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지하미궁(地下迷宮)(2)
걸음을 멈춘 남량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나 기척으로 보았을 때, 고수는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고. 이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자?’
오밤중에 누굴까? 여자 도굴꾼인가?
남량은 일단 일행과 함께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지에 낀 야명주(夜明珠) 반지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정체는, 바로 제갈경이었다.
저 여자가 혼자 이곳에? 설마…….
‘실종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남량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혼자 누굴 구하겠다는 건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제갈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찬야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남 사제. 상황이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형님. 일단 기절시켜서 두고 갈까요?”
“그래. 운휘 말대로 그게 좋을 듯…….”
남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때였다.
“꺄악!”
“……?”
제갈경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남량 일행이 바람처럼 그곳으로 달려갔다.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기가 차는군.’
어둠을 뚫고 계단을 내려가던 남량은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야명주의 빛을 발견했다.
‘뭐야. 뭐가 저렇게 빨리 멀어져? 무언가에 끌려가는 건가? 아니야……. 갑자기 계단이 사라졌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자체가 함정일 줄이야.
남량은 오감을 극대화해 주변 지형을 파악했다.
그곳은 지하로 이어진 동굴의 입구였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남량은 망설임 없이 동굴 속으로 몸을 날리며 일행에게 말했다.
“내가 선두에 설 테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와.”
“알았어.”
“네, 형님!”
파파팟!
속도를 올리자 조금씩 거리가 좁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떨어지고 있는 제갈경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있군.’
남량은 제갈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발버둥 치던 제갈경의 손을 붙잡는 데 성공한 남량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깜짝 놀란 제갈경은 비명을 지르며 남량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꺄악! 귀신이다! 귀신!”
“귀신 아니야! 가만히 있어!”
“엄마야! 귀신이 말도 한다!”
“빌어먹을. 말이 안 통하네!”
퍼억!
남량은 하는 수 없이 수도로 제갈경의 뒷목을 쳤다. 제갈경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본 찬야가 경악한 투로 소리쳤다.
“남 사제! 여자애를 그렇게 험하게 다루면 어떡해!”
“시끄러.”
남량은 그녀를 들쳐 업고 계속해서 동굴을 내려갔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냉기가 뺨을 스쳤다.
한참을 떨어지고 나서야 바닥이 보였다. 남량은 내력으로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터억.
조심스레 바닥에 착지한 남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넓은 크기의 공동(空洞)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앞에는 유일하게 길이 놓여 있었다.
남량은 무릎을 굽혀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확인했다.
‘대략 여섯 명 정도……. 실종된 제갈세가의 사람들도 여섯 명이라고 했었지. 발자국이 길을 따라 이어진 것을 보니 저곳으로 들어간 모양이군.’
시체가 없다면 아직 살아 있을 확률이 있다.
그런데, 손에 들린 이 여인은 어떡할까.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저 위에 데려다 놓고 올 수도 없고…….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지. 데리고 갈 수밖에.’
남량은 뒤따라 내려온 운휘에게 제갈경을 업게 하고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제갈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정신을 차렸다.
“으음…….”
“정신이 드냐?”
운휘의 물음에 제갈경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쳤다.
“자, 잠깐만! 당신들이 왜 여기 있어요?”
“이 망할 여자가, 도와주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니야?”
운휘가 작게 투덜거렸다.
“깼으면 이만 내려서 걷지?”
“아, 미안해요.”
바닥에 내려온 제갈경은 얼얼한 뒷목을 문지르며 남량에게 칭얼거렸다.
“구해 준 건 고마운데, 너무 과격한 거 아니에요?”
남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칠까 하다가 참은 건데?”
“…….”
제갈경은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대답해 줘요. 왜 여기 있는 거죠?”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여의주를 노리고 있군요!”
제갈경이 경계하자, 남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그 여의주가 네 거야? 따지고 보면 용의 물건인데, 찾아서 용한테 돌려줄 것도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머쓱해진 제갈경이 헛기침을 하며 애체를 고쳐 썼다.
남량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데 참으로 용감하군. 아니, 무모하다 해야 하나?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이, 그것도 제갈세가의 차녀가 이런 위험천만한 곳으로 혼자 내려오다니. 제갈 공자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쩔 수 없어요. 오라버니는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실종된 사람들, 사실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제가 서둘러 조사를 하자고 보챘거든요. 멍청하게……. 위험을 감수할 능력도 없으면서…….”
“멍청한 걸 알아서 다행이군.”
“그래도……!”
울컥한 제갈경이 뭔가 반박하려 했으나, 이내 풀이 죽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능력도 없는데 감정만 앞세우고……. 한심해.”
“그래도 너는 운이 좋아.”
“네?”
제갈경이 고개를 들자, 남량이 말했다.
“마침 우리가 있으니까. 내려가는 길에 네 사람을 구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저, 정말인가요?”
“대신, 나가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을 구해 주는 대신, 여의주에 대한 건 눈감아 달라는 건가요?”
고민하던 제갈경은 이내 남량의 제안을 수락했다.
“알았어요. 입 다물게요.”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그리고 고마워요. 아까 날 구해 줘서. 그리고 혼자 두고 가지 않아 줘서.”
“사실 그럴까 고민했었어.”
제갈경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저도 나름 쓸모가 있어요. 어릴 적부터 기관에 관심을 가져서 그쪽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아마 저희 가문 내에서도 저보다 나은 기관사(機關士)를 찾아보기 힘들걸요?”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냉랭한 대꾸에 제갈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린 도사님. 얼굴은 예쁘게 생겼으면서 말은 왜 그렇게 차가워요?”
“…….”
“그리고, 아까부터 자연스럽게 반말하고 있는 거 알아요?”
남량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너 같은 핏덩이랑 이런 곳에서까지 존대하랴?”
제갈경도 똑같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요 도사님. 이래 봬도 내 나이가 벌써 스물둘이거든요? 그쪽은 약관도 채 안 된 소년이면서 무슨…….”
남량은 제갈경 쪽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핏덩이 맞네.”
“또! 자꾸 그러면 나도 애늙은이라고 불러 줄게요! 애늙은이 도사님!”
남량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시든지.”
제갈경은 기가 차서 주먹을 쥐며 발을 동동 굴렸다.
“허! 허어! 정말 얄미워 죽겠네! 내 동생이었으면 진즉에 두들겨 패 줬을 텐데! 얼굴만 곱상하게 생겨서 더 짜증 나!”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찬야가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남 사제……. 아무리 봐도 여자를 잘 알아. 아니면 저렇게 냉랭하게 대하는데 대화가 통할 리 없어.”
“내가 보기에는 그냥 귀찮아하는 것 같은데?”
운휘의 말에 찬야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내가 너 같은 애송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
운휘는 눈살을 찌푸리며 툭 쏘아붙였다.
“그럼 너는 애송이가 아니라서 맨날 지나가는 여자들 손잡고 고백하다 뺨이나 맞냐?”
“…….”
“철 좀 들어라, 얼간아. 에휴.”
운휘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 멍해진 찬야를 놔둔 채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운휘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찬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새끼를 그냥……. 어차피 지하 깊은 곳인데 확 묻어 버릴까?”
***
통로 끝을 빠져나오자 사방이 석벽으로 된 거대한 복도가 나왔다.
제갈경은 혹시나 있을 함정에 대비해 야명주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사방을 확인했다.
양쪽 석벽에는 각각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목제 인형들이 복도에 나열되어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일행이 복도를 중간쯤 지났을 때였다.
“잠깐.”
남량과 제갈경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찬야의 물음에 남량이 대답했다.
“발자국이 여기서 끊겼다.”
제갈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어요.”
바로 그때였다.
정면을 향해 야명주 불빛을 비추자,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인영(人影)이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제갈경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야!”
“이런…….”
급히 달려온 운휘와 찬야도 깜짝 놀라며 신음을 흘렸다.
그곳에는 제갈세가의 복장을 한 여섯 사내가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충격을 받은 제갈경은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어떡해, 나 때문에…… 흐윽.”
“쯧.”
찬야가 혀를 차며 제갈경을 감싸는 동안, 남량은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끔찍하군. 무엇에 당했길래…….’
얼굴이나 전신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칼이나 창이 아닌, 육중한 무게의 둔기(鈍器)로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대체 이들은 무슨 일을 당한 것일까?
드드드-!
그때, 바닥이 진동하며 석벽이 우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지?’
석벽에 나열된 목인형을 응시한 남량은, 표정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석벽에 붙어 있던 목인형들이…… 거리를 좁힌 채 바짝 다가와 있었다.
손을 내린 채 서 있던 자세도, 어느새 가슴께로 올린 채였다.
‘목인형……. 둔기…….’
남량의 시선이 목인형의 손으로 향했다.
손이 아니라 몽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커다란 철퇴에는, 아직 말라붙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이 방의 용도를 알아차린 남량이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아 들었다.
“운휘. 제갈경을 업어. 빠르게 이곳을 벗어난다.”
찬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설마? 정말 저것들이? 아니라고 해 줘라…….”
운휘는 제갈경을 업으려 했으나, 제갈경은 시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울어 댔다.
결국 남량이 제갈경의 뒤통수를 한 대 더 가격해 기절시킨 다음, 운휘의 등에 업히게 했다.
“가자!”
파팟!
일행이 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것과 동시에, 목인형들이 일제히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하미궁의 첫 번째 함정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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