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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린 문틈으로 (3/20)
  • 2. 열린 문틈으로

    류드밀라는 고맙고 또 걱정되어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하지만… 마법을 쓰면 힘이 드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보여 드릴 마법은 간단해서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 안에 단단히 가둔다. 그리고 그녀에게 두르지 않은 쪽 팔을 우아하게 뻗는다.

    그의 손에서 파란 기운이 넘실대며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빛줄기는 계속 뿜어져 나오다 천장과 만나 산산이 부서져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놀라서 몸을 움츠리지만,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은 빛 송이는 깜박이다 이내 사라진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곤 빛줄기가 부서져 눈처럼 내리는 진귀한 광경을 멍하니 감상한다.

    “예뻐요.”

    그녀가 속삭인다. 그는 살짝 웃고는 다시 집중한다. 빛줄기가 일렁이더니 이번에는 공중에 동물의 형상들이 만들어진다. 푸른색 사슴과 토끼와 다람쥐가 드넓은 초원을 마음껏 뛰노는 모습이다.

    한 번도 황궁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어 그림책으로만 동물을 봐 왔던 그녀는 너무나 신기해 입을 다무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풍경은 또 바뀌어 이번에는 독수리가 창공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산맥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풍경화를 보는 듯 세세하게 묘사된 풍경들이 그녀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호수, 사과나무가 자라는 언덕, 풀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초원, 여우가 굴을 파는 사막, 파도가 모래에 신기한 문양을 남기는 해변.

    그녀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제국의 구석구석이 모두 눈앞에 나타난다.

    “또 보고 싶으신 것이 있나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즐거이 입을 뗀다.

    “강, 강을 보고 싶어요.”

    그녀는 예전부터, 책에서 강 그림을 보고 나서부터 그곳에 가 보고 싶어 했다. 은빛 잔물결이 일고 새들이 노니는 강. 강은 그녀 안에서 뭔가를 불러일으켰다. 산꼭대기에서 솟아난 샘물이 어느새 커다란 물줄기로 이뤄져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집도, 목적도, 정체성도 없는 그녀에게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은 늘 신기했다. 강물은 바다로 가서 무얼 할까. 바다와 섞이면 무엇이 될까. 강물은 왜 항상 바다로 흐르는 것일까.

    그런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 있느라 그녀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가 겨우 잡생각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너무 늦은 뒤이다.

    “이곳의 강은 죽었어요.”

    그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한다. 류드밀라는 그의 얼굴을 마침내 보고는 순식간에 겁에 질린다. 그러나 그는 그 표정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정 보고 싶으시다면 보여 드리죠.”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다시 한번 일렁이더니 이내 거대한 장벽으로 가로막힌 물길을 보여 준다. 개미 같은 인간들이 장벽 위를 분주히 오가면서 장벽을 더 높이 쌓는다. 막혀 버린 강물엔 더러운 녹조가 끼어 있고 쓰레기들이 떠다닌다. 마치 눈앞에 처참한 모습의 강을 둔 듯 보여 류드밀라가 눈을 키운다.

    강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바다로 가지 못하고 인간들 앞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 강의 소리 없는 절규가.

    금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녀는 빨리 그가 빛을 없애길 기다리지만, 그는 오랫동안 기억해 두라는 듯 그 잔인한 광경을 계속 띄워 둔다.

    “왜, 왜 저렇게 한 건가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는 겁니다. 저래 봤자 도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요.”

    정중하지만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투. 그의 냉혹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다음 질문들을 막는다.

    누가 저렇게 만들었나요? 누가 저렇게 만들도록 허락해 줬나요? 루슬란 님이 막을 수는 없었나요?

    그녀는 다만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게 내버려 둔다. 그 자신은 죽어 버린 강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그가 잃은 예전의 삶을, 그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책임을, 그가 지켜 내지 못했던 수많은 생명을 떠올리며.

    상념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는다.

    “미안해요. 또 내가 심통을 부렸죠.”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여전히 목이 멘 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잊을 수가 없다. 그 광경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래서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도 그의 마음을 한 톨이나마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보여 준 눈물에 마음이 조금 풀린 그가 고개를 들고 억지로 희미한 미소를 내비친다.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해요.”

    “좋아요, 루슬란 님.”

    아직은 그가 가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녀는 그 미소에 약간은 안심한다. 그는 그녀가 안심하자 적어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문을 연다.

    “마법에 대해서 무엇을 아나요?”

    그녀는 주저하면서도 솔직히 털어놓는다.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저 같은 껍데기에겐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요.”

    류드밀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황궁에서 살아왔다. 제국에서 행해지는 마법의 심장부인 황궁에서. 그럼에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새삼스레 서글퍼진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은 듯 루슬란이 한마디를 톡 던진다.

    “그럼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시겠네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검지로 톡 건드린다. 그러자 은발이 끝에서부터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검지가 닿는 곳마다 새하얀 꽃이 파란 머리 위에 피어나기 시작한다.

    눈물이 어느새 마른 눈을 그녀는 끔벅거린다. 원래 거의 발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한 타래를 붙잡고 믿기지 않는 듯 그와 번갈아 쳐다본다.

    “잘 어울리시네요.”

    그가 공중에서 거울을 만들어 내 그녀 앞에 대 준다. 거울을 본 그녀는 놀라서 작은 탄성을 내지른다. 파란 머리칼을 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여 잘 어울린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카락 위에 피어난 꽃들이 예쁜 것은 사실이다.

    “자, 이제 그대의 검지로 해 봐요.”

    그는 몸을 기울여 제 머리카락을 흘러내리게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이 배를 간지럽혔던 기억이 떠올라 그녀는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전 마법을 못 하는데…….”

    “내가 할 수 있게 만들어 줄게요. 내 말대로 해 봐요.”

    그녀는 검지를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건드린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새파랗게 변한다. 놀란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요정들의 웃음소리처럼 아주 조그마한 킥킥거리는 소리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감미로운 소리로 들린다. 루슬란이 마주 웃어 준다.

    그의 웃음소리에 그녀는 금방 겁먹고 움츠러든다. 하지만 그가 잘난 척하는 시늉을 하며 머리를 뒤로 찰랑이자 다시 웃을 수밖에 없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네, 잘 어울려요.”

    섬섬옥수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그녀가 대답한다.

    “다른 색도 보고 싶으시면 다시 해 봐요.”

    조심스레 뻗어진 손을 그가 잠시 쥔다.

    “그 전에, 마음속으로 보고 싶은 색깔을 떠올리시는 거 잊지 말고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은색을 생각하고 나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톡 건드린다. 그러자 그의 새파란 머리칼이 은색으로 피어난다.

    물론 그녀가 건드릴 때마다 마법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꾼다는 것을 알지만, 류드밀라는 스스로 마법사가 된 듯한 기분에 잔뜩 들뜨게 된다.

    그는 알까. 껍데기로 살아오며 마법을 향한 그녀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비교당하고, 무시당하고, 깎아내려지며 얼마나 마법을 하고팠는지도.

    행복한 기분도 잠시, 거짓으로 마법을 하고 나자 한과 서러움이 밀려온다.

    평생을 껍데기라고 무시당하며 살아왔다. 정확히는 순수 혈통임에도 마법을 못 한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버림받아 어미와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탓할 줄 모른다.

    대신 모든 불행의 원인은 그녀의 탓으로 돌린다. 마법을 할 수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법 능력을 타고났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미워지고 비참해진다.

    그녀는 다시 머리카락 색을 바꾸려고 뻗던 손을 도로 거두고 제 몸을 감싼다. 그리고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어느새 원래의 검은 머리로 돌아온 그는 다정하게 팔을 벌리고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흐느낀다. 어깨에 걸쳤던 로브가 그러느라 흘러내려 몸이 드러나는데도 개의치 않고.

    조금 정신이 돌아온 후에는 이 갑작스러운 울음의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흐으, 저는, 정말이지…….”

    “쉬이- 더 울어요. 울고 나서 얘기해 줘도 괜찮으니까 마음껏 우세요.”

    그 다정한 목소리가 고맙고도 고마워 그녀는 그 후로 오랫동안 운다.

    마침내 울음을 그친 그녀가 그를 조심스레 올려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눈길을 내린다. 흘깃 보인 그 퉁퉁 부은 눈이 안쓰러워진 그는 그녀의 눈가를 매만져 준다.

    “죄송해요…… 맨날 울기만 해서.”

    “괜찮아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시어요.”

    또 그녀를 어떻게 기쁘게 해 줄까 그는 생각에 잠긴다. 곧이어 좋은 생각이 난 그가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눈 감고 하나부터 열까지 세 봐요.”

    그녀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고 혹시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까, 손으로 가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눈을 감은 후 보이는 어둠이 약간 일렁이더니 갑자기 싱그러운 풀 내음이 어디선가 풍겨 오기 시작한다.

    “……여덟, 아홉, 열.”

    손을 내리고 눈을 뜬 그녀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곁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어느새 그들은 언덕 꼭대기 나무 아래에 와 있다.

    “여, 여기가 어디인가요?”

    “제 침실 안이죠. 다만 그대의 감각을 속인 것뿐이랍니다.”

    류드밀라는 손을 뻗어 풀을 만져 보고는 흠칫 놀란다. 정말로 진짜 같아 밖에 나와 있는 것만 같다. 한 번도 황궁 밖으로 나가 보지 못했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언덕을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루슬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뛰어 보실래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서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그러곤 다시 한번 허락을 구하듯이 그를 본다.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류드밀라는 옆에 있던 로브를 걸치고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간다.

    맨발에 와 닿는 풀의 감촉이 부드럽고 간질거린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그 모든 감각이 그녀에겐 낯설고 행복해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뒤를 따라온 그는 그녀가 빙글빙글 돌다가 비틀거리자 서둘러 다가가 붙잡아 준다.

    “그렇게 좋으세요?”

    “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선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거나 떠는 모습보단 훨씬 보기 좋다. 그는 언젠가 그녀를 데리고 진짜 언덕에 가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실컷 뛰놀다가 지친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다시 언덕을 오른다. 언덕 꼭대기에 나란히 누운 그들은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창밖으로 조각난 하늘만을 봐 왔던 그녀가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행복해한다. 그의 마법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 하나를 내보이고 그녀는 감탄한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별안간 그가 벌떡 일어난다.

    “왜 그러세요?”

    “황제가 또 나를 찾고 있군요.”

    약간 지친 목소리이다. 마법을 쓰면 힘들다는 그의 말을 언뜻 떠올린 그녀는 갑자기 미안해했지만, 그가 곧이어 안심시키는 미소를 보인다.

    “마법 때문에 힘든 건 아니에요. 다만 황제가 부르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지.”

    주변이 일렁이더니 다시 눈앞에 침실이 펼쳐진다.

    “다녀오세요.”

    그녀는 황제가 맡긴 더러운 일을 하면서도 그가 되뇔 한마디를 고운 목소리로 말한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루슬란 님.”

    어두운 침실 안에 홀로 남은 류드밀라는 침대에 앉아 몸을 옹송그린다. 산들바람이 불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언덕과는 달리 이곳은 한기가 맴돈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제 발끝만 내려다보던 그녀는 침실에 드리운 커튼을 젖혀 보기로 결심한다.

    막상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내려서자 함부로 물건을 건드려도 되는지 겁이 난다. 그러나 이제 추위는 못 견디게 심해지고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커튼을 방 반대편 끝까지 연다.

    햇살이 안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황궁의 가장 꼭대기 층이니 채광이 좋은 것이 당연하다. 늘 다른 건물에 가려져 어두컴컴하던 껍데기들의 숙소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햇볕이 주는 온기보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조각조각 퍼즐 맞추듯이 끼워 맞춘 색유리 너머로 수도의 전경이 보인다.

    그녀는 넋을 잃고 순백의 도시를 바라본다. 새하얗다는 것 외에는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른 아기자기한 건물들.

    아래에서 봤다면 분명 웅장해 보였겠지만 위에서 보니 장난감처럼 느껴진다. 하얀 돌이 깔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를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그녀의 눈에 닿는 모든 건물과 사람을 다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류드밀라는 그 광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가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밖은 어떤 곳일까. 전부터 오랫동안 품어 왔던 궁금증이라 설렘은 묵은 슬픔과 함께 다가온다.

    한참이나 한낮의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별안간 심한 피로를 느낀다. 언덕에서 뛰놀고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을 그녀의 가냘픈 몸이 견디지 못한 까닭이다.

    여전히 커튼을 열어 놓은 채로 그녀는 침대에 다시 앉는다. 눈을 끔벅이며 나른하게 햇살을 받고 있자니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긴장이 풀려 아예 이불을 덮고 누운 그녀에게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생각은 자연스레 무시무시한 마법사에게로 흘러간다.

    류드밀라는 아직도 마법사 루슬란이 왜 그녀에게만 다정한지 이유를 모른다. 그 이유를 모르기에 언젠가 그로 하여금 그녀에게 다정하게 굴도록 하는 면모가 사라져 그의 특별 대우가 끝날까 두렵다.

    그녀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런 면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더 이상 그의 따스한 눈길과 다정한 손길을 받지 못한다면 그녀는 어떻게 될까? 쫓겨나서 죽게 되면 어떡하지?

    그 질문들이 바로 그녀가 햇살 아래에서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이다. 긴장이 풀렸음에도 다시금 겁에 질려 모로 누워 제 몸을 감싸 안는 이유이다.

    눈을 감자 마법사의 다정한 은빛 눈동자가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눈길을 처음 받아 봤다. 심지어 거울 속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보진 않았는데.

    혼자 얼굴이 약간 붉어진 그녀는 이불을 파고들어 그의 몸짓 하나하나를 기억해 보려고 노력한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토닥이던 손길. 그녀의 배 위에서 살랑거리던 머리카락. 새처럼 갸웃하던 고개.

    그리고 그녀 안으로 들어왔던 손가락도. 햇볕으로 달궈진 이불 안에서 그녀는 몸을 꼼지락거린다. 그 기분은 정말 황홀했다. 무섭고 낯설긴 했지만 듣던 대로 아프지도 않았고 뭔가 찌르르하는 느낌이 좋았다.

    한 번 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 나른하고 멍한 상태에서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이불을 들춘다. 그리고 손가락을 제 아래로 가져간다.

    그가 만져 줄 때에는 만져지는 느낌만 있었는데 스스로 만지니 제 아래의 감촉이 여실히 느껴진다. 뭘 하는 건지 자각도 없이 그녀는 꽃잎 사이를 훑다가 안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루슬란 님께서는 여기 안을 꾹꾹 눌러 줬던 것 같은데. 그리고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기도 했었지. 그가 해 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따라 해 보지만 짧고 그의 것보다 훨씬 가는 손가락은 별다른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래는 착실하게 젖어 들고 그녀는 얕은 숨을 내쉰다. 어느새 다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활짝 벌려져 있고 뺨은 발갛게 들뜬다. 그녀가 눈을 감고 다리를 더 벌리려 하는데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 귀여운 짓도 할 줄 아시면 저보고 어찌하라는 겁니까.”

    눈을 뜨니 침대 앞에 서 있는 마법사가 보인다. 기절할 듯 놀란 그녀는 손가락을 안에서 빼내고 이불을 덮어 제 몸을 가린다. 그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보니 볼 건 이미 다 본 모양이다.

    “루, 루슬란 님…….”

    당황하여 그녀가 울먹인다. 그는 황제를 만나고 와 격식을 갖춘 옷차림에서 손짓 한 번으로 느슨한 평소의 로브 차림으로 돌아온다. 옷을 바꾼 그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린다.

    “내가 없는 시간이 그리도 외로웠나요? 참지 못하고 스스로 아래를 만질 만큼?”

    “흑, 그게 아니라, 흐윽, 죄송해요…….”

    그제야 수치심이 몰려와 류드밀라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저 그에게 턱을 잡힌 채 굵은 눈물방울만 떨굴 뿐이다. 한편 루슬란은 그런 그녀가 어여뻐 어쩔 줄을 모르는 마음을 다잡는다.

    “또, 또 우시는군요. 울면 제가 가엽게 여길 줄 아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차마 그 은빛 눈동자에 냉기가 서려 있을까 봐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린다. 턱을 쥔 손길이 우악스러워진다.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나의 껍데기 님.”

    하는 수 없이 감았던 눈을 뜬 그녀는 한없이 따스한, 장난기 어린 눈과 마주한다. 그가 화나지 않았음을 깨닫자 안도감에 다시 울음이 터져 나온다.

    턱을 쥔 손을 거두고 그녀 곁에 앉은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나는 화나지 않았어요.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 울음 그치셔요.”

    “그래도 죄송해요……. 루슬란 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래요. 그건 나도 약간 실망이었어요.”

    그녀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자 그가 픽 웃는다.

    “농이에요, 농. 그대가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이유를 들려줄게요.”

    “제가 이런 이유가 따로 있나요……?”

    풀이 죽은 그녀는 울지는 않지만 부끄러워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한다. 반대로 그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럼요. 그대같이 순진한 아이도 넘어가게 하는 마법이 이 방의 색유리에 걸려 있답니다. 이 색유리를 통과한 햇살을 받게 되면 누구라도 색욕이 끓어넘치게 되어요.”

    “왜 그런 주문을 걸어 놨어요?”

    “내 씨를 남기게 하고 싶은 황제의 명이죠. 내가 주문을 풀어 놔도 다음 날이면 마녀들에 의해 다시 걸려 있으니 나도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어요. 대신 커튼으로 가려 놓는 건 허락해 주더군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그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운 곳을 세우겠다는, 반역죄에 해당하는 그의 말.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했던 이유가 서서히 이해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도 씨를 남겨야 할 종마 취급하는 곳에서 그가 뭘 할 수 있을까.

    “왜 루슬란 님은 이그나티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아주 오래전에, 내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었어요. 난 다만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죠.”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그는 구태여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는다. 대신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색유리를 통과한 햇볕이 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새끼 사슴의 솜털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자 그녀는 힉, 소리를 내며 놀라서 움츠러든다. 그녀가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게 뒷목을 잡은 손길은 서늘하다. 대신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혀는 한없이 따스하고 말캉거려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키스는 다른 것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여 짧게 끝난다. 그녀의 몸을 두른 이불을 다소 거칠게 벗겨 낸 그가 그녀를 눕힌다.

    “그대가 손가락으로만은 부족한 모양이니 오늘은 다른 것을 넣어 볼래요?”

    그 말에 공포에 질려 울음이 터지려는 그녀이다. 하지만 공포는 왔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레 옅어지고 대신 묘한 기대감이 그 자리를 채운다. 그녀는 그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조그맣게 대꾸한다.

    “네, 루슬란 님.”

    “조금 아플 수도 있어요.”

    미안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바지를 살짝 내리자 거대한 그의 것이 보인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린다. 저번에 입으로 물고 빨 때도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빨아도 입이 뻐근했는데 그걸 안에 넣으면 또 얼마나 아플까.

    그는 일단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하자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아프고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에 조용해진다. 우는 사람을 범하는 취미는 없다는 그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서이다.

    루슬란은 자제력을 잃기 직전이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안을 탐한다.

    구멍은 손가락을 넣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조인다. 그리고 놀랄 만큼 뜨겁고 부드럽다. 그는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아직은, 아직은 그녀에게 그의 소리를 들려줄 수는 없다.

    그녀는 커다란 것이 안을 꽉 채우는 느낌에 약간은 행복해진다. 그러나 곧 그가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행복감은 금세 공포로 변한다.

    너무 버겁다. 그녀는 울음을 참기 위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그의 눈에는 그 모습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아아, 흐으…….”

    조그마한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가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의 자제력이 끊어진다. 그가 그녀의 안을 세게 쳐올린 것도 아마 그즈음일 것이다.

    아래에서 뭐가 투둑 하고 끊어지는 느낌에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아프다.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다. 좁은 안을 마구 헤집는 그것을 멈추고 싶다. 그는 그녀의 비명에도 상관하지 않고 허리 짓을 계속한다.

    퍽, 하고 그가 안을 치댈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 아파하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아래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작은 쾌락이 눈을 뜬다.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뻐근하기도 한 그런 느낌이 아래에서 느껴진다. 그 느낌은 그녀의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고 입에서는 야한 교성이 나오게 만든다.

    그녀는 제가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쾌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거세지고 그녀의 온몸을 휘감는다. 이제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저릿저릿한 느낌이 든다.

    “흐윽, 윽, 아흑…….”

    힘없이 흔들리던 뽀얀 몸에 분홍빛이 돌기 시작한다. 흥분해서 열이 오른 것이다. 그런 몸의 변화가 두려워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팔을 뻗는다. 그에게 팔을 두르고 매달려 어여쁘게 울기 시작한다.

    “아응! 읏! 흐읏!”

    그는 그럴수록 더 거칠게 그녀의 안을 쳐올린다.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한마디 달래 주는 말도 없이 무섭게 구는 그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 낯섦은 곧 더한 쾌락으로 이어지고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도 좋아하게 된다.

    저번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따뜻한 씨물을 그녀의 안에 토해 낸다. 그와 동시에 그녀도 절정에 다다라 몸을 바르르 떤다.

    루슬란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은색 머리칼을 넘겨주며 입가를 휜다.

    “좋으셨나요? 얼굴이 복숭앗빛이에요, 나의 껍데기 님.”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류드밀라는 혼절하고 만다.

    기절한 류드밀라를 바라본 루슬란은 허, 하고 작은 숨을 뱉어 낸다. 이리도 여려서야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으려나.

    혹시 몰라 그녀의 아래를 훑은 손에는 선혈이 묻어난다. 그는 안타깝고 슬픈 마음에 잠시 핏자국을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침실 밖으로 나선다.

    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마자 상급 마녀를 소환한다. 고개를 낮게 조아린 마녀에게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묻는다.

    “네가 보낸 아이가 첫날밤을 치렀다. 피가 나는데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느냐.”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굳이 너를 밖에서 부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면 그러지 않았겠지.”

    마법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상급 마녀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사죄의 뜻을 전하곤 방법을 설명한다.

    “피가 멎을 때까지 미지근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 연고를 발라 주시면 됩니다.”

    마녀가 품에서 연고를 꺼내 공손히 건넨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절대로 마법을 쓰시면 안 됩니다. 피가 계속 흐른다면 이 연고를 바르기 전에 이 약초를 발라 주십시오.”

    껍데기 여인의 몸에 마법을 직접적으로 쓰면 마법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당부이다. 그녀를 인간이 아닌 씨암탉 취급하는 말에 그의 기분이 나빠진다.

    마녀에게서 식물 으깬 것도 받아 든 루슬란은 고개를 짧게 까닥하고 돌아선다. 이번에는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바로 침실에 딸린 욕실로 간 그가 미적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신다.

    마녀의 당부대로 껍데기 여인의 몸과 관련된 일에는 최대한 마법을 쓰면 안 되기에 모든 일을 다 직접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으로 그녀를 빨리 치료해 주고 싶지만 그런다면 쓸모가 없어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는 두렵다.

    다시 침대에 나타난 그는 그녀의 아래를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 낸다. 피가 멎자 손가락으로 그의 씨물도 긁어낸다.

    잠결에 그녀가 으음, 하는 소리를 흘리며 뒤척이자 다정한 눈길이 잠든 얼굴을 향했다가 다시 내려온다. 연고를 마저 바른 그는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덮어 주고 옆에 앉는다.

    곤히 잠든 모습도 어쩜 이리도 어여쁠까. 둥글고 흰 이마와 반짝거리는 은빛 속눈썹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는 손짓을 해서 커튼을 쳐 그녀가 더 편히 잠잘 수 있게 해 준다.

    깨어나면 또 어떤 달콤한 말을 속살거려 줄까 고민도 해 본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던 모습, 울면서 제게 매달리던 모습이 떠올라 그러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다. 다만 잠깐 눈을 뜨고 순한 눈망울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 다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다.

    한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속삭인다.

    “몸이, 몸이 욱신거리고 아파요, 루슬란 님.”

    “몸살이 왔군요.”

    그는 허망하다는 듯이 대꾸하지만, 그녀는 이미 잠이 든 후이다. 지쳐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잠만 자는 그녀가 안타까워 손을 뻗어 그저 토닥여 줄 뿐이다.

    깊이 잠이 들자 그는 혹시 그녀를 깨울세라, 밖에 나가서 상급 마녀를 부른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본 마녀가 예상했다는 듯이 조용히 말한다.

    “몸살에 효능이 있는 차를 달여 오겠습니다. 혹 열이 난다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열이 조금씩 오르고 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오르면 내가 마법을 쓰겠어.”

    “껍데기 여인에게 마법을 직접적으로 쓰면…….”

    “알고 있다.”

    상급 마녀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그는 불쾌함을 얼굴에 드러낸다. 마녀는 곧바로 굽히고 들어간다.

    “죄송합니다, 성하.”

    “가 보거라.”

    고개를 까닥한 그가 공기 중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침실로 되돌아간 것임을 아는 마녀는 차를 달이러 이동한다.

    류드밀라가 잠깐 깨어날 때 마녀가 달여 온 차를 먹이고 다시 잠들기를 봐주는 것밖에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열이 오르면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고, 몸이 아프다고 훌쩍일 때면 달래 주는 수밖에.

    ***

    류드밀라는 악몽을 꾼다. 또다시 캄캄한 숲속을 끝도 없이 달리는 꿈이다. 괴물들에게 쫓기면서. 이번에 괴물들은 루슬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를 한마디 말도 없이 거칠게 범하던 마법사. 그의 지독한 집착이 어린 눈길을 하고 괴물들은 그녀를 뒤쫓는다.

    그러나 눈을 뜨면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걱정 어린 다정한 얼굴이다. 잠은 잘 주무셨는지, 몸은 좀 어떠신지 물어 오는 목소리이다. 그래서 그녀는 악몽을 꾸든 말든 안심하고 다시 잠들 수 있다.

    이틀을 꼬박 그렇게 잠으로만 보내자 그녀의 몸도 조금씩 나아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깨어 있는 시간도 길어진다.

    “루슬란 님.”

    한번은 깨어난 그녀가 조그맣게 그를 부른다.

    “왜 그러시나요?”

    “차 말고 그냥 물을 마셔도 될까요? 시원한 물을 먹고 싶어요.”

    “그럼요.”

    시녀를 불러 물을 가져오게 한 그는 손수 그녀에게 물을 먹여 준다. 꼴깍꼴깍 잘 받아먹은 그녀는 그제야 갈증이 풀린 듯 배시시 웃어 보인다.

    “감사해요. 정말 목이 말랐거든요.”

    그 웃음에 정신이 아찔해진 그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주 웃어 보인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겨우 마음을 다잡은 그가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 준다.

    “저번 일은 미안했어요. 내가 자제력을 잃어 그대의 몸을 상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요.”

    “마음 쓰지 마세요.”

    그 위대한 마법사가 고작 자기 때문에 마음이 안 좋다는 말에 부끄러워진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한다.

    “어떻게 내가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대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쉰다.

    “누구보다 귀하게 여겨 주려고 그대를 품었는데 도리어 다치게 하는 꼴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아플 만도 하지 않나요?”

    “그러네요, 루슬란 님.”

    얌전히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앙증맞은 코를 손가락으로 쓸어 준다.

    “피곤하시면 다시 주무세요, 나의 껍데기 님.”

    그의 다감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생각한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전에는 어렴풋이만 느껴 오던 감정을 이제 그녀는 알게 된다.

    안정감. 그와 함께 있을 때 절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 여겼던 마지막 감정. 그러나 지금 그의 품 안에서 그녀는 한없이 안전함을 느낀다.

    그 변화가 신기해서 그녀는 잠시 잠들지 못하고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곧 콧잔등을 쓸어 주는 손길에 잠이 밀려온다.

    다시 깨어났을 때도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곁을 지키고 있다. 마법사는 잘 필요도 없는 것인지 책을 읽고 있다가 기척이 느껴지자 언제나 그렇듯이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본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시나요?”

    그가 말없이 책 표지를 보여 주자 그녀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힌다.

    “저, 저는 글을 읽을 줄 몰라요…….”

    아름다운 눈썹 하나가 치켜 올라가 진다. 그 반응에 더 창피함을 느낀 그녀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그는 책을 탁자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쥔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되죠.”

    그래서 루슬란은 류드밀라의 몸이 나을 때까지 방 안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치기로 했다. 어려워하는 것을 잘 달래고 구슬리고, 잘한다 싶으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면서.

    누워서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보던 그녀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드디어 침대를 벗어난다.

    여전히 침실은 벗어나지 못해 방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깃털 펜을 잡아 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쓴 날, 그녀는 기뻐서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그리고 너무 행복한 나머지 옆에 앉아 지켜보던 루슬란을 끌어안는다.

    “감사해요, 루슬란 님.”

    그녀가 속삭인다. 매일 같이 안아 주기만 했지, 그녀가 먼저 안은 적은 없었는데. 그는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준다.

    “천만에요.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인걸요.”

    여전히 그가 갑작스레 움직이면 흠칫 놀라지만 그녀는 점점 더 그에게 마음을 연다. 여전히 그가 무섭지만, 이제는 안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만 다정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다정함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을.

    “루슬란 님 이름도 써 볼게요.”

    신이 난 그녀가 다시 펜을 쥔다.

    “그래 봐요.”

    뜻 모를 미소를 머금고 그는 그녀가 조심스레 꼬불거리는 글씨를 쓰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가 이름을 다 쓰자 갑자기 글자에서 물이 퐁퐁 솟아나더니 종이는 멀쩡한 채 글씨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 이게 어떻게…….”

    “신의 이름을 쓰면 그리되곤 하지요.”

    그녀가 떨군 펜을 다시 펜 꽂이에 세워 두며 그가 무심하게 말한다.

    “이름이란 본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종이에 기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에요.”

    “신의 이름, 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류드밀라가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묻는다.

    “네, 맞아요. 제가 가진 이름은 강을 다스리는 푸른 사자를 뜻한답니다.”

    약간 비튼 진실을 말하는 그의 눈에 쓸쓸함이 맴돈다. 그가 신의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이 곧 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녀에게는 절대 말해 줄 수 없다.

    얌전히 ‘그렇군요’ 따위의 대답을 하기에 그녀는 너무 놀란 상태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그는 씁쓸한 기억에서 빠져나와 다시 웃을 수 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나의 껍데기 님. 앞으로 나와 함께 그대가 겪게 될 일에 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겨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가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니, 루슬란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신 것 같아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런 말을 내는 그녀가 귀여워 그는 더 환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앞으로 더 많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텐데 그녀에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사실이 있다.

    그는 그답지 않게 미련하게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되뇐다. 조금만 더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조금만 더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다. 사실을 알게 되면 두려움으로 바뀔 그 미소를.

    “그런가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한다. 그녀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럼 그런 것이지요.”

    그가 아예 그녀를 번쩍 들어 무릎에 앉히곤 허리를 감싸 안는다.

    “다시 글씨를 써 볼래요? 연습을 많이 해야 늘 거예요.”

    허리를 감싼 손길은 서늘하다. 그 냉기가 이제는 익숙해진 겨울 냄새와 함께 다가온다. 그녀는 꼼지락거리다 그를 돌아본다.

    “이대로 말인가요?”

    루슬란의 단단한 허벅지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이 신경 쓰여 그녀는 이렇게 되묻는다.

    “불편하신가요?”

    “아뇨, 아뇨. 불편하지 않아요.”

    곧이어 글씨 쓰는 데 집중하느라 그녀는 그의 무릎에 올라와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고 만다. 겨울, 나비, 꽃, 어여쁜 것들의 이름을 쓰던 그녀가 뜻밖의 단어를 쓴다.

    ‘사랑’

    그 말을 쓸 생각이 아니었는지 작은 웃음을 터트리는 루슬란을 그녀는 당황하여 쳐다본다.

    “사람이, 이 글자가 아닌가요?”

    “그대가 쓴 것은 사랑이랍니다.”

    “아.”

    새빨개진 귀를 살짝 깨물어 본다. 마찬가지로 붉어진 뺨을 부드럽게 쓸어도 본다. 그래도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표현할 길이 없으면 그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별안간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일어나게 한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응시하는 그녀에게 그가 환히 웃어 보인다.

    “우리, 도서관에 가 보지 않을래요?”

    루슬란의 웃음에 넋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다 류드밀라는 겨우 정신을 차린다. 도서관. 그녀가 가기엔 뭔가 신비스럽고 닫혀 있는, 학자들만의 공간 같다.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는 위대한 마법사이니 책도 수없이 많이 읽었을 터. 그녀에게 글자를 쓰고 읽는 법도 가르쳐 줬으니 도서관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녀는 걱정 따위 멀찍이 치워 두고 그에게 미소를 돌려준다.

    “좋아요, 루슬란 님.”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고 살짝 들어 올려 일어나게 도와준다.

    “몸도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 한번 황궁을 구경하면서 가볼래요?”

    “네.”

    껍데기들의 숙소에서 거의 나오지 못했던 그녀는 황궁을 제대로 돌아다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황궁 안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지 못해, 마침내 볼 기회가 생기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곧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녀가 더 이상 평범한 껍데기가 아니란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그나티 제국을 수호하는 마법사와 함께 지내 왔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을지 그녀는 상상도 못 했다.

    루슬란과 함께 침실 밖으로 나오자 지나다니던 궁인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 꽂힌다. 그들의 눈이 그녀의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을 보며 가늘게 떠지는 것이 무서워 그녀는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감히 그 팔을 치우지는 못하고 몸을 불안하게 꼼지락대다 어린 새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런 행동이 더 철없고 어리석게 보일까 봐 다시 품에서 조금 멀어진 그녀는 걸음을 옮기려다 비틀거리고 그가 부축해 주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왜 그러시나요?”

    정말 이유를 모르는 마법사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이런 시선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겠지. 익숙해져 신경도 쓰지 않을 정도로 시선을 많이 받았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는 문득 그가 안타까워진다. 그래서 응석은 부리지 않기로 한다.

    어깨를 펴고 약간은 당당하게 걸으려고 노력하는데 별안간 루슬란이 모퉁이에서 그녀를 다정하게 돌려세운다. 그리고 허리를 살짝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그녀의 코끝을 톡 건드린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우시군요. 진작 말하셨으면 내가 도서관에 바로 데려다 드렸을 텐데. 미안해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의 사과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모르며 시선을 내리깐다.

    “아니에요, 사과하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다만 또 마법을 쓰면 루슬란 님께서 힘드실까 싶어서…….”

    그는 픽 웃으며 코끝을 건드렸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고개를 들게 한다.

    “그대는 나를 무엇으로 보는 건가요. 내가 이런 순간 이동 마법 하나에 힘에 부칠 그런 마법사로 보이는 겁니까.”

    그가 화가 났다고 여긴 그녀는 턱이 잡힌 채로 파들파들 떨며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이제는 남들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의 화를 어떻게든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흑, 아니에요, 루슬란 님께서는 위대한…….”

    그녀가 울음 사이사이로 힘들게 말을 이어 가는데 별안간 루슬란이 그녀를 와락 껴안는다.

    “쉿, 더 이상 그러지 말고 울지도 마요. 그대를 겁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대가 나를 걱정해 주는 게 귀엽고 고마워서 놀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네……?”

    걱정은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하는 거라고 배웠다. 그래서 그가 기분이 상한 것도 이해가 되었었는데 오히려 그가 고맙다고 해 주자 그녀는 혼란스럽다.

    “화나지 않으셨어요……?”

    “화가 왜 나요? 그대가 이토록 고운 목소리로 날 걱정하는 말을 해 주는데. 놀려서 미안해요. 계속 사과할 일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요.”

    루슬란이 얼굴을 걱정스레 살짝 찡그리자 그녀는 질겁하며 제 눈물을 서둘러 닦아 낸다.

    “사과 안 하셔도 되어요.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이렇게 펑펑 울 수가 있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당황하자 그는 그제야 찡그렸던 얼굴을 풀더니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거둬 간다.

    “알았어요. 그만 놀릴게요. 이제 다시 걸어갈까요, 아님 순간 이동 마법을 쓸까요?”

    류드밀라는 아직은 두렵다. 사람들의 시선과 말과 행동들이. 루슬란과 함께 지내면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대담해지긴 했지만 그 변화는 아주 미약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회피하는 선택을 한다.

    “마법을 써 주세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꾸하자마자 그들은 도서관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다. 그녀는 두려움도 이내 잊고 도서관을 천천히 둘러본다.

    천사들이 꼭대기에 앉아 있는 대리석 기둥과 용맹한 전사와 아름다운 처녀들이 그려진 천장화가 보이고 가죽 표지가 반들반들한 양장본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책이 상하지 않도록 습기를 빨아들이는 주문이 걸린 황금색 도깨비불이 도서관을 둥둥 떠다니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떤가요, 황실 도서관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뿌듯하게 지켜보던 그가 묻는다.

    “멋져요.”

    그녀가 속삭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듯 그를 돌아본다.

    “그런데 도서관이 원래 이렇게 텅 비어 있나요?”

    “아니요.”

    그러나 도서관에 류드밀라와 루슬란 외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류드밀라의 고개가 약간 기울어진다.

    그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이리 와요, 안쪽도 보여 주고 싶어요.”

    도서관에 더 깊숙이 들어가자 아름다운 태피스트리가 늘어진 전시 홀 비슷한 공간이 나온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태피스트리에 이야기를 수놓았답니다. 그래서 이것들도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죠.”

    그가 설명한다. 그녀는 기사가 거대한 땅벌레와 싸우는 모습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러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을 느끼고 그를 보지만 그는 조금 떨어진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덜컥 겁에 질린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제 뒤쪽을 가리킨다. 상황을 설명하는데 목소리가 가늘게 갈라져 나온다.

    “루, 루슬란 님, 저 뒤에서 뭔가가 절 잡아당겼어요.”

    그는 놀라는 기색 없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두르고 돌려세운다.

    “이런, 내 마법이 들켰군요.”

    그가 손을 공중에 한 번 휘젓자 물이 지나가듯이 텅 빈 도서관의 풍경이 씻겨 내려간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서 숨겨 왔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마법사와 마녀들로 가득 찬 모습이. 그리고 그제야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던 아이도 보인다.

    금발에 파란색 눈을 반짝이는 남자아이는 그녀가 지나오다 본 천사 조각상의 얼굴과 똑 닮아 있을 만큼 예쁘장하게 생겼다. 마녀의 제복과 비슷한 형태의 이끼 색 제복을 입은 걸로 보아 마법사의 제자인 모양인데 그런 아이가 제 옷깃을 왜 잡아당겼을까 궁금해서 류드밀라는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춘다.

    “무슨 일인가요?”

    “저, 엄, 류드밀라 님 맞으시죠?”

    제아무리 껍데기라 해도 루슬란의 보호를 받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아이는 루슬란의 차가운 눈초리를 의식한 듯 류드밀라에게 반말을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떤 결연한 의지를 갖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다.

    자신의 이름 끝에 존칭이 들어가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당혹스러움을 삼킨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소년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건지도 궁금했으나 황궁에 그녀에 대해 소문이 돌았을 것이란 사실에 문득 생각이 미친다.

    남자아이는 제 소개도 없이 불쑥 등 뒤에 숨겼던 것을 내민다. 종이로 접은 새하얀 장미이다.

    “이걸 받아 주세요.”

    그녀가 당황하여 있는데 위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아이의 손에서 종이 장미를 가져간다.

    “여인에게 다짜고짜 뭘 건네는 건 무례한 행동이란다.”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루슬란이 한마디 한다.

    “네 소중한 마음은 알겠으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려무나, 사샤.”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그의 눈에서 반짝이는 저 감정이 질투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약간 무서워져 아이가 이만 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샤라 불린 소년은 루슬란을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노려본다.

    “성하, 그 장미는 제가 류드밀라 님을 위해서 접은 장미예요. 빨리 그분께 돌려주세요.”

    루슬란이 질투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벼락을 내릴지도 모르겠다고 여긴 그녀가 그를 말리려는데, 공중에서 마녀가 나타나 아이를 뒤로 잡아끈다.

    “죄송합니다, 성하. 죄송합니다. 제 남동생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소년처럼 곧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젊은 마녀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한다. 류드밀라는 루슬란이 그들에게 벌을 줄까 두려워져 그를 돌아본다. 그러나 그는 재미있어하는 눈치로 마녀와 그녀의 남동생을 지켜볼 뿐이다.

    “나탈리아, 사샤가 내 껍데기 님을 남몰래 좋아하게 된 모양이구나.”

    나탈리아라 불린 마녀도 그가 화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안심했는지 겨우 고개를 든다.

    “제가 돌아가서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그리고 류드밀라 님께도 사과드립니다. 이 애가 가끔 철없이 굴 때가 있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장미는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 말에 누나 손에 잡혀 있던 사샤의 얼굴이 밝아진다. 반면 루슬란은 금방이라도 종이를 구겨 버리고 싶다는 눈초리로 마지못해 그녀에게 장미를 넘겨준다. 그 표정을 못 본 건지 안 본 건지 사샤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물어 온다.

    “류드밀라 님께 도서관 구경을 시켜 드리고 계셨나요?”

    “그래.”

    그가 보호하듯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아이를 못마땅한 눈치로 노려본다.

    “그럼 저도 함께해도 되나요?”

    “사샤!”

    나탈리아가 질겁해서 야단을 친다. 누나의 목소리에 움찔하는 소년이 귀여워진 류드밀라는 루슬란을 조심스레 돌아본다.

    “그래도 될까요, 루슬란 님?”

    그는 아이를 노려보던 시선을 겨우 거두고 그녀를 향해서는 따스한 눈길을 보내온다.

    “그럼요, 나의 껍데기 님.”

    사샤는 붙임성 좋게 토토 걸어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긴다.

    “제가 도서관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끌려가며 그녀는 루슬란을 돌아보고 졸지에 아이와 경쟁하게 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물고 억지 미소를 지어 준다.

    그녀를 끌고 가며 아이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린다. 그러나 류드밀라는 그것보다 뒤에서 따라오는 루슬란과 나탈리아가 더 신경 쓰인다. 이미 친한 사이인지 둘은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나탈리아가 웃거나 그가 미소 짓기도 한다.

    그들을 보면서 류드밀라의 가슴이 어쩐지 아려 온다.

    도서관 한 바퀴를 다 둘러본 그들은 도서관 위층에 있는 휴게실로 걸음을 옮긴다. 류드밀라는 어느새 나탈리아와 이야기하며 루슬란이 얼마나 많이 미소 지었는지 세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몸을 부르르 떤다.

    질투하면 안 된다. 그러는 자신도 지금 루슬란의 손을 안 잡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탈리아가 부러운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데, 루슬란 님은 평소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녀는 마법을 할 줄 몰라 관련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으니 말이다.

    도서관 위층 휴게실은 유리 바닥이 있는 발코니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문이 달려 외부와 차단된 발코니 하나를 골라서 들어간 그들에게 시녀들이 다과를 실은 카트를 끌고 와 대접한다. 자연스레 류드밀라 옆자리에 앉은 루슬란이 접시에서 쿠키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는 관심은 그것을 끝으로, 그는 나탈리아와 또다시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루슬란이 나탈리아와 대화하는 동안 류드밀라는 사샤가 준 장미를 만지작거린다. 이 종이로 접은 장미처럼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도 바스러지기 쉬운 것은 아닐까.

    다른 손에 들린 쿠키를 본 그녀의 심정은 더욱 착잡해진다. 그는 그녀가 그저 쿠키를 쥐여 줘 조용히 시킬 아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그가 준 쿠키를 어쩌지 못해 한입 베어 물자 목이 턱 막히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런 상태로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젊은 마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를 본 나탈리아의 파란 눈이 동그래진다.

    “류드밀라 님, 목이 막히시면 차를 좀 드세요.”

    자신을 향한 따스한 걱정에 더 비참해진 그녀는 쿠키를 힘들게 삼킨다.

    “네. 그, 그럴게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막힌 목은 내려간다. 하지만 초라한 기분은 그대로라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또다시 삐져나오려는 울먹임을 참는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나탈리아와의 대화를 더 이어 나가기 위해 무시하는 건지 루슬란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가 화가 났나 싶어 그녀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핀다.

    딱히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정말로 그는 나탈리아와의 대화에 푹 빠져 버렸다는 뜻이다. 그녀와의 대화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일까. 아니면 나탈리아와의 대화가 그리웠던 것일까.

    그가 나탈리아와 놀고 있으니 그의 질투를 북돋게 사샤와 놀아야겠다는 생각은 류드밀라가 애초에 하지 못한다. 그녀의 천성은 남에게 상처 주지 못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해도.

    다만 그런 일을 당할수록 그녀는 한도 끝도 없이 자신감을 잃어 가며 움츠러들 뿐이다.

    그녀의 가라앉은 기분을 알아챈 사샤가 유쾌한 농담들로 그녀를 즐겁게 해 주려 하지만 그녀는 별로 웃지 않는다.

    그저 사샤의 말에 예의 바르게 대꾸하면서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루슬란과 나탈리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지난번 원정 때 성하께서 한 결빙 마법, 어떻게 하신 건가요?”

    “글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으면 그때 자세히 봤어야지.”

    “성하께서 주문도 외우지 않으시고 큰 동작도 하지 않으시니 도통 뭘 봐야 할지 알 수가 있어야죠. 한 번만 더 보여 주세요, 네? 그럼 제가 따라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탈리아는 아까 사샤가 잘못했을 때와 달리 스스럼없이 루슬란을 대한다. 거침없는 것이 남매의 특징인가 보았다.

    “이번에 또 본다 해도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루슬란은 소매를 약간 걷고 손을 내민다. 그는 나탈리아를 연인이 아닌 친한 여동생처럼 대하지만 류드밀라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 친밀감이다.

    그가 손을 나탈리아의 찻잔 위에 덮었다 치우자 차가 얼어 있다. 그녀는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그를 보챈다.

    “성하, 이건 너무 작아요. 원정 때는 그렇게 안 하셨잖아요.”

    보채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살짝 웃은 그가 손가락을 우아하게 휘어 공기 중에 습기를 모은다. 그리고 손바닥을 활짝 펼치자 방에 냉기가 감돌며 벽 전체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나탈리아는 순수한 감탄과 존경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가끔 보면 성하께서는 마법사도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서리를 거두어 물방울들을 공중에 떠다니게 하며 느긋한 음성으로 그가 묻는다.

    “그 어느 마법사도 이렇게 물을 잘 다루진 못할 거예요. 성하께선 마법사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존재 같다니까요.”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황실에 묶여 있겠느냐.”

    루슬란이 부드럽게, 그러나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대꾸하자 나탈리아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성하.”

    “결빙 마법을 보여 줬으니 네가 따라 해 볼 차례 아닌가?”

    그는 자연스레 화제를 돌린다. 나탈리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소매를 걷고 손을 내민다. 그녀는 루슬란을 따라서 최대한 작게 주문을 말하지만 소리를 아주 안 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제국민들 중에서 선발된 마녀라도 주문을 외우지 않고선 마법을 못 하는 법이다. 전부터 이상하게 여겼던 루슬란과 다른 마녀, 마법사들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나 류드밀라는 의구심을 품는다. 그러나 의문을 오래 품고 있는 성격이 아닌 그녀 마음속에서 물음은 금세 사라진다.

    나탈리아의 손에서 나온 차가운 얼음이 다과 테이블을 서리로 뒤덮게 만든다. 그녀는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치로 루슬란을 본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약간 긴장한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차마 그 광경까지 눈에 담을 수 없던 류드밀라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나탈리아와 사샤가 놀란 얼굴을 하고 올려다보자 그제야 제 반응이 부끄러워진 그녀는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댄다. 루슬란이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지만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류드밀라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끝없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

    거처까지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사샤를 물리고 루슬란과 둘이 나온 그녀는 그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질투는 그녀의 본성이 아니었지만, 그저 그녀는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바보 같은 행동을 해 버린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로 침실로 돌아온다.

    루슬란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물론 그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누구를 탓하고 미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원래도 말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 말이 없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차마 루슬란 님께서 마녀와 대화를 나눠 질투가 났다고는 대답하지 못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녀가 대답할 마음이 없어 보여도 그는 짜증을 내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푹신한 침대로 이끌어 앉히고 조심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다.

    그 변함없이 다정한 손길을 받자 스스로에 대한 미운 감정과 그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여 류드밀라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또, 또 왜 우시나요. 뭐가 그리 슬프고 서러울까.”

    서로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약조했었지. 하지만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아주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야 한다.

    혹시나 이런 말을 했다고 그가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면 어떡하지. 투기를 부린다고 여겨 정을 떼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들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녀는 한 가지 강한 이끌림을 겪는다.

    그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 말이 아무리 낯설고 황송하게 들려도 그건 사실이다. 이런 감정에 둔한 그녀도 확신할 만큼 요 며칠 사이에 겪은 일들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딱 감고 용기를 내 보기로 한다.

    “흑, 루, 루슬란 님께서, 그 마녀님과 이야기하시는 모습에,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바로 용기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가 혹여나 오해할까 싶어 말을 이어 나간다.

    “마녀님은 마법을 할 줄 아셔서 루슬란 님과 대화도 통하시는 것 같았고, 저와는 그런 이야기를 못 나누니까…. 그리고 두 분이 너무 친해 보여서…….”

    그는 여전히 요상하게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고 결국 그녀는 온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흐느끼기 시작한다.

    “흐윽,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흑, 이런 생각을 품으면, 흑, 안 되는 건데…….”

    그가 화가 났나 싶어 그녀는 더 설명하려 한다.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해서 죄송해요, 그냥 가슴이 저릿하고 아파서…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어서 당황스러웠어요.”

    “그 감정은 질투랍니다.”

    그가 따스한 목소리로 알려 준다. 그제야 그녀는 그 요상하게 무뚝뚝한 표정이 미소를 겨우 참는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울음을 멈추기엔 너무 많이 울어 버렸고 딸꾹질이 몸을 뒤흔든다.

    루슬란은 그녀의 떨리는 어깨에 다정히 한 팔을 두르고 다른 손으로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어 준다.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그런 감정을 겪는 것이 당연한 걸요. 그리고 제가 오히려 더 미안해요.”

    그녀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난처한 미소를 입가에 건다.

    “그대가 그렇게 질투하게 제가 의도한 부분도 있었어요. 사샤가 건넨 장미꽃을 그대가 흔쾌히 받는 모습에 저도 기분이 상했거든요.”

    그녀가 다시 겁에 질리자 그가 서둘러 말을 계속한다.

    “그대가 이렇게 울 정도로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요. 그저 가볍게 애태우게 하고 싶었던 것인데.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조그맣게 대답한 그녀는 겨우 울음을 가라앉힌다. 그녀가 완전히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여 주고 안고 있어 준 루슬란이 침대 안쪽까지 들어가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제가 그대의 상한 마음을 달래 주었으니, 이제는 그대가 내 상한 기분을 달래 줄 차례예요. 저도 똑같이 질투가 났다고요.”

    그녀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다가 겨우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울고 싶으면 우세요, 제가 달래 드릴게요.”

    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큰 소리에 놀란 그녀가 토끼처럼 몸을 움찔하자 금방 잦아들긴 했지만. 그가 웃었다는 건 이유는 모르지만, 기분이 풀렸다는 뜻이 아닐까.

    그녀는 그가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하곤 침대를 가로질러 그의 곁에 몸을 기댄다. 그러면서 안색을 살피는데 부루퉁한 표정을 보니 그녀의 생각이 틀렸나 보다.

    “어떻게 하면 기분을 푸실 건가요?”

    “그건 그대가 고민할 문제죠.”

    표정과는 달리 따스한 목소리로 그가 이른다. 그녀는 눈썹을 한데 모으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그녀가 어떻게 했을 때 그가 좋아했더라.

    류드밀라는 몸을 살짝 일으켜 그의 뺨에 입술을 쪽 갖다 대곤 재빨리 물러난다.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니 그가 웃지도 않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기분은 풀리셨냐고 물으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뒷목을 끌어당겨 키스한다.

    살면서 딱 한 번, 겨울 축제 스비얏키에서 먹어 본 아이스크림에 혀를 담그는 듯한 맛과 감촉이다.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향에 혀 옆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러움. 그리고 시원함.

    그가 오랜 입맞춤 끝에 얼굴을 떼었을 때 그녀는 아쉬움마저 느낀다.

    그 아쉬움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그녀가 숨을 고를 시간을 준 후에 다시 입을 맞춰 온다.

    그렇게 두 번의 키스가 끝나자 그녀는 숨을 가볍게 헐떡이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한 것은 분명 키스뿐인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들뜨는 것이 무슨 먼 거리를 뛰고 온 사람 같다.

    그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녀의 가운을 내린다. 그런데 그의 손길이 닿자 뻐근하게 아파 오는 허리가 심상치 않다. 그녀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속옷으로 향하는 그의 손을 잡으려는데 그가 먼저 눈치채고 손을 치운다.

    “월경을 시작하셨군요.”

    도서관에선 알아채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속옷이 피로 젖어 있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것 같아요.”

    그는 한시름 놨다는 듯이 눈을 휜다.

    “다행이에요. 저는 피가 났길래 또 상처가 덧난 줄 알았어요.”

    보통 사내들은 여인이 월경을 시작하면 관계를 할 수 없어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마녀들은 마법사에게 보내질 때가 되면 껍데기 여인들에게 월경을 막는 약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루슬란을 보는 그녀의 마음에 뭔가가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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