나. 헛된 발걸음이 아니라 다행이야.’
『이 아래, 여의주를 모셔 둔 신전(神殿)이 있다. 뛰어난 기관술사가 오지 않는다면 절대 열리지 않겠지만……. 만약 열 수 있다고 해도 절대 그리해서는 안 된다. 이건 그대들에게 하는 마지막 경고이며, 부탁이다.』
남량은 각운 선사의 경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의주는 용이 부리는 신통력의 원천이며, 천지간의 조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보물이다.
황제조차 여의주의 힘으로 재해를 잠잠하게 하고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봉인할 정도인데, 그것이 만약 세상에 드러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온갖 야욕을 품은 사람들이 여의주를 갖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고, 이는 필시 큰 혼란을 초래할 터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지금 내게는 세상의 위험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데 다음 장을 넘기는 순간, 남량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왜 그러십니까, 형님?”
방에 숨겨진 함정이 있는가 의심하며 살펴보던 운휘가 물었다.
남량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응시했다.
각운 선사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
『마지막 관문……. 신전으로 향하는 관문을 열게 되면 자연히 지하미궁이 붕괴되도록 설치되어 있다. 도굴꾼들과 함께 영원히 지하 속에 묻히도록……. 그러니 살고 싶다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라. 두 번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천하의 남량도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떡하지?’
지하미궁이 붕괴하기 시작한다면 탈출에 온 힘을 쏟아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남량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포기하고 이곳을 벗어나자.’
여의주의 힘이 아쉽기는 했으나, 목숨의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의주가 아니더라도 강해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판단은 냉정했고, 미련은 금방 떨쳐 버렸다.
남량은 찬야와 운휘를 불러 각운 선사의 유서를 보여 주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모험은 이걸로 끝이다. 어서 제갈경을 찾아 이곳을 벗어나자.”
“남 사제. 애초에 이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도 모르잖아?”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위험한 도박이야.”
남량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찬야는 매우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량은 유서를 잘 챙겨서 들고 갈 생각이었다. 곧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이곳을 발견할 것이고,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줘야 일어날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서책을 덮으려던 그때, 남량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군. 이런 몇 줄 안 되는 유언을 쓰기 위해 서책 한 권을 쓴다고?’
각운 선사의 유언은 종이 한 장에 다 들어갈 정도로 짧았다.
그런데 일부러 서책 한 권을 가져다 몇 장만 쓰고 나머지는 남겨 두었다?
남량은 뭔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받고 일부러 몇 장을 더 넘겨 보았다.
촤라락-.
그리고 책장을 대략 중간 정도 넘기자, 각운 선사의 필체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 장을 우연히 발견했거나, 아니면 비상한 눈치로 알아냈을 그대에게 전한다.』
‘뭔가 다른 유언이 남아 있는 걸까?’
남량은 호기심이 일었다.
『내 평생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수련했고, 결국 이루어 냈다. 허나 평생을 바쳐 얻어 낸 심득(心得)이 실전된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해서, 나의 깨달음을 그대에게 전수하고자 하니, 부디 그대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정통 도가의 공력을 쌓은 자가 아니면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할 테니 유의하도록.』
남량은 깜짝 놀라며 미소를 지었다.
각운 선사의 심득이라! 이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300년 전, 가장 법력이 높았던 각운 선사의 심득이라면 분명 높은 수준의 경지에 있을 터였다.
어떤 깨달음이 들어 있을지, 생각만 해도 흥분되었다.
‘여의주를 얻지 못하니 이런 보물을 얻게 되는군.’
거기다 남량은 연화생공으로 정순한 도가 정통의 내공을 쌓았다. 자격은 충분했다.
‘마공을 익혔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겠지.’
그 뒤로는 각운 선사가 남긴 심득이 아주 자세하게 해석되어 있었다.
『후대의 계승자여. 그대가 나의 천양신경(天壤神經)을 전부 받아들인다면 만물을 관조(觀照)하고 창검이 너를 위험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며, 두 손으로 만 명의 상대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각운 선사가 남긴 천양신경은, 무공이 아닌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각각 상단전(上丹田). 중단전(中丹田). 하단전(下丹田)의 호흡법을 다루고 있으며, 그 묘리가 남량이 보기에도 매우 신통했다.
『요(要)는 이것이다. 상단전의 호흡으로 인당(印堂)을 열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통찰안(洞察眼)을 얻는다는 것이며, 중단전의 호흡으로 옥당(玉堂)을 열어 흔들리지 않는 마음처럼 단단한 갑옷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사자금강(使者金剛)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단전의 호흡을 통해 석문(石門)을 열어 정(精)을 기(氣)로 바꾸고, 그 기로 신(身)을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손상된 장기나 갈라진 피부를 원래 상태로 복원시킬 수 있으니 그것이 신유유합(神癒癒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글을 읽은 남량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격동했다.
‘이건…… 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것이구나.’
천양신경의 세 비급은 도가의 신선술(神仙術)을 연상케 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를 벗어난 힘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무공에 있어 통달했다고 자부하던 남량조차도 이 비급의 절반 이상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일반 무림인이 본다면 그저 허풍 정도로 취급하기 딱 좋을 것이다.
세상의 그 누가 만물을 꿰뚫는 눈을 가지고 기의 형성으로 갑옷을 만들며, 기를 이용한 치료술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건 어쩌면 여의주보다 더 값진 보물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었다.
멍하니 서책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남량의 입가에 저절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그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다!’
남량은 그 자리에서 천양신경의 해석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유언이 적힌 장만 찢어서 가지고 나머지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내가 아닌 누구도 이 힘을 익히게 놔둘 수 없지.’
여의주에 버금가는 강대한 힘. 세상에 나오게 되면 필시 혼란을 불러일으킬 물건이었다.
그러니 불태워 버리는 것이 나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익히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찬야와 운휘에게 말했다.
“가자. 어서 제갈경을 찾아 이곳을 나가자.”
“그래.”
바로 그때였다.
쿵, 쿠구구-.
갑자기 천장에서 들려오는 진동.
흙먼지가 부스스 떨어지고 바닥이 옅게 흔들렸다.
운휘와 찬야는 깜짝 놀라며 얼른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젠장, 또 함정이냐!”
“남 사제. 어서 움직이자!”
“잠깐만…….”
남량은 불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진동은 기관이 발동할 때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진동만 일어나지 왜 아무런 함정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 순간, 방금 전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진동이 방 전체에 울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일행은 동시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한 차례,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운 지진이 방을 뒤흔들었다.
“으, 으아악!”
“뭐야! 이번 함정도 압살관처럼 천장이라도 떨어지려는 거야?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찬야의 말에 남량은 불길한 예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남량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제갈경이 신전 입구의 기관을 해제한 건가?”
“어어?”
“아니야.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 기관을 제멋대로 해제할 리가…….”
운휘와 찬야는 부정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했던가.
쩌저적-!
석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기둥이 흔들리자, 불길한 예감은 곧 확신이 되었다.
남량이 이를 악물었다.
“지하미궁이 무너진다!”
운휘와 찬야는 입을 쩍 벌리며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제갈경-! 이 망할 여자야!”
***
바로 조금 전, 제갈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전 입구의 기관을 해제하고 있었다.
찬야는 그녀가 아무 기관이나 해제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기관술사들의 공통된 심리였다.
‘우와. 이 기관이 작동하는 원리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몇백 년 전의 기관술이 이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니! 신기해! 새로워! 짜릿해!’
방에 틀어박혀 기관만 연구하는 기술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모르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조심성이 없다기보단,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조심성을 이겨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갈경은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채 기관을 해제하는 데 몰두했다.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철컥-. 쿠궁!
그리고 마침내, 제갈경은 기관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육중한 소리와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됐다! 내가 해냈어!’
몇백 년 전 기술자를 이겼다는 승리의 기쁨도 잠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자 제갈경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꺄악!”
무릎을 바닥에 부딪힌 그녀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아파……. 이래서는 걸을 수가…….’
그때, 천장이 우르르 진동하며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
제갈경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어, 어떡해…….’
콰앙!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돌 조각 하나가 제갈경을 향해 떨어졌다.
피할 수 없다.
제갈경은 자신을 덮쳐 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망연히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나, 남량-!”
그 순간 번쩍, 하고 섬광이 일며 떨어지던 돌 조각이 두부처럼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콰앙! 쾅!
잘려 나간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며 한 차례 바람이 불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고 있던 제갈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흩날리는 백발과 함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나?”
남량은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 앉아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아.’
고개를 살짝 든 제갈경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남량을 응시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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