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지하미궁(地下迷宮)(1)
“지하미궁?”
“네.”
남량의 물음에 제갈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지하미궁의 주인은 300년 전 대륙의 황제였다고 합니다.”
“엥? 엄청 오래된 이야기잖아. 믿어도 되는 거야?”
운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갈랑이 짧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아무튼, 기록에 따르면 그 시절 대륙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보다 못한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전설상의 응룡(鷹龍)이 세상에 내려와 자신의 여의주(如意珠)를 내주어 재해를 그치게 했고, 황제는 여의주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구조물과 기관으로 하여금 여의주의 존재를 꽁꽁 숨기고 보호하라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의주의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억누르기 위해 산중에 은거하던 이인(異人)을 데려와 지하미궁을 지키게 했다는군요.”
“제법 흥미롭군요.”
“여기서부터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제갈랑이 남량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데 한 달 전, 복룡산(伏龍山)에서 약초를 캐던 채삼꾼(심마니)이 절벽에서 발을 잘못 디뎌 떨어졌는데, 그곳에서 우연찮게 지하미궁으로 통하는 입구를 찾은 겁니다!”
제갈랑은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량이 물었다.
“지하미궁이 확실합니까?”
“복룡산은 저희 제갈세가의 영역이기도 하지요. 해서 본가는 기관에 능통한 사람들을 파견하여 살피게 했고, 곧 지하의 거대한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조물의 넓이가 어찌나 큰지, 아직도 조사 중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의심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제갈세가는 맹에 도움을 청했고, 여기 제갈 공자가 총괄을 맡았다네. 그래서 이렇게 주기적으로 찾아와 의논을 하고 있지.”
건옹의 말에 제갈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온갖 위험한 기관진식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인지라…….”
“흐음.”
남량은 가볍게 턱을 쓸었다.
지하미궁. 그리고 응룡의 여의주라…….
이 전설에 대해서는 남량도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마교의 교주였을 당시, 선대 교주들의 기록을 통해 가끔 접한 적이 있었다.
비와 폭풍을 다스리며 선계(仙界)와 인계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는 전설의 신수(神獸). 용.
그리고 용의 원천이 되는 여의주에 대해서도 말이다.
‘영물의 내단(內丹)은 단순한 영약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다. 하물며 용의 내단임에야!’
만약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응룡의 여의주가 지하미궁이라는 곳에 존재한다면.
그걸 손에 넣었을 때, 어떤 힘을 가지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구미가 당기는군.’
남량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괜찮다면 저희도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제갈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소협도 궁금하시지요? 정말 전설상의 지하미궁이라면 역사에 기록될 크나큰 발견이 아닐 수 없으니까요!”
제갈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무튼, 직접 보시면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이 나올 겁니다. 내일 복룡산으로 출발하니 그때 함께 가시지요.”
“네.”
남량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왔다.
“운휘, 찬야. 너희들은 같이 갈 거냐?”
“응. 지하미궁이라, 어쩐지 설레지 않아?”
“형님이 가시면 어디든 따라갑니다.”
남량은 고개를 돌려 유라와 위지혁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떡할 거냐?”
유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는 관심 없어. 그런 모험은 협행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데다가, 화산의 명예에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 단순한 유흥(遊興), 시간 낭비다.”
위지혁 또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흥! 응룡이라니, 한심해서 들어 줄 수가 없어. 그런 게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야? 제갈세가는 박식하기로 이름이 높은데 이제 보니 명성만 못하군. 실망이다.”
찬야와 운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둘도 참 한결같아…….”
“바윗덩이랑 찌질이…….”
남량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그건 그렇고, 내일 출발인데 가기 전에 셋이서 약주나 한잔할까?”
“고기! 난 고기를 잔뜩 먹을 테다.”
“물론 값은 내가 치르는 거지? 하하…….”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
다음 날, 남량 일행은 제갈랑의 마차를 타고 복룡산으로 이동했다.
제갈랑이라는 공자는 겉모습처럼 단정하고 예의가 바른 청년이었다. 제갈세가 출신답게 명석하고 지혜가 있어 대화가 제법 잘 통했다.
제갈랑이 대화를 주도한 덕분에, 복룡산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제갈랑은 제갈랑대로, 남량과의 대화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제갈랑은 어린 나이부터 총명함을 드러내 주변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총명함 때문에 주변 또래들과 친해지기 힘들었다.
제갈랑이 흥미를 가지는 주제는, 또래의 친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어른들의 사이에 어울렸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내심 또래와의 대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남량이라는 도사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해박한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마음을 나눌 친우가 없었던 제갈랑은 남량이라는 도사에게 금세 호감을 품게 되었다.
복룡산에 도착할 때쯤에는, 아예 남량의 곁에 찰싹 붙어서 하루 종일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소협. 강남 무림의 정세에 대해…….”
“소협. 황실과 무림의 관계에 어떤 생각이신지…….”
“소협. 진법을 어떻게 하면 다채롭게 활용할 수…….”
“소협. 부디 저에게 고견을 들려주십사…….”
남량은 숫제 귓가에서 환청이 들려올 지경이었다.
‘적당히 좀 해라. 애새끼야.’
오는 길 심심하지 않게 애쓴 건 알겠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남량은 이제 제갈랑의 얼굴만 봐도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쳐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소협.”
“왜, 뭐요.”
남량이 짜증을 내며 대꾸하자 제갈랑은 움찔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복룡산에 도착했으니 내리시라고…….”
“알겠습니다.”
쌀쌀맞은 남량의 태도에 제갈랑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찬야가 옆에서 경단을 두 손에 한가득 쥔 채 흡입하던 운휘에게 말했다.
“운휘야. 너도 들었지?”
“뭘?”
“남 사제랑 제갈 공자 말이야. 오는 길에 제갈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 못 들었냐?”
“……아니.”
그래. 항상 바쁘게 처먹느라 못 들었겠지.
찬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잘 봐. 둘이 항상 붙어 다니고, 마차도 같이 타고, 밥도 같이 먹잖아! 그래서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제갈 공자가 혹시 그쪽 취향 아니냐고 말이야!”
운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네. 정확히 말하면 제갈 공자가 항상 형님한테 붙어 대고, 형님한테 같이 마차를 타자고 권하고, 밥 같이 먹자고 들러붙는다고.”
“그, 그래? 그럼 쌍방이 아니라는 거지?”
“응.”
찬야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럼 제갈 공자의 짝사랑인가? 빌어먹을. 제갈 공자가 그쪽 취향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제갈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할 테고, 그럼 남 사제가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큰일이다! 남 사제가 위험해!”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찬야가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언제 온 것인지 남량이 손을 들어 올린 채 서 있었다.
남량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새끼가 분 냄새 며칠 못 맡더니 돌아 버렸나? 뭔 개소리를 이렇게 정성스레 지껄여?”
찬야는 부들거리며 남량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했다.
“남 사제…….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여자를 가까이해야 해…….”
“미치겠네. 운휘, 이 새끼 정신 차릴 때까지 적당히 밟아.”
“네, 형님! 감사합니다!”
퍽! 퍼퍼퍽! 빠악!
운휘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찬야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복룡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자, 대규모의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파견된 무사들이 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으며, 제갈세가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써 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문이 돌았는지 여기저기서 도굴꾼들이 몰려들더군요.”
주변을 돌아보던 남량의 눈에 한 가지가 띄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간이 의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인명 피해가 심각한가요?”
“아무래도 위험한 곳이다 보니…….”
그때, 멀리서 누군가 제갈랑을 불렀다.
“랑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제갈가의 옥빛 경장 차림을 한 젊은 아가씨가 달려오고 있었다.
제갈랑을 닮아 지적인 용모에 애체(靉靆:안경)를 낀 여인은, 어딘가 매우 다급해 보였다.
제갈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가문의 둘째, 경이입니다.”
제갈랑은 제갈세가의 차녀, 제갈경(諸葛瓊)에게 남량 일행을 소개했다.
“경아, 인사드려라. 이쪽은 화산의 일대제자이자 매화오절로 뽑힌 도사님들이시다. 이분이 남량 소협. 그리고 이분이…….”
“아, 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빠르게 끝마친 제갈경이 제갈랑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닥였다.
직후, 제갈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실종자가 나왔다고?”
“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큰일이군.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해야겠어.”
“오라버니. 제가 갈게요.”
제갈경의 말에, 제갈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건 안 된다. 너무 위험해!”
“기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예요. 그리고 실종된 사람들은 전부 제 휘하의 사람들이라고요! 그러니 제가 가야만 해요!”
“네 위치를 잊은 것이냐? 정신 차려라! 우리는 장차 가문을 이끌어 갈 사람들이다! 네 목숨이 그들의 목숨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제갈랑의 호통에 제갈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말없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제갈랑은 한숨을 내쉬며 남량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
“지하미궁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남량 일행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날 밤, 남량 일행은 제갈랑이 내준 거처에 모였다.
“그러니까…….”
남량은 제갈랑으로부터 넘겨받은 지하미궁의 지도를 탁상에 펼치며 말했다.
“지금까지 조사가 끝난 부분은 지하 2층. 이곳까지인가.”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실종된 곳은 3층으로 내려가는 부분. 이곳이고.”
찬야가 한 부분을 짚자, 남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려가려면 이곳으로 가야 해.”
“진짜 몰래 내려갈 생각이야?”
“그럼 이 먼 곳까지 구경만 하려고 왔어?”
“당연히 그건 아니지. 흐흐.”
찬야가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해가 뜨기 전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하자.”
“그래.”
남량 일행은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벽곡단과 금창약, 독에 당했을 때를 대비해 피독주(避毒珠)와 붕대를 챙겨서 지하미궁으로 향했다.
밤이라 최소한의 보초를 빼고 다들 거처로 돌아간 덕에, 몰래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조금 긴장되는데.”
운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매우 크고 넓었으며,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과연 이 아래 어떤 위험천만한 장치들이 있을지, 미묘하게 긴장되면서 흥분되었다.
‘모험이라. 오랜만에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군.’
“가자.”
남량 일행이 막 계단 아래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화산검황
비류(沸流) 신무협 장편소설
(沸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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