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마법사 (2/20)
  • 1. 마법사

    은발을 엉덩이 언저리까지 늘어뜨린 류드밀라는 화려한 문 앞에 서서 두려운 마음을 억누른다. 안에서는 죽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문 너머 침실의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제국을 세우고 무너뜨릴 힘을 가졌다는 루슬란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교배’하기 위해 선택된 순수 혈통이다. 마법사에게서 태어난 순수 혈통이지만 타고난 마법 능력은 없어 오로지 이런 일에 쓰이기 위해 길러진 껍데기. 본디 껍데기는 마법 능력이 없는 이들에 대한 멸칭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식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껍데기 여인은 고귀한 혈통이면서도 마법 능력이 없어 마법사의 씨를 받으면 그의 마법을 그대로 자식에게 전하는 그릇이 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마법을 그대로 내려 받은, 강한 마법사나 마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황궁에서는 마법사와 껍데기 여인을 교배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다. 태어나 자란 19년 동안 황궁에서 그녀는 상급 마녀들에게 길러졌고, 마녀들은 류드밀라에게 그간 길러 준 모든 비용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에 심어 놓았다. 사랑 없는 관계에서 난 비천한 껍데기일 뿐인 그녀가 과연 무엇에 대해 억울해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두려움은 느낀다. 문 너머의 마법사는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교배를 위해 그를 찾아온 여인들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죽인다는 소문.

    그녀는 속살이 비치는 엷은 가운을 다시 한번 단단히 여미며 심호흡을 한다. 아무리 두려워도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다. 들어가서 죽으나 도망치다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다.

    상급 마녀가 그 점 하나는 그녀에게 잘 가르쳐 놓았다. 마법사의 씨를 받아 내지 못하고 방을 나오면 그녀의 여린 목을 비틀 사람은 그가 아닌 그녀가 어머니처럼 따랐던 상급 마녀일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울음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 한다. 얇디얇은 감정의 끈을 놓았다간,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것만 같다.

    류드밀라는 결심을 하곤 문을 힘껏 민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녀는 당겨도 보지만 문은 꿈쩍 안 하긴 마찬가지다.

    그녀가 힘을 줄 때마다 문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이 은빛으로 번쩍인다. 마법의 표시다. 마법 능력을 가진 자만이 이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당황해서 멍청하게 기웃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스르르 열린다. 아까의 결심은 어디 가고 그녀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한 채 침만 꼴깍 삼킨다.

    어두운 방 안에서 빛나는 은빛 눈동자 한 쌍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자 서서히 그 눈동자의 주인도 보이기 시작한다.

    젊은 남자가 휘장이 드리워진 거대한 침대에 기대앉아 있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듯이 긴 머리카락과 수려한 외모에 그녀는 잠시 그가 사내인지 여인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판판한 가슴과 날렵한 턱 선은 의심할 바 없이 사내의 것이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에 팔을 걸친 모습이 느긋해 보인다. 두려움으로 온몸을 떨고 있는 류드밀라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무례하기도 하여라. 노크도 안 하시고 들어오려 하셨나요?”

    남자가 입을 연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 뱀의 속삭임 같다.

    겨우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그러면서 사죄의 말을 하려는데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에 소리를 내지 못한다. 류드밀라는 제 목을 더듬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이미 닫혀 버린 문에 등을 부딪친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다시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벌로 그대의 목소리를 빼앗았어요. 제가 허락할 때까지는 말을 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꼴을 훑어본 그가 느리게 웃음을 입가에 건다.

    “내가 빼앗지 않았어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류드밀라는 무릎을 천천히 꿇는다. 목소리를 돌려받아야 한다. 아니, 뭐라도 해서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그녀가 살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나지 않을까.

    “이런, 이런.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는 재미있어하는 듯하다.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 그녀가 처음도 아닐 텐데.

    “일어서세요.”

    류드밀라가 머뭇거리자 공기가 휙 움직여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놀란 그녀의 표정을 본 그가 침대에서 몸을 약간 기울인다.

    “나에게는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요. 이해해 줘요. 내 발아래 무릎을 꿇은 사람은 황제 하나로 충분하니까.”

    일어선 채로 있으려니 그녀의 다리가 얼마나 후들거리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팔로 제 몸을 감싸 안는다.

    그가 한참이나 그녀를 지켜보다가 눈을 느리게 휘며 아름답게 미소 짓는다.

    “나의 껍데기 님, 뭐가 그렇게 두려워 떨고 계시나요?”

    그는 나른하게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온다.

    “두려워 마세요. 그대를 해치지는 않을 테니. 다만 조금 아프게 할지도 모르겠죠.”

    느슨하게 걸쳐져 있던 그녀의 가운이 그의 손길에 바닥에 흘러내린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류드밀라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가 몸을 굽혀 귓가에 속삭인다.

    “그렇게 어여삐 울면 못써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녀의 목에 졌던 응어리가 풀린다. 마침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소리보다는 울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흑, 흐윽….”

    “저런. 많이 두려우셨나 보군요. 걱정 마요. 오늘은 그대를 심하게 다루지 않을게요.”

    그는 서늘한 손길로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 주다 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게 한다. 류드밀라는 눈물에 그의 옷이 젖을까 봐 황급히 눈물을 닦는다.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법사는 손을 거두고 그녀가 다시 바로 서게 내버려 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셔요.”

    “죄송합니다, 성하.”

    류드밀라는 상급 마녀에게 배운 대로 존칭을 써서 그를 부른다. 그가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심기를 거슬렀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뭐가 거슬렸는지 물어볼 용기는 없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만 볼 뿐이다. 그래서 그가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사실, 봤어도 그게 다정한 눈길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마법사가 다른 여인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또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녀는 모를 수밖에 없으니까.

    “사과는 되었어요. 그대가 무얼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나요?”

    류드밀라가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자 그는 픽 웃음을 흘린다.

    “그럼 나를 유혹해 봐요. 내가 그대 안에 씨를 남길 수 있게, 그럴 마음이 들도록 나를 유혹해 봐요.”

    그녀는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다.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차가워 다시 몸을 잘게 떨면서.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울음이 다시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요?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다가와서 앞으로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마법사가 나지막이 경고한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벌벌 떨면서 고개를 천천히 들고 용감하게도 그의 눈을 마주 쳐다본다. 인간의 것이 아닌 은빛 눈동자는 위험하게 빛나고 있다.

    기가 질린 그녀가 고개를 다시 숙이려 할 때,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이 그녀의 턱을 붙잡고 다시 들어 올린다.

    “나를 봐 줘요. 나를 보고 원하는 것을 말해 봐요.”

    계속 아무 말 없이 있으면 그가 정말로 화를 낼까 봐 그녀는 입을 겨우 떼기로 한다.

    “흐, 제가, 제가 원하는 것은, 흑…….”

    “쉬이- 잘하고 있어요. 계속 말해 봐요. 원하는 건 들어주겠어요.”

    그녀가 이제는 아예 흐느끼면서 두 손을 꼭 마주 잡는다.

    “절 살려 주세요, 흐윽, 전 살고 싶어요…….”

    “내가 언제 그대를 해치겠다고 한 적이 있나요?”

    재미있어하는 어투로 마법사가 말하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려는 순간, 류드밀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의 손을 뿌리친다.

    바닥에 떨어진 가운를 주워 걸친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간다. 마법으로 문을 열어 준 사람이 마법사라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복도를 맨발로 내달린다.

    한편 침실에 홀로 남겨진 마법사는 뿌리쳐진 손을 생경하다는 듯이 잠시 본다.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칠 정도로 겁에 질렸다는 사실에 옛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이 쓰리다. 그들을 갈라놓은 세월이 야속하면서도, 다시 그녀를 보게 되어 설레는 감정이 가슴 한편에 피어오른다.

    한편 류드밀라는 복도를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디로 향하는지 정하지도 않고 뛰기만 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안 그래도 약했던 다리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 달린다.

    마침내 지쳐 주저앉으려 할 때, 그녀 앞에 제복 차림의 상급 마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작은 비명을 내뱉으며 그대로 멈춰 선다.

    “류드밀라.”

    상급 마녀, 어머니와 다름없는 그 존재가 그녀를 부른다.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말아 뒷덜미에서 고정시킨 정갈한 모습의 마녀와 뛰느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진 머리의 그녀는 너무나도 대비된다. 금실 자수가 들어간 자주색 제복과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가운도.

    “네, 예하.”

    숨을 고르며 류드밀라는 얌전히 대답한다. 19년 동안 받았던 교육이 그녀의 손을 공손히 맞잡게 하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가 받았던 교육보다 더 어둡고 진한 무언가가 그녀의 정신을 사로잡는다.

    그 무언가는 그녀의 놀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살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살기 위한 발버둥을 그만두게 한다.

    마녀가 류드밀라에게 최면을 건 것이다.

    “네게서 그분의 씨가 느껴지지 않는구나.”

    “죄송합니다.”

    그녀가 사죄의 말을 중얼거리지만 마녀의 무심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넌 껍데기들 중에서 우리의 말을 가장 잘 따랐지. 그러나 그분의 성에 차지는 않았나 보구나.”

    “죄송합니다, 예하.”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류드밀라는 시선을 내리깔고 다가올 벌을 기다린다.

    “죄송해할 것 없다. 네 실패는 목숨으로 갚으면 되니 말이다.”

    상급 마녀가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고개를 들려무나, 나의 딸아.”

    그녀는 안다. 이 다정한 음성은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을 소리이다. 그걸 아는 마녀가 일부러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잊힌 어머니의 목소리를 불러낸 것이다.

    그 배려가 고마워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들고 눈을 감는다. 그렇게 그녀의 숨통을 끊어 놓을 손아귀가 목을 감싸길 기다린다.

    그때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지더니 누군가 그녀를 뒤에서 조심스럽게 껴안는다. 류드밀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본다.

    마법사의 은빛 눈이 다정하게 반짝인다.

    “나의 껍데기 님, 도망가지 마시어요. 제 씨를 품으셔야죠.”

    그녀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에게서 도망쳐 죽음으로 안식을 찾으려 했건만 다시 붙잡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야속하게도 그녀의 심장은 다시 두근대기 시작한다. 어쩌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죽고 싶지는 않다.

    상급 마녀가 류드밀라에게 걸었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최면을 푼 것이다.

    “성하.”

    마녀가 허리를 굽히고 마법사는 느리게 고개를 돌린다.

    “그래.”

    “그 껍데기가 마음에 드신 듯하니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 보거라. 너희의 일을 해. 난 이 아이 하나로 만족하겠다.”

    상급 마녀는 꾸벅 절을 한 후 연기가 흐려지듯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마법사가 여전히 팔을 풀지 않고 류드밀라의 귀에 달콤한 숨결을 서리게 한다.

    “내가 그리도 무서웠습니까.”

    “아닙니다, 성하.”

    “거짓말을 하십니다.”

    그녀가 놀라고 두려워 그를 돌아보는데 그들은 순식간에 마법사의 침실로 돌아와 있다. 류드밀라는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나 허리를 숙인다. 공포가 어린 눈물 한 방울이 엄지발가락에 톡 떨어진다.

    “죄송합니다, 성하.”

    “용서해 드리죠. 다만.”

    마법사는 손가락을 까닥여 그녀가 허리를 펴게 한다.

    “한 가지 약속해 주셔야 될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한다.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요.”

    “……네, 성하.”

    “그리고,”

    그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간다.

    “나 때문에 우는 건 좋지만 질질 짜는 사람을 범하는 취미는 없으니 그만 울음을 그치세요.”

    그녀가 간신히 눈만 들어 그에게 물음이 담긴 눈길을 보내오자 그는 고개를 새처럼 기울인다.

    “네, 알아들으신 그 말이 맞아요.”

    제국을 삼켜 버리는 마법사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류드밀라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친다.

    “난 그대를 범할 거예요.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우셔야 합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로 아무 말도 못 한다. 분명 그의 마법은 풀렸는데 목이 응어리진 듯 답답하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류드밀라가 그렇게 굳어 버린 데에는 눈물을 닦아 주는 차갑기 그지없는 손길도 한몫했다.

    ‘이건 사람의 체온이 아니야. 사람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지.’

    그녀의 본능이 말하고 있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러나 그녀는 이미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또 한 번 도망치면 겨우 노크를 안 했다고 목소리를 앗아 간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분명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르겠지. 소문의 주인공인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랏빛 눈에 일렁이는 두려움을 눈치챈 그는 더 이상 눈물을 닦아 내지 않고 흐르게 내버려 둔다.

    “천천히 길들여 드릴게요, 나의 껍데기 님. 오늘은 쉬운 것부터 해 보죠.”

    그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으나 그의 자제력은 부족한 인내심을 넘어서고도 충분하다. 그래서 마법사는 류드밀라가 말뜻을 알아듣고 되물을 때까지 기다려 준다.

    “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성하?”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묻는다. 그 목소리에 귓가가 아닌 가슴이 간지러워 그는 따스한 미소를 내비친다.

    “스스로 옷을 벗어 보셔요. 그리고 침대에 올라오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안 그래도 핏기 없던 그녀의 얼굴이 더욱이 창백해진다. 그녀는 마치 이걸 벗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가운의 소매를 만지작거린다.

    상급 마녀들에게 길러지며 류드밀라는 마법사의 태를 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마녀들은 천한 껍데기에게 그 정도까지 관심을 쏟지 않았고 그녀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다만 다른 껍데기들이 소곤대는 말들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그는 몸을 돌려 침대로 먼저 올라간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쿠션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그 은빛 눈길이 부담스러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어깨를 끌어안는다.

    류드밀라는 무감한 아이가 아니다. 무감한 사람이라면, 이미 속이 훤히 비치는 데다 그 앞에서 한번 알몸이 되어 봤는데 뭐가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것이다.

    대신 그녀는 섬세하고도 여린 아이다. 가운이 속이 비쳐 그녀의 분홍색 유두를 드러낸다는 것도, 이미 그의 눈에 은색 털로 덮인 음부가 한번 보였다는 것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 그의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더없이 두렵게 느껴진다.

    마침내 그녀가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이번에 마법사는 그녀를 달래 주려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지쳐 울음을 혼자 그치게 내버려 둔다.

    그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공포에 질려 실컷 울고 난 류드밀라는 가엽게도 딸꾹질로 온몸을 떤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휘청인다.

    “힉, 죄송합니다, 흑.”

    옷을 벗는 데 너무 오래 걸려 죄송하다는 뜻이었으리라. 말하지 않아도 그는 그 의미를 알아채고 웃음을 숨긴다.

    한마디도 않던 그가 손을 뻗는다. 그에게서 뻗어 나간 은색 빛줄기가 그녀의 입 안으로 사라진다.

    “헉!”

    자지러질 듯이 놀란 류드밀라는 딸꾹질이 순식간에 가라앉자 그제야 그의 의중을 이해한다. 말없이 보낸 눈길은 그저 응원의 눈빛이었을 뿐. 그는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일단 그 생각이 들자 처음으로 온전히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마법사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줬고, 그녀에게 한결같이 다감하게 대해 줬다. 이제 그에게 보답할 차례이다.

    그녀는 단단히 조아 맸던 가운의 허리끈을 느린 손동작으로 푼다. 손이 덜덜 떨려 마음먹은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찌어찌 허리끈을 풀자 느슨하게 늘어진 가운 사이로 뽀얀 속살이 보인다.

    용기를 내 조심히 마법사와 눈을 맞추자 그는 잘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준다. 류드밀라는 소매 끝을 잡아당겨 가운에서 한쪽 팔을 빼고, 잠시 반쯤만 걸친 채로 굳어 버린다.

    “어서요.”

    참지 못하고 그가 조용히 채근하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어깨를 소심하게 움직여 가운이 흘러내리게 한다.

    호리호리하고 긴 팔다리와 잘록한 허리, 작지만 탐스러운 골반과 봉긋 솟은 가슴이 드러난다.

    그녀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비척비척 걸어 침대로 온다. 그리고 껍데기들의 숙소에 있던 딱딱한 침대를 생각하며 매트리스를 짚고 올라오려다 손 아래가 푹 꺼지자 당황하여 비틀거린다.

    푹푹 꺼질 만큼 말랑한 침대에 겨우 적응하여 그가 앉아 있는 곳까지 온 류드밀라는 얌전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다음에 뭘 하면 되겠냐는 순진한 물음이 담긴 눈과 마주한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어 내린다.

    “이제 절 유혹해 보라는 부탁은 무리한 부탁이겠죠? 좀 전에 그랬다가 그대가 도망갔으니 말입니다.”

    “아, 저…… 전 이제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성하.”

    맨살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가 대꾸한다.

    “그럼요, 그래야죠. 그대가 또 도망친다면 내 이 두 발목을 손수 꺾어 버릴 테니까.”

    그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협박의 말을 속삭인다.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두 발목이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꺾이는 상상을 하곤 류드밀라는 눈물을 흩뿌린다.

    “흐으, 흑, 흐윽…….”

    아무리 그녀에게 다정해도 그가 끔찍한 소문의 주인공인 것은 변함이 없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요. 난 우는 사람을 범하는 취미는 없다고.”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던 손을 거둔다. 은빛 눈동자가 지독한 집착을 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악하기도 하셔라. 울면 내가 그대를 내버려 둘 줄 알았나요?”

    류드밀라가 눈을 크게 뜨고 부정의 말을 하려 하지만 목이 또 잠긴다. 이번에는 마법도 아닌 순전히 두려움만으로.

    “그대가 계속 울면 벌어질 일을 말해 주겠어요. 나는 당신을 침실에서 쫓아낼 거예요. 그럼 마녀님이 오셔 그대에게 내 씨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대의 가느다란 목을 손수 비트시겠죠. 그걸 원하시나요?”

    그녀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대답은 똑바로 하셔야죠.”

    “흡, 아뇨, 성하.”

    그제야 그의 눈에 서렸던 매서움이 옅어진다. 대견하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베개에 기대게 하고 팔을 다정히 두른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나요?”

    대답을 안 하거나 모른다고 하면 그가 또다시 화를 낼까 봐 류드밀라는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말을 한다.

    “성하께서…… 저를, 범하신다고…….”

    “맞아요.”

    마법사는 짓궂은 표정을 하곤 그녀와 이마를 맞댄다.

    “범한다는 뜻을, 여자와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계시죠?”

    그녀는 황급히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눈을 내리깐다.

    “잘, 잘은 모릅니다, 성하.”

    정말이다. 상급 마녀는 그녀에게 그분의 씨를 받아 오라 하셨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알려 주지 않았다. 남자의 몸은 본 적도 없는 그녀가 무엇을 알까.

    루슬란은 마녀들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못마땅한 듯 혀를 찬다. 그러나 못마땅함도 잠시, 그는 곧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알려 줄게요. 그대는 그저 울지만 말고, 도망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예, 성하.”

    순순히 대답한 류드밀라는 그가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기 시작하자 눈을 꼬옥 감고 기다린다. 사내의 몸을 이렇게 가까이서, 이토록 자세하게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쩐지 눈이 쉽게 다시 뜨이지 않는다.

    “눈을 뜨고 싶지 않으시면 뜨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래서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 다만 그녀를 껴안는 손길, 판판한 배를 쓸어내리는 손길만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의 아래에 있는 꽃잎을 조심스레 헤집는 손길도.

    “흣!”

    이렇게 부끄러운 곳을 남이, 그냥 남도 아닌 제국을 집어삼킨다는 마법사가 만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까무러칠 듯 겁에 질린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창피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욱더 눈을 못 뜨겠다. 이대로 눈을 뜨고 그의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얼굴을 본다면 송구하게도 기절하고 말 것이다. 류드밀라는 온 힘을 다해 눈을 감고 있다. 덕분에 몸은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몸에서 힘을 푸셔야죠. 힘이 들어가면 아플 겁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따르려고 힘을 풀지만 그러자 온몸이 덜덜 떨려 온다. 그때 그가 경고도 없이 긴 손가락을 그녀 안으로 미끄러뜨린다.

    이물감에 그녀는 놀라서 숨을 헉 들이쉬고 애처롭게도 구멍을 조인다. 낯선 느낌이 들어 절로 눈이 떠지지만 두려워 다시 감고 만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데 긴장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손가락을 물고 놓아주질 않는 구멍에 약간 놀란 마법사는 허, 하고 어이없는 숨을 뱉어 낸다. 아무리 긴장을 해도 그렇지. 이런 경우는 그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뒷머리를 받치고 입을 맞춘다. 자연스레 벌어지는 입 안으로 혀를 넣자 긴장이 풀린 건지 아래의 조임도 약간은 풀린다.

    키스는 목적이 아니기에 짧게 끝낸 그가 그녀의 다리를 벌린다. 손가락이 더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신음다운 신음이 류드밀라의 입에서 나온다.

    “흐읏, 응, 흑…….”

    제가 내는 소리에 놀라 깍지 낀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 막아 보지만 습기 찬 신음은 계속 튀어나오고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대는 예민해서 잘 느끼는 몸을 타고났군요.”

    흠뻑 젖어 드는 아래를 내려다보다 그가 한마디 한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더욱 크게 교성을 내지를 뿐이다.

    그의 손가락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안을 파고들기만 한다. 그러다 점점 안을 넓혀 가며 위아래로 흔든다.

    그때마다 류드밀라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오줌이 마려운 것 같기도 하고, 뭉근하게 아래가 아려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핑 돌고 들뜬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헐떡이면서 소리가 빠져나갈세라 제 입을 막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신음은 가는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새어 나가고 그녀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그녀가 내는 소리가 감미롭게 귓가를 휘감는다. 루슬란은 살짝 웃고는 손을 흔드는 대신 방법을 바꾼다.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나요?”

    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다리를 활짝 벌린 그녀 안을 깊숙이 눌러 주며 다정하게 물어 온다.

    “아흣, 네, 읏, 으응…….”

    “여린 몸이어서 아직 내 것은 못 넣겠고. 당분간은 이걸로 만족해야겠군요.”

    “흣, 아앙…!”

    악문 이 사이로 비명과 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절정을 맞이한 류드밀라의 몸이 축 처진다.

    마법사는 그녀의 액이 묻은 손가락을 빨며 웃음을 입가에 건다.

    “그대가 온전한 제 것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제국쯤은 멸망시킬 수 있어요. 어떤가요. 나와 함께 새로운 제국을 세워 보는 것은.”

    그 달콤한 제안에 뭐라 대답하기도 전 다시금 아래를 느릿하게 훑는 손에 류드밀라는 옅은 신음만 내뱉는다. 그러나 그가 손가락을 한 번 더 넣기도 전에 어느새 까무룩 기절하고 만다.

    ***

    류드밀라가 다시 깨어난 것은 늦은 아침이 되어서이다. 지난밤 시달렸던 몸이 뻐근하게 아파 오지만 그녀는 느끼지도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밤에 잠은 잘 주무셨나요, 나의 껍데기 님?”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기듯이 그가 낱말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빚어 말한다.

    “네, 성하.”

    아직 그녀에게는 그의 밤은 어땠는지 물어볼 기력이 없다. 벗어날 생각도 못 하고 지쳐서 품 안에 힘없이 늘어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마법사가 눈을 휜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군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국을 집어삼킨다는 마법사는 어떤 음식을 먹는지?”

    “궁금해요, 성하.”

    품 안에서 얌전히 대꾸하는 류드밀라가 귀여워 마법사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인다.

    “그러고 보니 전날은 그대가 정신이 없어서 서로 소개도 못 했군요. 식사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될까요?”

    “네, 성하. 그, 그리고…… 제게 그렇게 존대하실 필요는 없어요.”

    마법사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류드밀라는 움츠러들며 혹시 제가 말을 잘못했나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가 손을 뻗을 때도 바로 고개를 숙여 그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대는 내게 귀한 사람이에요.”

    마법사는 그녀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내게 한없이 소중해서, 만지면 부서질 듯하고 품지 않으면 도망갈 듯한데, 내가 어찌 그대를 낮게 대할 수가 있겠어요.”

    그녀가 눈만 끔벅이며 그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그는 곧 제가 말을 해 놓고 부끄러운 듯 주제를 딴 데로 돌려 버린다.

    “그럼 이제 식사하러 가죠, 나의 껍데기 님.”

    그녀는 방에 놓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거라 생각하곤 몸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다 알몸인 것을 깨닫고 몹시 당황한다. 주춤거리는데 그가 부드럽게 눌러 다시 앉힌다.

    “오늘은 게으름을 부려 보도록 해요.”

    그에 맞춰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문은 스르르 열리고 쟁반을 든 시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셔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서늘한 손이 그녀의 눈가를 덮는다.

    곧이어 시종이 물러가며 문이 닫히자 빛은 사라진다. 손이 치워지고 그녀는 시종이 들고 있었던 쟁반이 저 혼자 공중을 둥둥 떠서 오는 걸 보고 질겁한다.

    마법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상급 마녀들이 종종 껍데기들 앞에서 보란 듯이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문도 외우지 않고, 하다못해 간단한 손동작도 하지 않고 마법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류드밀라는 마법사와 딱 침대 앞, 그들이 먹기 편한 자리에 멈춘 쟁반을 번갈아 돌아본다. 입은 헤벌린 채로.

    그녀가 신기해하라고 일부러 순간 이동 대신 부양 마법을 선택한 그는 그녀의 반응에 만족한다. 그러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그 이유를 묻는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신가요, 나의 껍데기 님?”

    어린아이 같은 제 반응이 부끄러워진 그녀는 눈길을 내리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하.”

    더 묻지 않은 그는 빵의 폭신폭신한 속 부분만 떼어 수프에 찍는다.

    “드시겠어요?”

    별안간 아주 배가 고파 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고개만 끄덕인다. 그는 빵을 적신 수프가 먹기 좋을 정도로 식기를 기다린다.

    “고개 들어요.”

    그가 조금 단호하게 말하자 류드밀라는 움찔하며 말을 따른다.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의 입으로 향해 오는 빵 조각에 당황하지만 입은 자동으로 벌어진다.

    감히 저항할 생각도 못 하고 빵을 받아먹은 그녀가 오물오물 씹어 삼킨다. 긴장해서 그런지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잘했어요.”

    마치 아기 다루듯이 칭찬해 준 그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류드밀라입니다, 성하.”

    “그대와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류드밀라는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사실 그녀는 지금껏 자기 이름의 뜻을 알지도 못했었다. 성을 가지지 못한, 흔하디흔한 껍데기의 이름이었으니 알아볼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아름다운 뜻을 속살거려 주니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 이 감정이 뭔지 깊이 생각해 볼 새도 없이 그가 빵을 하나 더 뜯어 수프에 찍은 다음 그녀에게 먹여 준다.

    “내 이름은 아시나요?”

    서둘러 입 안의 음식을 삼킨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요, 성하. 모릅니다.”

    항상 그는 이그나티 제국의 수호자, 제국을 집어삼키는 마법사 등 별칭으로만 불려 왔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루슬란이에요.”

    “발음이 예뻐요.”

    별생각 없이 톡 말해 놓고 실례인가 싶어 눈치를 보는 그녀이다. 루슬란은 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그 묘한 표정이 웃음을 간신히 참는 얼굴이란 사실을 모르는 류드밀라는 겁에 질려 몸을 급하게 숙인다.

    “죄송합니다, 성하. 제가 실례되는 말을…….”

    “안 되겠어요.”

    그가 쟁반을 살짝 공중에서 밀어내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네……?”

    “그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고요.”

    그는 그녀를 품에 안아 주며 입을 맞춘다. 류드밀라는 놀라서 눈물 한 방울을 떨구지만 그 눈물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아 버린다.

    눈을 감자 온몸의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 그의 시원한 입술과 정반대로 뜨거운 입 안.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드는 말캉한 혀와 마법 섞인 타액의 맛까지.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그 이상한 감각에 몸을 내맡긴다.

    이러한 노골적인 애정은 처음인지라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진다. 다른 껍데기들이 소곤댔던 것보다 더 강렬하고, 이상하기 그지없는 느낌이다.

    루슬란은 당장이라도 꼼꼼히 몸을 감싼 이불을 벗겨 내고 제 것을 그녀의 안에 넣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이렇게까지 욕정에 사로잡힌 적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처음이다.

    그는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자제력을 발휘해 그녀에게서 입을 뗀다. 키스가 끝난 것을 알고 다시 눈을 떴다가 생각보다 얼굴이 너무 가깝자 눈길을 서둘러 내리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저, 다시…… 아침을 먹어도 될까요?”

    그가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류드밀라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요.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으니 많이 드세요.”

    멀리 치워 놨던 쟁반을 다시 불러온 그가 눈을 다정하게 휜다. 혹시나 게걸스럽게 보이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그녀는 빵을 조심조심 뜯어 그가 했던 것처럼 수프에 찍는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물어보셔요. 제 이름 말고도 많은 것을 모르셨을 듯한데.”

    루슬란이 그녀의 몸짓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며 말한다. 그녀가 입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다.

    “성하께서도 궁금한 게 있으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조금 기다려도 되어요. 기다리는 것도 그대가 가져다줄 많은 즐거움 중에 하나이니.”

    궁금한 걸 물어도 된단 말이 일단 떨어지자 류드밀라의 머릿속은 질문들로 채워진다. 왜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지, 왜 그녀를 다른 여인들처럼 죽이지 않는 건지. 왜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고서 제대로 범하지 않았는지.

    그러나 그런 중요한 질문들을 물으면 되돌아올 대답이 두렵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다른 물음을 찾던 그녀에게, 어젯밤 잠들기 전 들었던 이상한 말이 떠오른다.

    “혹시, 어제 그러시지 않았나요. 제가 온전히 성하의 것이 될 수만 있다면 이런 제국은 무너뜨리고 새 제국을 세우겠다고.”

    “그랬죠.”

    그가 고개를 새처럼 기울이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루슬란은 그녀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이불 위로 떨어진 수프 한 방울을 다시 공기 중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동그란 방울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갖고 논다.

    한참을 그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마침내 신중히 입을 연다.

    “그대가 왜 내게 보내졌는지 아시겠죠. 우리가 하는 일이 교배라 불리는 이유도요.”

    “네, 성하.”

    “이 나라는 내 마법으로 세워졌음에도 마법사와 마녀를 천대하는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순수 혈통은 귀하게 여기고, 또 마법 능력이 없는 껍데기는 쓸모가 없다고 무시하죠. 나는 언젠가 이 나라를 바꿀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이그나티 제국의 계급 구조는 실로 모순 덩어리이다. 마법으로 세워졌음에도 마법을 무시하는 그 감정 아래에는, 강한 능력을 지닌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아주 약간의 마법만 할 수 있는 황족과 귀족들이 신분제의 꼭대기에 위치한 이상, 그 모순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와 마녀 내에서는 또 다른 관행들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약한 자는 철저히 배제하고 강한 자만을 떠받드는 추악한 구조로 그들 사회는 유지된다.

    루슬란은 손바닥 위에 있던 방울을 꽉 움켜쥐고 수프는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린다. 그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대를 위해서요. 내가 천대받는 건 참을 수 있지만, 그대가 무시당하는 것은 못 참을 것 같거든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혹여나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해를 가할까 두렵습니다.”

    “재밌는 일이군요. 늘 제 안위만을 두려워하던 그대가 나를 위해 두려워할 줄도 알고.”

    그녀는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입만 방긋거린다. 겁에 질린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래요. 날 위해 울어요, 나의 껍데기 님. 날 위해 울고, 걱정하고, 두려워해요.”

    따뜻한 음성과는 달리 그의 은빛 눈은 류드밀라가 이해할 수 없는 지독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그 눈빛이 무섭기 그지없지만 이번만큼은 용기를 낸다.

    계속 눈을 감아 버리고 울기만 하는 자신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맞추고 견뎌 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읽어 낸 그는 먼저 시선을 거둔다.

    “마저 드셔요.”

    눈길이 돌려진 것에 감사하며 그녀는 들고 있던 빵을 입에 넣는다.

    저 오물거리는 입술에 제 것을 물려 주고 싶다-라는 막연한 욕망이 그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다시 질문을 한다.

    “어제는 아프지 않으셨나요?”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왜 아프겠냐고 되물으려다 그가 말하는 일이 어느 특정한 사건에 관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정확히는 어느 손가락이 그녀 안으로 들어온 일 말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손가락을 불안하게 비틀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성하. 그런데……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그러고 싶지 않나요, 그래서?”

    그녀가 눈치를 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가 픽 웃는다.

    “그런데 어쩌나. 내 씨를 받아 내려면 손가락보다 큰 것도 넣어야 할 터인데.”

    이렇게 말하는 루슬란의 눈은 다정한 말과 다르게 서늘해 류드밀라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더 힘을 잃는다.

    “…….”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요정의 가락 같아 귓가를 스칠 뿐 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봐요.”

    눈의 서늘함이 가시고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띤 그의 모습에 그녀는 용기를 얻는다.

    “노력…… 해 볼게요. 성하의 씨를 받을 수 있게.”

    “착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아직은 안 되어요. 시간을 두고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정을 통하는 법을.”

    “저… 전에는 인내심이 없으시다고…….”

    루슬란은 손을 뻗어 류드밀라의 뺨을 어루만진다. 움츠러드는 그녀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자제를 해 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성하.”

    말꼬리를 흐리지 않으면 말끝마다 꼬박꼬박 성하를 붙이는 그녀가 귀여워 그는 미소 짓는다. 이렇게 마음 놓고 미소 지어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그런 딱딱한 호칭 말고 다르게 불러 줄 순 없으신가요?”

    “어떻게요……?”

    “이제 이름도 알았지 않나요.”

    그녀는 허락을 구하듯이 순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불러 보셔요.”

    류드밀라가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가로지른다. 그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이 빛나며 상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나중에 오거라.”

    순식간에 싸늘해진 목소리에 그녀는 당황한다.

    “급한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알겠으니 물러가 봐.”

    “예, 성하.”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미안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제국을 집어삼키는 마법사가 그런 얼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그녀는 놀란다.

    “가 봐야 할 듯하군요.”

    “가 보세요, 성하.”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붙잡지 않으시는 건가요?”

    혼란스러워하는 보라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그는 아직 흐르지도 않은 눈물을 닦아 준다.

    “농이었어요. 너무 그렇게 겁먹지 않으셔도 되어요.”

    루슬란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다.

    “밤에 뵈어요, 나의 껍데기 님.”

    “네, 성하.”

    그녀가 대답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이다. 침실에 혼자 남은 그녀는 아직 서늘한 방 안 공기에 떨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그의 체온이 남은 자리는 따뜻하다.

    눈가에 닿았던 손길은 그리도 차가웠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류드밀라는 긴장으로 지친 몸을 누이고 깜빡 잠에 빠져든다.

    류드밀라는 악몽을 꾼다. 캄캄한 숲속을 끝도 없이 달리는 꿈이다. 괴물들에게 쫓기면서 그녀는 뛰고 또 뛴다.

    괴물들은 드리울 것이 없는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들이다. 눈, 코, 입, 귀 어느 하나 제대로 달리지 못한 지옥에서 올라온 것들.

    나뭇가지에 여린 살이 찢겨 생채기가 나고 날카로운 돌에 발이 베여 피가 흐르지만 그녀는 멈추지 못한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그저 달릴 뿐이다.

    숨통을 옥죄는 공포가 느껴진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그녀를 무겁게 짓누른다. 뜀박질이 느려지며 괴물들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온다.

    괴물 하나가 거대한 그림자를 그녀에게 뻗쳐 오는 그때. 서늘한 기운이 이마에서 느껴진다.

    그 기운은 류드밀라를 꿈 밖으로 불러내고 그녀는 퍼뜩 깨어난다.

    눈을 뜨자 그녀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는 루슬란이 보인다. 언제 돌아왔는지 그는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이고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리도 앓는 소리를 애처롭게 내십니까?”

    그녀는 일어나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는다.

    “괴물에게 쫓기는 꿈을 꿨습니다.”

    달래 줄 줄 알았던 그는 눈을 가늘게만 뜰 뿐 별다른 말을 않는다.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는다. 황궁에서 자랐지만 껍데기는 껍데기. 엄한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다만 떨어지지 못한 눈물을 닦아 낸다.

    “나의 껍데기 님.”

    한참이나 정적이 흐른 후에 그가 말문을 연다.

    “전에 그대가 하셨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네, 성하?”

    이불을 끌어당겨 여전히 드러난 몸을 덮으며 그녀가 얌전히 되묻는다. 그가 느리게 웃음 짓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린다.

    “노력하겠다고 하셨죠. 제 씨를 받을 수 있게 말입니다.”

    “네, 성하.”

    그는 픽 웃고는 턱을 놓아준다.

    “그럼 이제 그 말을 지켜 보세요.”

    류드밀라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그의 의중을 이해해 보려 한다. 나보고 다시 유혹을 하라는 말씀이신가. 그러나 이미 옷은 벗고 있고 한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보다 유혹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유혹을 잘하지 못하면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여인들처럼 죽임을 당하든지. 그 생각에 미치자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다.

    그러다 그녀는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서둘러 눈물을 훔친다. 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셨지.

    우는 사람을 범하는 취미가 없다는 말을 그녀는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 때문에 우는 것쯤 괜찮다는 말은 이미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다.

    별것도 아닌 말에 눈물을 떨구다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서둘러 닦는 그녀의 모습은 그 안에 있던 뭔가를 건드린다. 그래서 그는 다정한 웃음을 돌려주며 이불을 톡톡 건드린다.

    “제 씨를 받으시려면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지 않나요.”

    그와 그녀 사이의 유일한 방어막인 것처럼 감고 있던 이불을 그녀는 느린 손길로 내린다. 그러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있다.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루슬란은 그녀가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소를 쉽사리 거두지 못한다.

    “내게 좋은 생각이 났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예, 성하.”

    아까부터 그 대답이 거슬렸던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 호칭부터 먼저 어떻게 하고 듣는 걸로 하죠.”

    “네?”

    “내 이름을 불러 줘요, 나의 껍데기 님.”

    그의 집요한 눈길에 더 움츠러들지도 못하고 류드밀라는 입술만 달싹인다. 그러다 겨우 목소리를 낸다.

    “루, 루슬란 님. 루슬란 님.”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첫 번째 부를 때는 더듬거려 그녀는 얼떨결에 두 번이나 이름을 부른다.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눈치를 보는데 그가 웃음을 터트린다.

    비웃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더없이 행복한 웃음이다. 어쩌면 그녀의 목소리보다도 더 맑게 느껴지는 웃음소리는 그가 웃음을 그친 후에도 메아리처럼 그녀의 귓가를 맴돌며 즐겁게 해 준다.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그가 나지막이 말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 한구석에 몽글몽글한 뭔가가 피어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정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류드밀라는 잘 모른다. 행복을 느껴 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그녀는 그저 기분이 좋다고 여겨 수줍은 미소를 처음으로 입가에 올린다.

    그녀의 미소를 본 그는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미소는 새벽이슬처럼 금방 사라진다.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달이라도 따다 주고 싶다.

    다시 미소 지어 보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는 그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싼다.

    “잘했어요, 나의 껍데기 님. 이제 내 좋은 생각을 들어 볼 차례예요.”

    “네, 루슬란 님.”

    다시 한번 그가 느리게 눈을 휜다. 이제 그 눈짓에 익숙해지고 그게 기분이 좋다는 뜻인 것을 아는 그녀는 더 이상 긴장하지 않는다.

    “내 씨를 받기로 하셨는데 아래로는 못 받으시니. 위로는 받을 수 있을지 시험해 볼래요?”

    “위……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여기요.”

    그는 뺨을 감쌌던 손을 살짝 움직여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훑는다. 당황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입으로요……?”

    “그래요. 입으로요.”

    그가 느릿하지만 힘주어 말해 다시 한번 확인을 시켜 준다. 류드밀라는 불안한 나머지 손가락을 비튼다.

    “제가 어찌 루슬란 님의 씨를 제 천한 입으로…….”

    “누가 그대보고 천하다고 했나요?”

    루슬란의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다. 그의 분위기가 달라진 연유를 모르는 그녀가 몸을 떨기 시작한다.

    “아, 아무도, 아무도 그러진 않았습니다.”

    그랬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19년을 살아오며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이그나티 제국에서 껍데기는 돈을 주고 팔 수 있는 가축보다 못한 존재. 그저 마법사의 씨를 받아 내기 위한 교배용 암말. 그 이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럼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그대는 내게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누구보다 귀하게 대해 줄 테니, 그대도 그대가 천하다는 생각은 버리셔요.”

    “감사합니다, 루슬란 님.”

    아직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저 고맙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로브 앞섶을 느슨히 한다.

    남자의 몸을 처음 보는 그녀는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동자를 휙휙 움직인다. 탄탄한 가슴팍에 둬야 할까, 분홍빛 유두에 둬야 할까, 선명한 근육이 비치는 배에 둬야 할까.

    결국 눈동자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봐 버린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피식 웃은 그가 바지 끈을 풀려 하자 새빨개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다.

    “루,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나의 껍데기 님?”

    그가 자신의 손을 막무가내로 붙잡은 그녀의 새하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묻는다.

    “아닙니다. 죄송해요. 마, 마저 하세요.”

    “뭘 마저 할까요?”

    류드밀라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루슬란은 눈을 가늘게 접는다. 그 눈에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것을 그녀는 알아채지 못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그녀의 여린 몸이 어지러운 듯 앞뒤로 흔들린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머리가 핑 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받쳐 준다.

    그녀가 겨우 중심을 잡자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죄송하다면 그대가 해 봐요.”

    “무엇을 말인가요……?”

    “내 바지 끈을 푸는 것을요.”

    그녀는 더 이상 하얗게 되기는 불가능할 거라는 그의 예상을 깨고 더 새하얗게 질린다. 하지만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손을 뻗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 끈을 조심스레 푸는데 그가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의 품 안으로 넘어지고 만 그녀는 거의 다 풀어진 바지 끈과 그를 번갈아 쳐다본다.

    “왜, 왜 그러시나요?”

    “내가 이러는 게 싫으세요?”

    “……아뇨.”

    이 대답은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쫓아내 죽게 내버려 뒀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진실되었고 그는 다정하게 이마에 키스를 해 준다.

    “그럼 다행이에요.”

    그가 바지 끈을 다 풀고 그의 것을 드러낸다. 남자의 것을 처음 본 그녀는 고개를 그만 돌려 버리고 눈을 감는다. 그런 그녀를 그는 어르고 달래 몸을 기울이게 만든다.

    비록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그의 것을 보니 당혹스럽다. 원래 그것이 저렇게 컸었나. 다른 껍데기들의 말로는 크면 좋다던데 과연 그럴까. 당황해서 생각들이 마구 날뛴다.

    제멋대로 날뛰던 생각은 머뭇거림과 두려움으로 번진다. 저 큰 것을 어떻게 감히 입에 넣을까. 너무 주저해서 그가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입으로 그의 것을 찾아 문다. 눈은 여전히 꼭 감은 채이다. 그 덕에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져 꿀의 달달한 맛을 혀 언저리에서 느낀다.

    루슬란이 마법을 걸어 그런 달콤한 맛이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처음 정액을 맛보게 될 그녀가 당황하지 않도록.

    류드밀라는 그의 것을 다 넣는 대신 아주 일부분만을 입 안에 삼킨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혀를 움직여 귀두 부분을 핥는다. 달콤한 맛을 더 느끼고 싶다.

    눈을 감고 있어 무섭게 생긴 그의 것을 보는 대신 사탕을 빨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자 혀로 핥기가 한결 쉬워진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은 그런 얄팍한 상상으로는 속일 수 없어 가슴은 터질 듯이 뛴다.

    한편 생각보다 잘 핥는 그녀 때문에 그는 미칠 것만 같다. 온갖 난폭한 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날뛴다. 그래도 그는 잘 절제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더 깊숙이 먹어 보세요, 나의 껍데기 님.”

    류드밀라는 들은 대로 한다. 기둥을 끝까지 입 안에 밀어 넣는데 목구멍 안쪽을 건드리며 이물감이 든다. 그러나 그걸 꾹 참고 계속 빨자 그가 나지막한 한숨을 들려준다.

    “하아…….”

    행복감에 겨운 그 한숨에 그녀의 온몸이 기쁨으로 물든다. 그녀가 마법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줬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뿌듯해진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움직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이내 마법사가 허리를 잘게 떤다. 달달한 맛이 더 강해지고 머리가 아찔해질 무렵, 전보다 더 단맛이 올라오는 액체가 목구멍 안에 들어온다.

    “삼키지 말고 입 안에 머금으세요.”

    그녀는 시키는 대로 한다.

    “내게 보여 줘요.”

    고개를 들고 따뜻하게 빛나는 시선과 마주치자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녀는 마치 사탕을 먹듯이 거리낌 없이 그의 것을 빨았다. 게다가 지금 입 안에 든 달콤한 이것은 분명 정액, 마법사의 씨물일 것이다.

    놀라고 창피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이번에도 그는 달래 주지 않고 한참이나 그녀를 가만히 응시한다.

    그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얌전히 입을 벌린 그녀의 모습.

    그는 그 모든 세세한 부분을 기억에 새길 듯이 그녀를 찬찬히 본다. 살짝 벌린 분홍빛 입술과 안에 든 새하얀 정액. 상기된 두 뺨과 눈물을 머금었다가 이제는 흘러내리는 보라색 눈동자.

    “삼켜도 되어요.”

    꼴깍, 하고 그녀가 정액을 삼키자 조그마한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간다.

    “그대가 날 즐겁게 해 주었으니 이제 내가 보답할 차례군요.”

    그녀가 미처 그 말뜻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뒤로 넘어뜨린다.

    “다리 벌려요.”

    그가 속삭이며 손을 그녀 아래로 가져간다.

    류드밀라는 머뭇머뭇하다 부끄러운 듯 눈을 살포시 감고 시키는 대로 한다.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느낌은 언제나 낯설다. 두 번째 겪는 일임에도 그녀는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뻑뻑한 곳을 그가 앞뒤로 몇 번 오가자 젖어 드는 느낌도 이상하기 그지없다.

    첫 번째 그랬을 때 그 이상한 기분이 어떻게 쾌락으로 바뀌었는지 잘 아는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기대를 품는다. 그런 자신이 한없이 창피하지만 예민한 그녀의 몸은 기억한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얼마나 그녀를 기쁘게 해 줬는지.

    그 기쁨은 당황스러움과 무서움과 함께 왔지만, 다시금 느끼고 싶어 하게 된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녀는 얌전히 그의 손가락을 받아들인다.

    손가락 하나로만 그녀의 안을 파고들던 그가 단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나의 껍데기 님.”

    “네?”

    “아프거나 기분이 나쁘면 바로 말해야 되어요. 알겠죠?”

    그는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인다.

    “네, 루슬란 님.”

    손가락이 잠시 빠졌다가 이어서 두 개가 그녀의 안을 푹 찌른다. 전보다 약간 거칠어진 손길에 두려움이 더 커진 그녀가 작게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울음은 꾹 참는다.

    “정말 안이 좁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의 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다. 덕분에 손가락 두 개가 드나들기는 더욱 쉬워지고 그가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

    긴장이 풀어져 용감해진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넋을 잃고 쳐다본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카락을 만져 보려 손을 뻗는 순간 쾌락이 그녀를 덮쳐 온다. 손을 힘없이 떨구고 그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다.

    그녀의 손짓이 의미했던 바를 알아차린 그는 몸을 굽혀 머리카락이 더 흘러내리게 한다. 길고 곧은 머리칼이 그녀의 맨살을 간지럽힌다. 그녀는 간지러워 그가 그토록 다시 보고 싶어 했던 미소를 내비치고 그는 행복감에 가슴이 터질 듯하다.

    그가 자꾸만 그녀의 안 깊숙한 곳을 자극하고 그녀는 다리를 떨며 교성을 내뱉는다.

    “흐읏, 흣, 아응!”

    구멍으로 그의 손가락을 조이면서 류드밀라는 절정에 다다른다. 녹초가 되어 축 늘어진 그녀를 그는 침대에 바로 뉘어 준다.

    “오늘은 유난히 빨리 가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요?”

    차마 그의 야한 말과 배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대신 수줍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제 몸을 숨긴다.

    “루슬란 님께서 잘해 주신 덕분이에요….”

    그는 그녀 옆에 느슨하게 기대앉아 픽 웃는다.

    “어쩜 이렇게 어여쁜 말만 골라서 할까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다감한 손길에도 그녀는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에 그 이유는 불안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니다.

    심장이 쿵쿵, 빠르고 깊숙이 가슴을 울리며 뛴다. 그녀는 눈을 감지만 자지 않고 고른 숨만 색색 내쉰다.

    “왜 잠이 들지 않나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 온다.

    “여기가 계속 뛰어서 잠이 오질 않아요.”

    다시 눈을 뜬 그녀가 가슴에 가녀린 손을 얹으며 말하자 그는 제 심장이 뛰는 속도도 같이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제가 잠들게 해 줄게요.”

    큰 손이 그녀의 가슴팍에 가볍게 놓인다. 곧 손 주변이 하얗게 밝아져 빛이 일렁이더니 심장 뛰는 속도가 느려지며 그제야 잠이 밀려온다.

    “감사해요, 루슬란 님.”

    잠들기 직전, 그녀가 웅얼거린다.

    “천만에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악몽도 꾸지 않을 깊은 잠에 빠져든다.

    ***

    류드밀라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이다. 잠에서 깨어나 알아챈 사실은 그녀의 어깨에 그가 팔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의 품에 파고든 모양이라는 것도.

    당황한 그녀가 몸을 작게 움찔거리자 그는 반대 손으로 읽던 책을 톡 떨구고는 그녀를 돌아본다. 찬란한 미소가 눈부시게 시야를 어지럽힌다.

    “잘 잤나요?”

    “네, 루슬란 님.”

    그의 미소는 다시 보니 포근하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괜스레 미소 지을 것 같아 시선을 떨군다.

    “식사를 할까요, 아님 조금 더 쉴래요?”

    “조금만 더 쉬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다면요.”

    “그럼 더 쉬세요.”

    그의 어깨에 순순히 기댄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든다.

    “지금이 낮인가요 아침인가요?”

    “언제인 것 같나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지만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진 데다 침대마저 휘장을 내려뜨려 밖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대가 언제이면 좋겠다고 말하면 내가 그때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밤이든.”

    “저는 아무 때나 상관없어요.”

    이렇게만 말했다가 무례하게 들릴 것 같아 그녀는 황급히 뒷말을 덧붙인다.

    “저, 저는 밤이면 좋겠어요. 루슬란 님께서 저와 함께 있으실 수 있게.”

    “그대가 원한다면 낮이고 밤이고 함께 있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는 차분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한다.

    “그대는 나와 있는 게 좋은가요?”

    “네.”

    물론이죠, 당연하죠-와 같은 겉치레 같은 말은 내버려 두고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힘 있게 대꾸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의외라는 눈빛을 하곤 둘렀던 팔을 치운다.

    “그대는 날 두려워하잖아요.”

    그녀가 그의 어찌 보면 차갑게도 느껴지는 태도에 놀라 입을 열려 하자 그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린다.

    “거짓말할 생각은 마시어요.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대의 가냘픈 목을 손수 비틀 테니.”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 류드밀라는 두렵고 당황하여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그래도 한번 어그러진 그의 마음은 쉬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가 다정한 말을 해 주듯이 그의 마음에 들 만한 말을 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예쁜 말솜씨가 부럽고 고마워서. 게다가 그녀는 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던 중이었다. 그래서 그의 반응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번에도,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계속 그렇게 우세요, 나의 껍데기 님. 지금처럼 앞으로도 쭉, 나 때문에 우시고 나를 두려워해요.”

    애처롭게 흐느끼는 것을 달래 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고 그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녀는 완전히 겁에 질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못 하고 얼어붙어 있다.

    “그대가 날 두려워하니 곁에 있으면 안 되겠군요. 그대가 계속 우니 하실 말씀도 없어 보이고요.”

    그가 로브를 여미며 침대에서 내려선다.

    “가 볼게요.”

    그 말에 류드밀라는 제가 뭘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의 로브 자락을 붙든다. 아니, 붙들려고 침대 밖으로 몸을 내밀다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엎어지고 만다.

    “흑, 가지 마세요. 제발요.”

    차마 그의 가라앉은 은빛 눈을 볼 용기는 없어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애원한다. 왜 그러는지는 그녀도 모른다. 다만 지독히도 어두운 방에 혼자 남고 싶지 않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나중에 쫓겨날 것만 같다. 더 이상 그의 다정한 눈길을, 손길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깊은 곳부터 쓰라려 온다.

    그는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온몸을 떠는 그녀를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묻겠어요. 내가 두려운가요, 나의 껍데기 님?”

    “네, 두려워요. 두렵고 끔찍이도 무서워요. 하지만 제 곁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더 이상 루슬란 님을 무서워하지 않을 날까지요.”

    마음의 문을 열던 중이던 류드밀라는 그의 거절에도 문을 조금 더 연다. 그렇게 하면 그가 들어올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면 그에게 버림받아 목숨을 잃을 것 같아서. 그가 그녀가 조금 열어 둔 문틈으로 들어와 전처럼 대해 주길 바라본다.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그의 다정함에 빠져들고 있다.

    류드밀라는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고 고개는 떨구고 있느라 그의 눈빛이 한순간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한 번만 더 애원해 보아요.”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를 내자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연다.

    “흐윽, 제발 가지 말아 주세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그녀가 그를 겨우겨우 올려다본다.

    “절 떠나지 말아 주세요, 루슬란 님.”

    고운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곁에 남아 달라 애걸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제 로브를 벗어 그녀의 헐벗은 몸에 둘러 준다. 로브 안에 입은 하얀 셔츠가 눈물로 얼룩질 때까지 그녀를 껴안아 준다.

    “이런 그대를 두고 제가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다시 돌아온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한 그녀는 더 크게 흐느끼며 아기처럼 품에 파고든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아까 한 말은 미안해요. 그대를 믿지 못한 것도 미안해요. 그대가 날 두려워하면서도 거짓을 고하고 있다는 생각에 심통을 부리고 말았어요.”

    엉엉 우는 그녀를 안고 달래 주며 그가 사과한다.

    “흐으, 사과하지 마세요.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울음 사이사이로 그녀가 억울한 말을 토해 낸다. 그는 그 말이 다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안고 있다.

    작은 딸꾹질로 울음이 잦아들 무렵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려 다시 침대에 눕힌다. 그가 둘러 준 로브를 몸에 감싸고 그녀는 그가 침대에 올라와 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본다.

    로브에서는 그의 체향이 올라온다. 코끝을 시리게 하는 겨울 냄새와 그 안에 갇힌 채 희미하게 나는 레몬 타르트 냄새. 그러고 보니 전날의 아침 식사에 레몬 타르트가 있었다. 비록 그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내려앉은 정적을 그녀가 먼저 깬다.

    “레몬 타르트를 좋아하시나요?”

    “왜 갑자기요?”

    엉뚱한 그녀의 질문에도 그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어 주며 그가 되묻는다.

    “옷에서 레몬 타르트 냄새가 나요.”

    “그렇군요. 좋아한답니다. 자주 먹을 만한 호사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어째…서요?”

    그녀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자 그는 그 질문에 내포된 숨은 의미를 찾아내곤 씁쓸하게 웃는다. 그녀는 그가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니까.

    “마법을 쓰면 대가를 치러야 해요. 나는 강한 만큼 많은 것을 포기했답니다. 마법을 많이 쓰면 혀에 가시가 돋친 듯해 음식을 삼킬 수가 없고, 물도 겨우 마시곤 해요.”

    “그럼 마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나요?”

    걱정으로 가득하고 순진한 물음이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곳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나의 의무니까요. 아무리 이곳이 싫어도, 아무리 이곳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만들고 싶어도.”

    어느새 또 눈물이 고인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을 훑으며 그가 말한다.

    “하지만 그대를 위해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내 말은 진심이에요. 나를 위해서는 하지 못했던 것을 그대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 말에 꽁꽁 숨겨 왔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는 왜 그녀를 그에게 보내졌던 다른 껍데기 여인들처럼 죽이지 않고 이렇게도 아껴 주는 것일까. 류드밀라는 그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편 루슬란은 그런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가 그에게서 멀어질까, 그를 더 두려워할까 무섭다. 비록 지금은 저주와 맹세에 얽혀 이그나티 제국에 묶여 있는 신세지만, 언젠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영원히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말하기 두려운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기구하다고 여기며 그가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이다.

    그때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고 내려 손마디에 입을 맞춘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모든 진심이 그 조그마한 입맞춤에 담겨 있다.

    그는 눈을 휘며 아름답게 미소 짓고 그녀의 뱃속에서는 나비들이 파닥파닥 날아다닌다.

    그리고 또 침묵이 내려앉을 무렵 그가 막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낸다.

    “아, 궁금하지 않은가요?”

    “무엇을 말인가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는 어떤 마법을 쓰는지. 보여 줄게요, 나의 껍데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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