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그의 다정함 (4/20)
  • 3. 그의 다정함

    류드밀라는 본디 월경통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번 월경은 다르다. 그 달의 처음 며칠을 루슬란 곁에서 항상 긴장하고 두려움에 떠는 상태로 보내 몸이 안 좋아졌는지, 막상 월경을 하는 것을 자각하고 나자 통증이 심해진다.

    아랫배가 욱신거리고 허리가 당겨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는 그녀를 위해 루슬란은 최선을 다한다.

    월경을 하는 여인은 단것을 먹고 싶어 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온갖 과자와 그녀가 처음 보는 과일들을 준비해 준다. 과자와 과일이 가득 담긴 쟁반을 내밀며 본인이 주방에서 직접 골랐다고 뿌듯하게 말하는 모습에 몽글몽글한 기분은 커져만 간다.

    이렇게 대접받는 경험은 처음이다. 그 몽글몽글한 기분은 어쩌면, 그녀의 존재가 루슬란 안에서 정말 특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일지도 모른다.

    그는 황제가 부를 때를 빼곤 곁에 꼭 붙어 있으면서 아픈 아랫배에 손을 얹고 온기를 전해 준다. 그럴 때면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그의 손은 따스한 황금색으로 일렁이고 있다. 판판한 배를 가끔씩 어루만져 주며 그녀가 쉽게 잠들도록 자장가도 불러 준다.

    또 그녀가 침대에 누워만 있어 지루해할까 봐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읽어 주거나 그녀가 읽는 모습을 지켜봐 준다. 한번은 침실로 궁중 악사들을 불러 아름다운 현악 4중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녀는 처음 들어 보는 제대로 된 음악에 완전히 매혹되어 가락을 이따금 흥얼거린다.

    하루는 그가 그녀가 질겁할 만한 말을 한다.

    아침으로 나온 블리니에 블루베리 잼을 듬뿍 발라 그녀에게 먹여 주던 그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연다.

    “이러니 꼭 그대가 아이를 배어 제가 돌봐 주는 것 같네요.”

    블리니를 한입 베어 물던 그녀는 그만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고 만다. 어디가 잘못 걸린 건지 기침은 한동안 계속되고 그가 내민 컵에서 우유를 한 모금 마시자 겨우 진정된다.

    “그대는 아이를 배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니 제가 다 놀라겠어요.”

    걱정스레 물은 그는, 그를 보기가 부끄러워 컵에 얼굴을 박아 버린 그녀의 등을 쓸어 준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컵을 내리고서도 시선을 들지 못한다.

    “저, 저는 물론 루슬란 님의 아이를 배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의 아이예요. 제 아이가 아니라.”

    그가 조금은 단호하게 고쳐 준다. 그러자 다시 그 몽글몽글한 느낌이 들고 그녀는 용기를 조금 얻는다. 그래서 마침내 시선을 조금 올려 그를 바라본다.

    “감사해요.”

    그는 여전히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한다.

    “아이를 배면 좋을 것 같지만, 뭔가요?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직은 조금 이른 것 같아서요. 제가 준비가 덜 되어 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뭐가 무서우신가요?”

    차마 아이를 밴 채로 그에게서 버림받는 것이 두렵다고는 하지 못한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핑곗거리를 찾다가 이것도 일종의 거짓말임을 깨닫는다. 사실만을 말하기로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머뭇머뭇하다 결국 진실을 말하고 그의 얼굴에서 놀라고 상처 받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나의 껍데기 님,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그가 슬퍼하며 조용히 말한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존재가 다하는 그 날까지 그대 곁을 지킬 거예요. 그대를 사랑하니까요.”

    “…….”

    그녀가 무슨 말을 웅얼거린다. 혹여나 두려워하는 말일까 봐 그는 서둘러 그녀의 양 뺨을 쥐고 다정히 눈을 맞춘다.

    “뭐라고 하셨나요, 나의 껍데기 님?”

    “저도, 라고 했어요. 저도 루슬란 님을 사랑한다고요.”

    그 말에 루슬란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를 보여 준다. 그 미소에 홀려 그녀는 손을 뻗고 그가 제 뺨을 쥐듯이 한 손으로 그의 뺨을 담는다.

    그녀의 뺨에서 손을 내린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제 몸에 기대게 한다. 익숙한 겨울 냄새와 레몬 타르트 향이 그녀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그의 품에서 눈을 살며시 감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도 행복하긴 마찬가지이다. 항상 자신을 두려워만 하던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는 소반에 담긴 과일을 하나 집어 건넨다.

    “산딸기도 먹어 봐요.”

    낯선 이름에 조심스레 눈을 뜬 그녀는 조그맣고 빨간 구슬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과일을 받아 든다. 그리고 입에 넣는다. 과일을 잼으로만 먹어 본 그녀에게는 새로운, 새콤달콤하고 향이 깊은 맛이 난다.

    “맛있어요.”

    류드밀라는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다행이네요. 더 드세요.”

    그가 아예 그릇째로 내민 산딸기를 그녀는 조심스레 하나 집고, 그러면서도 너무 욕심꾸러기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눈치를 살핀다. 그 망설임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그는 씁쓸함을 삼킨다. 상급 마녀들의 엄하고 혹독한 교육 아래서 자란 그녀가 안타깝다.

    류드밀라가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그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내는 것도, 루슬란의 안타까움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녀를 위해 더 해 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루슬란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린다. 산딸기를 하나 더 집어도 괜찮을지 고민에 빠진 그녀를 그가 은빛 눈을 반짝이며 돌아본다.

    “저번에 악사들의 노래가 정말 좋다고 하셨죠?”

    “네, 루슬란 님.”

    결국 산딸기를 포기한 그녀가 매혹적이었던 그 선율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노래는 원래 수십 명이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거랍니다. 이번에 황실 겨울 연회 후에 공연이 있을 텐데, 저와 함께 가 보시겠어요?”

    그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황실 겨울 연회라면 분명 사람이 엄청나게 많을 테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과연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그녀의 고민 두 가지 모두를 눈치챈 그가 산딸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주며 조곤조곤 이른다.

    “혹시 박스석을 아시나요? 공연장 벽 쪽에 붙어 있는 좌석인데, 작은 방처럼 다른 좌석들과 분리가 되어 있답니다. 우리는 박스석에 앉을 거예요. 그러니 다른 이들의 시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녀가 또 다른 물음을 담은 시선을 던지자 그는 아이를 달래듯 산딸기 하나를 더 입에 넣어 준다.

    “가는 길도 걱정하지 마셔요. 순간 이동을 할 테니 말이에요. 게다가 공연이 시작되면 안이 어두워져 아무도 우릴 보지 못할 겁니다.”

    산딸기를 오물오물 먹으며 손가락을 배배 틀던 그녀는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그러면 가 보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그의 달래는 말들에 걱정은 서서히 잊히고 기대감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가 계속 주는 산딸기를 열심히 받아먹으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공연은 언제인가요?”

    “오늘 밤이에요. 그리고 당부드릴 것이 있는데, 부디 보고 놀라지 마셔요. 그대가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일 테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대꾸한다. 그녀는 악단이 얼마나 화려하면 그럴까 여기며 잠시 공상에 빠져든다. 사실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은 것도 현악 4중주를 들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그녀로선 수십 대의 악기 소리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 공상에서 헤어 나온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시선에 결국 그는 이미 예고된 그의 장난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씩 푼다.

    “오늘 공연에서 연주될 곡에는 이야기가 있어요. 책으로도 쓰인 이야기죠. 도서관에 가서 함께 찾아보실까요?”

    “좋아요.”

    월경이 시작된 후 며칠을 그와 함께 보내며 조금씩 용기를 얻은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말한다.

    가운을 여미자마자 그들은 도서관 구석에 마련된 푹신한 소파로 이동해 있다. 그가 손을 내밀고 실을 튕기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거대한 책장 사이에서 책 한 권이 빠져나와 그들 쪽으로 둥둥 떠온다.

    “읽어 보실래요?”

    “호, 호두, 까, 까기 인, 혀, 형.”

    급한 마음에 더듬거리며 읽은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를 돌아본다.

    “호두까기 인형이 무엇인가요?”

    “보여 드릴게요.”

    그가 이전에 마법을 보여 줬던 때처럼 손바닥을 펼치고 공중에 일렁이는 인형의 모습 하나를 띄운다.

    멋들어진 콧수염에 새빨간 제복을 입은 병사 인형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래턱이 유난히 크고 머리 뒤편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것인데, 그 용도는 아마 호두를 까는 것이라고 그녀는 짐작해 본다.

    “이렇게 입 안에 호두를 넣어서 까는 인형이랍니다.”

    그가 손을 살짝 움직이자 인형의 입이 벌려졌다가 닫힌다. 그녀는 작게 탄성을 내지르고 신기해하며 한참이나 인형의 모습을 살핀다. 어렸을 적에도 인형은 가져 보지 못한 그녀에게 이런 것은 가슴 안쪽을 쿡쿡 찌르는 뭔가 슬프고 아련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책을 읽어 드릴까요?”

    그녀의 바뀐 표정을 보고는 마법을 거둔 그가 묻는다. 그녀가 글자를 읽고 쓸 수는 있어도 아직은 빠르게 읽는 것이 미숙하기에 물어보는 것이다.

    “네, 좋아요.”

    그는 전혀 유치하지 않게 담담한 음성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고 그녀는 그의 목소리와 책에 실린 삽화에 금세 빠져 버린다.

    책은 클라라라는 소녀가 겨울 축제 스비얏키의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호두까기 인형이 너무 좋아 밤에 응접실에 내려가 본 클라라는 생쥐 대왕, 그의 신하들과 호두까기 인형이 싸우는 것을 보게 되고 호두까기 인형을 구해 준다.

    그러자 호두까기 인형은 아름다운 소년으로 변해 눈송이 요정들의 송별회를 받으며 그녀를 과자의 나라로 데려간다. 과자의 나라에서 소년과 클라라에게 과자들은 자신들의 춤을 선보이고 화려한 꽃들의 춤도 보여 준다. 잠에서 깨어난 클라라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지만, 행복한 겨울 축제 아침을 맞이한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류드밀라는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환상적인 일들을 꿈을 통해 겪은 소녀의 심정이 정말 이해가 갔다.

    혹시 지금도 엄청나게 긴 꿈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며 팔을 꼬집어 보다가 괜히 상처만 남긴 그녀는 루슬란이 책을 한 권 더 불러오는 모습을 본다. 아마 공연 전까지 책을 읽어 줄 생각인 듯싶다.

    그렇게 저녁때가 될 때까지 책을 읽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나갈 준비를 한다. 평소처럼 그저 가운을 여미는 류드밀라에게 별안간 루슬란이 조용히 손짓한다.

    그가 부른 침실 구석에는 전에는 없던, 하얀 천을 씌운 마네킹이 있다.

    “천을 벗겨 보셔요.”

    그의 말대로 천을 벗기자 천 아래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혀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옷이지만 우아하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이지만 그녀는 예전부터 목을 감싸는 옷, 특정 짓자면 마녀들의 제복을 싫어했으니 괜찮았다. 어깨에 달린 주름 장식은 우아한 날개처럼 뒤쪽으로 늘어졌고 허리에는 룬 문자가 수놓아진 띠가 둘러져 있다.

    풍성하지 않고 소박한 멋을 자랑하며 늘어진 치맛단에는 자잘한 별꽃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화려함이 류드밀라가 입고 싶어 했던 상상의 옷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마법으로 지은 옷은 그대에게 좋지 않다고 해서 재봉사들에게 내가 특별히 부탁했어요.”

    그녀가 놀라고 기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루슬란이 말하며 다가와 마네킹에서 옷을 벗겨 그녀에게 내민다.

    “입어 보셔요.”

    그녀가 조심조심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시녀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단순했다-등의 단추를 마저 채워 준 그가 그녀를 거울 앞으로 데려간다.

    거울 앞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소녀가 서 있다. 가는 몸에 딱 맞는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미소를 입에 건 소녀가. 그녀가 그 소녀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데 거울에 아름다운 마법사가 와 소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마음에 드시나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 오자 그녀는 들뜨고 기쁜 마음에 까치발을 하고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긴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루슬란 님. 감사해요.”

    “이것도, 이것도 해 보셔요.”

    그가 그녀를 꼭 껴안아 준 후에 마네킹에 걸려 있던 은 목걸이를 가져온다. 아주 얇은 은사슬 끝에 물고기의 꼬리가 달린 목걸이이다.

    “내 강에 살던 물고기의 꼬리를 본뜬 거예요.”

    “루슬란 님의 강이요?”

    류드밀라가 놀라서 묻자 그의 얼굴이 약간 슬퍼진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요. 내가 태어난 곳 바로 옆에는 강이 있었거든요. 거의 내 집이나 마찬가지였죠.”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그녀는 그가 목걸이를 채워 주는 손길에 얌전히 있다. 차가운 은사슬의 감촉이 목덜미에 닿자 그제야 실감이 난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다.

    “이제 가 보실까요?”

    자꾸만 거울 속 자신을 돌아보는 그녀에게 그가 손을 내민다. 어느새 그도 평소에 입던 편한 셔츠와 로브 대신 마법사의 제복을 입고 있다. 그에게 섬뜩하도록 잘 어울리는 옷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낯선 느낌에 그녀는 잠시 무서워한다.

    겨우 루슬란의 손을 잡자 그는 바로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다.

    그들이 이동해 온 박스석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의자 두 개와 다과가 담긴 테이블만 있어 소박했지만 동시에 다른 관객들과 분리된 특별한 공간이라는 점이 사치스러웠다.

    자리를 잡자 무대가 보인다. 그런데 악사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무대는 텅 비어 있고, 대신 악단은 무대 앞에 파인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에 들어가 있다.

    이것 또한 루슬란의 짓궂은 장난이라 여긴 류드밀라는 놀라서 그를 돌아본다.

    “왜 무대를 비워 뒀죠?”

    “쉬이, 공연이 곧 시작될 거랍니다. 그때 알게 될 거예요.”

    그의 말대로 곧 불이 어두워지더니 무대가 환하게 밝아진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무대 뒤편이 어두운 파란색으로 물들더니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곡이 시작된다. 4대의 악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웅장하고 매혹적인 선율이 귀에 와 닿는다. 처음 듣는 목관 악기와 금관 악기의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전에 들어 봤던 현악기의 소리도 더욱 풍성해진 느낌이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며 무대 왼편에서 어느 여자 하나가 소녀를 끌고 걸어 나온다. 처음에 류드밀라는 그녀가 길을 잘못 든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은 스스럼없이 당당하고, 당황한 기색 또한 없다. 게다가 여자와 소녀 둘 다 발끝으로 서서 걸었는데, 그러면서 팔을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한 마리 백조 같다.

    그제야 그녀는 깨닫는다. 저들은 무용수구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냥 보통 연주가 아닌 발레 공연이었던 것이다.

    깨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사람들이 무대를 가로질러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우아하게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마치 밖에 나와 있는 듯 두꺼운 코트와 모피를 걸쳤지만 우아한 몸짓을 숨기기에 옷은 턱없이 부족하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그들 모두가 정말 들떠 있다는 것이 몸짓과 경쾌한 음악으로 표현된다.

    “겨울 축제 스비얏키 동안 열린 파티의 손님들이에요.”

    루슬란이 속삭이자 그녀는 책의 내용을 기억해 낸다. 그래, 책의 첫 장면이 클라라의 집으로 향하는 파티 손님들이었지. 그녀는 무용수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난간에 몸을 기대고 기울인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손님들이 연회가 열리는 거대한 홀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코트를 벗은 손님들의 화려한 드레스는 서로 모양이 다르면서도 한데 어우러진다. 풍성한 자락과 부풀려진 허리 아랫부분이 드레스 하나하나에 무척 공을 들인 티가 난다.

    그때 손님들 사이로 아이들이 나타난다. 남자아이들은 목마를 타고 칼을 든 채, 여자아이들을 각자 선물로 받은 인형을 든 채 원을 그리며 뛰어다니고 춤을 춘다. 그러면서 활발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분위기가 고조되며 트럼펫 소리 사이사이로 현악기의 글리산도가 들리고 아이들의 발이 빨라진다.

    또 현을 부드럽게 튕기는 소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류드밀라는 귀를 활짝 열어 두고 그 소리가 다시 들리기만을 기다린다.

    행진곡도 끝이 나고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른들이 춤을 추며 좀 더 성숙하고 웅장한 음악이 나온다. 이제는 음악보다 무용수들의 춤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는 펄럭이는 드레스 자락과 양복 꼬리 부분, 복잡한 스텝과 우아한 팔 동작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다.

    그때 곡의 분위기가 바뀌며 신비롭고 음산한 음악이 깔린다. 커다란 상자를 든 하인들을 이끌고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손님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다. 얼굴에 가면을 쓴 그는 책에 나오는 대로 클라라의 대부인 드로셀마이어일 것이다.

    드로셀마이어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겁을 주고 그런 동작마저도 우아한 춤으로 연결한다. 아이들을 한참 놀리던 그가 하인들을 시켜 상자를 열자 두 악마 인형이 튀어나와 춤을 춘다. 정열적인 리듬에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악마 인형의 춤은 갑작스럽게 시작한 만큼 금세 끝을 맺고 왈츠가 시작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나는 3박자 풍의 왈츠를 이어 나가던 공연은 클라라가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으며 부드러운 선율로 바뀐다.

    한참 인형과 춤을 추던 클라라를 동생인 프리츠가 나타나 방해하다 그만 인형을 망가뜨리고 만다. 인형이 망가지는 순간에 류드밀라는 헉, 소리를 내며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루슬란이 등을 토닥이자 겨우 눈을 뜬다.

    책을 읽은 덕분에 인형을 드로셀마이어가 고쳐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다. 클라라가 슬퍼할 동안 손님들은 하나둘씩 연회장을 떠나고 밤이 된다.

    열두 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무도 없는 연회장에서 스비얏키 트리가 점점 커진다. 안 그래도 배경에 있던 트리를 무용수 대신 흘긋흘긋 보고 있었던 그녀는 놀라서 입을 벌린다. 온갖 장식과 금술이 달린 트리는 커지고 커져 공연장 꼭대기에 닿을 정도로 자라난다.

    거대한 트리 아래서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나타난 생쥐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어느새 크기가 커진 듯한 호두까기 인형은 생쥐 대마왕과 결투를 벌이고 밀리는데, 의자에 숨어 있던 클라라가 신발을 던져 생쥐 대마왕을 맞혀 호두까기 인형을 구한다.

    그러자 호두까기 인형은 황금색 술이 달린 붉은 제복을 입은 멋진 왕자로 변해 클라라를 반긴다.

    “클라라가 자란 것 같아요.”

    어린 소녀였던 무용수가 마찬가지로 커진 왕자의 키와 엇비슷해지자 류드밀라가 속삭인다. 그녀의 눈이 엄청나게 신기한 것이라도 본 듯 반짝인다.

    “무용수가 바뀐 거죠.”

    루슬란이 마주 속삭이고 그들은 다시 공연에 집중한다.

    과자의 나라를 향해 떠나는 클라라와 왕자를 눈송이 요정들이 배웅해 준다.

    그런 규모의 군무를 처음 보는 류드밀라는 눈을 깜박이는 것을 잊을 정도로 춤에 빠져든다. 새하얀 드레스에, 손에는 눈꽃 지팡이를 들고 귀는 뾰족하게 분장한 요정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여러 겹의 비치는 드레스 천이 요정들이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릴 때마다 하늘거린다. 근육으로 탄탄한 다리의 실루엣이 비치자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지만, 적응이 되자 야하다기보단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악단 뒤에 있던 성가대가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하고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전율이 인다. 가사 없는 아, 의 반복이 이토록 황홀하게 느껴지다니.

    눈송이 요정의 아리아가 끝나자 무대 커튼이 닫히고 불이 들어온다. 분명 이야기의 끝은 이게 아닌데. 당황한 류드밀라에게 루슬란이 일러 준다.

    “잠시 휴식 시간이랍니다. 공연이 길면 무용수도, 악단도, 관객들도 지치기 마련이죠. 화장실에 다녀올래요?”

    딱히 가고 싶지 않았던 터라 그녀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대신 다과 옆에 놓인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계속 벌리고 있었던 터라 입이 바싹 말라 있다.

    그리고 고개를 난간 너머로 살짝 숙여 아래서 분주하게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무용수들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그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예쁜 드레스를 골라 왔을 터. 그녀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폭 빠진다.

    “뭐가 그리 눈길을 사로잡았나요?”

    “그냥 모든 게 다 신기해요. 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난간에 기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그가 뒤에서 껴안는다.

    “저들 말고 나도 봐 줘요, 나의 껍데기 님.”

    그날 저녁 내내 몽글몽글한 기분이 커져만 가 조금은 대담해진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는 살짝 웃으며 뺨 대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그들은 모른다. 관찰의 대상이 되던 이들이 관찰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볼일을 보고 자리에 돌아온 이들이 박스석의 연인 한 쌍을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들은 입맞춤을 나눈다.

    2막이 시작되며 불이 꺼지자 그들은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서로에게서 떨어진다. 나머지 공연은 끊임없이 그녀를 매혹하며 정신없이 흘러간다.

    클라라와 왕자는 과자의 나라에 있는 마법의 성에 도착하여 다양한 과자들의 춤을 관람한다. 초콜릿 요정의 열정적인 춤, 커피 요정의 신비롭고 정적인 춤, 차 요정의 발랄하고 유쾌한 춤, 전통 과자의 난이도 높은 트레팍, 갈잎 피리 요정의 귀엽고 깜찍한 춤, 생강 어머니와 광대의 신나는 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들의 왈츠가 시작되었을 때, 류드밀라는 넋을 잃고 군무를 지켜본다. 어떻게 저 많고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동작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구름 위를 걷는 듯 몽환적인 하프 소리와 금관 악기의 웅장하고도 우아한 소리가 어우러져 귀를 즐겁게 해 준다. 아니, 단순히 즐겁다는 것으로는 이 기분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완전히 매혹되어 무용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꽃의 왈츠가 끝나자 파드되가 이어진다. 클라라와 왕자가 같이 춤을 추고, 왕자의 타란텔라와 설탕 과자 요정의 독무도 선보여진다. 무용수들이 하나씩 부리는 온갖 기교에 류드밀라는 선물을 뜯어 보는 아이처럼 잔뜩 설레고 들뜬다. 마지막으로 클라라와 왕자가 춤을 한 번 더 추고 다음에는 무용수 모두가 나와 왈츠를 추는 것으로 공연이 마무리된다.

    책에서처럼 클라라는 긴 꿈에서 깨어나 아침을 맞이한다. 커튼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고 무용수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한다. 류드밀라는 그때만큼은 아쉬움에서 벗어나 무용수들을 위해 열심히 박수를 친다.

    커튼이 정말 마지막으로 닫히고 사람들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걸 구경하는데 루슬란이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발견한다.

    “왜 우셨나요, 나의 껍데기 님?”

    “너무 행복해서요. 행복해서 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만큼 공연이 좋으셨나 봐요. 다행이에요.”

    그의 어깨에 기댄 그녀는 공연 하나에 그리도 기뻐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러워져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루슬란 님?”

    “사람들이 다 가고 악단도 떠났으니 내려가 볼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들은 객석에 앉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한 걸음 물러서서 손을 닿을 듯 말 듯 내민다.

    “잡아 보셔요.”

    그녀가 손을 뻗자 획 피한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한 걸음 더 물러선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가고 그렇게 그들은 텅 빈 공연장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맑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고 온 날 밤 류드밀라는 지쳐서 꿈도 없는 잠에 빠져든다. 공연 자체보다 그 후에 한 술래잡기가 몸을 무척 피로하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익숙한 광경과 마주한다. 루슬란이 잘 주무셨냐고 다정하게 물어 오는 모습과. 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요즘에 부쩍 미소 짓는 일이 늘었다-잘 잤다고 대꾸한다.

    그는 이미 준비된 식사 쟁반에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그녀에게 내민다. 한겨울에 신선한 채소가 얼마나 사치인지 아는 그녀는 아삭아삭한 양상추와 달콤한 방울토마토를 꼭꼭 씹어 삼켜 샐러드를 남김없이 먹는다.

    따뜻한 크림수프도 그녀에게 떠먹여 주고 그녀가 흘린 방울들을 공중에 띄워 무심히 가지고 노는 그를 바라보다 문득 그녀는 의문이 생긴다.

    “루슬란 님.”

    “왜 그러시나요?”

    “루슬란 님께서는 마법을 많이 쓰시면 음식을 잘 안 드신다고 하셨죠.”

    그는 가지고 놀던 수프 방울들을 냅킨으로 돌려보내고 그녀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본다.

    “맞아요.”

    “그래도 인간이라면 음식을 드셔야 살 수가 있을 텐데, 저는 루슬란 님께서 무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대는 제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가 묻는다. 그 물음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그녀는 겁에 질린 모습을 숨기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는 씁쓸함을 삼키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달랜다.

    “농이었어요. 저도 먹기는 먹지만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뿐이랍니다.”

    “왜요?”

    “음, 먹는 모습을 보이면 내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싫어요.”

    별안간 응석을 부리고 싶어진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저한테도 싫으신가요?”

    “내가 그대 앞에서 뭘 먹었으면 좋겠나요?”

    그가 웃음을 참으며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네, 그럼요. 허구한 날 저에게만 뭘 먹여 주시고 제가 먹여 드린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그를 본다.

    “요즘은 마법을 많이 쓰지 않으셔서 입맛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제가 먹여 드릴까요?”

    사실 그의 입맛을 쓰게 만드는 마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종류였지만,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 아픈 것도 여전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서.

    예상대로 그녀는 그에게 환히 웃어 준 다음에 빵 한 조각을 조심스레 떼어 수프에 찍는다. 그리고 수프가 흐르지 않도록 손으로 받치고 그의 입에 가져다 대 준다.

    빵을 받아먹은 그는 입 안에 밀려오는 쓴맛과 아픔을 무시하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댄다.

    “제가 걱정되는 건가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그의 머리를 새털처럼 가볍게 쓸어 주며 말을 시작한다.

    “항상 전 받기만 했잖아요. 그래서 루슬란 님을 위해서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요.”

    “나를 걱정하는 것도 그 바람 중 하나인가요?”

    “네, 항상 전 걱정만 끼쳐 드렸잖아요. 그런 것들이 달라졌으면 해요.”

    아예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받는다. 한없이 평온한 표정이지만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약간의 걱정이 흩뿌려진다.

    “달라지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요. 그대는 내 사랑과 걱정과 보살핌 속에서 존재하면 되어요.”

    류드밀라를 덜컥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은, 그 말에 상처 받고 기분이 안 좋아진 자신이다. 그가 그녀를 아껴 주겠다는데 왜 기분이 이토록 찜찜한 걸까.

    그건 루슬란이 그녀를 그저 갖고 놀면 재밌는 인형처럼 여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생각보다 그런 구석에 예민했고, 그의 감정에 매우 민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 내어 입을 연다.

    “저는 달라지고 싶어요.”

    그의 말에 반대하는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그녀가 조그맣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화난 기색 없이 그저 궁금하다는 눈길을 던진다.

    “저는 루슬란 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왜인가요?”

    “그렇게 해서 제게 해 주셨던 모든 것들을 다 갚으려고요.”

    그의 걱정이 약간 더 짙어진다. 그 사소한 변화도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 그녀는 신기하다. 그만큼 그와 오래 지냈고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난 갚을 것을 원하며 그대에게 모든 일들을 베풀지 않았어요. 그대는 존재 자체로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예요. 그러니 나 때문에 더 뭔가를 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가 시무룩해져 고개를 떨구자 그가 누운 채로 그녀의 턱을 간지럽혀 고개를 다시 들게 한다.

    “하지만, 그대를 위해서 달라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보아요. 전에 글자를 배웠던 것처럼, 그대를 위해서 하는 일은 다 좋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 순수하고 여린 마음에 한 가지 바람이 싹튼다. 어젯밤 보았던 공연과 루슬란의 사랑이 심어 놓은 싹이.

    “저는 춤을 배워 보고 싶어요. 그래서 루슬란 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나는 보는 것보다 같이 추고 싶은걸요.”

    이번에는 그가 생각에 빠질 차례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오늘 밤 황실 겨울 연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무도회가 있을 거예요.”

    그녀가 그 모든 사람들 앞에 나간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뜨자 그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무도회에 가자는 말이 아니어요. 무도회가 끝나면 무도회장은 텅 빌 거예요. 그때 가서 같이 춤을 추도록 해요. 어떤가요?”

    “좋아요.”

    기뻐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 걸 숨기려고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뗀 그녀는 그의 눈가를 찌르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그는 그녀의 손길에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는 맹수처럼 하품한다. 날카롭고 새하얀 송곳니가 엿보인다.

    “그때는 아주 늦은 시각일 테니 지금 미리 잠을 자 두도록 해요.”

    “네, 루슬란 님.”

    그녀도 베개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르게 쉬다가 잠에 빠져든다.

    류드밀라가 깨어났을 때는 저녁때가 다 되어서이다. 그제야 제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루슬란이 피 냄새를 맡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지만 그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한다.

    잘 주무셨냐고 한 후에 그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침대 밖으로 이끈다. 또 옷을 보여 줄 심산임을 알아차린 그녀가 당황해서 약간 그를 잡아당긴다.

    “또 다른 옷은 필요 없어요. 전에 입고 갔던 그 하얀 드레스도 충분히 예쁜걸요.”

    여전히 걸고 잠들었던 물고기 꼬리 모양 목걸이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말한다.

    “전 그대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각각의 활동들에 어울리는 옷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의 말에 설득당한 그녀는 결국 그에게 이끌려 침실 구석에, 또 다른 마네킹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그가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며 뭔가를 내리 끄는 동작을 하자 천이 벗겨지며 드레스가 드러난다.

    이번에도 훤히 드러난 어깨를 가슴팍에서 자라난 은빛 가지들이 감싼 연보라색 드레스이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가지들은 복잡한 형태를 띠며 엉켜 있고 가지들에서 피어난 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모습을 표현하듯 드레스에 아랫단까지 꽃들이 박혀 있다.

    흰 드레스는 레이스가 주된 재질이었다면 이 드레스는 차가운 감촉의 비단과 시폰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심스레 드레스를 만져 보고 감촉을 느낀 그녀는 울먹이면서 그를 돌아본다.

    “제가 이런 걸 가져도 되나요?”

    “그럼요, 나의 껍데기 님.”

    눈에 잔뜩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그가 그녀에게 드레스를 들려 준다. 그러고는 침실에 어느새 생겨난 화장대 앞에 옷을 갈아입은 그녀를 앉힌다.

    “머리를 틀어 올려 줄게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어 준 그는 능숙한 손길로 틀어 올려 뒷목 위에서 고정시킨다.

    “머리를 올리는 법은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혼자 연습했죠. 그대가 잘 때 말이에요.”

    그녀가 잘 때 머리카락을 이리해 보고 저리해 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그녀는 혼자 웃음 짓는다.

    핀을 다 꽂은 그가 화장대 서랍을 열자 온갖 머리 장식들이 찬란하게 빛나며 그녀를 유혹한다.

    “골라 보셔요.”

    “저, 저는 못 고르겠어요. 루슬란 님께서 골라 주시는 것으로 할래요.”

    그는 많고 많은 머리 장식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그녀의 드레스와 어울리는 것을 고른다. 꽃봉오리가 달린 나뭇가지를 본뜬 장식을 틀어 올린 머리에 꽂아 준다.

    그가 내민 손거울로 뒷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그를 와락 껴안고 몸에 얼굴을 묻는다.

    “정말 감사해요. 너무 예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녀의 웅얼거림이나 울먹임, 그리고 와락 껴안고서는 혹시나 그가 아팠을까 힘을 뺀 모습. 모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는 그녀가 너무 좋아해 줘서 오히려 그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대꾸하고 싶지만 목이 메어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황궁에 사는 여인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그녀가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프게 여겨진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관심이나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던 껍데기 여인. 그런 그녀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다.

    관심이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다른 껍데기 여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의 애정은 온통 류드밀라를 향한다. 이기적인 감정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이란 다 그런 법이다.

    “이제 무도회장으로 가 볼까요?”

    “좋아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그녀가 대답한다. 일어서서 그에게 몸을 기대니 어느새 그들은 텅 빈 무도회장에 서 있다.

    화려한 금도금 부조로 장식된 아치형 창들. 수만 개의 촛불이 꽂힌 천장에서 늘어진 거대한 샹들리에. 바닥에 깔린 사치스러운 대리석까지. 그 모든 것을 그녀가 신기해하며 구경하는데 별안간 공중에서 왈츠가 들려온다.

    그녀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했던, 호두까기 인형의 꽃의 왈츠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악단의 자리로 시선을 돌리고 주인 없는 악기들이 저 혼자 연주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를 돌아보니 으레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루슬란은 신사가 숙녀에게 하듯이 살짝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조심스레 잡은 그녀를 이끌며 춤을 가르쳐 준다.

    “한 발 내딛고, 다른 발 앞으로, 다시 뒤로…….”

    음악에 푹 빠져 금세 기본적인 스텝을 익힌 그녀는 그가 리드하는 대로 가만히 따른다. 그가 그녀를 돌리고 허리를 안을 때는 황홀감마저 느낀다.

    그때 무도회장 불이 갑작스럽게 꺼진다. 마법으로 유지되는 불을 관리인이 밖에서 안을 보지도 않고 끈 모양이다. 놀란 그녀가 숨을 들이쉬는데 그가 손에서 새파란 도깨비불들을 만들어 내 공중에 줄지어 띄운다.

    샹들리에 불이 꺼지자 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달빛과 더불어 도깨비불들이 파랗게 물들인 무도회장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렁이는 불꽃에 천장화는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창틀이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는 거대한 나무처럼 보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왈츠에 집중한 그녀는 허리를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손에 또 놀라고 만다.

    그는 발레리노가 하듯 그녀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한 바퀴 돌리고 내린다. 놀란 것도 잠시, 신이 난 그녀는 한 번 더, 라고 재촉하듯이 그를 보고 그는 다시 한번 그녀를 높이 들어 올린다.

    그렇게 춤을 몇 곡이나 췄을까. 이제는 그녀가 모르는 노래들이 나오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한 그녀는 느린 박자에 맞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사랑해요, 나의 껍데기 님.”

    그가 나지막이 말한다. 음악 소리가 졸린 나머지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그 말만은 똑똑히 들은 그녀도 마주 대꾸한다.

    “저도 사랑해요.”

    지친 그녀를 안아 들고 이동한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머리에 닿는 부드러운 베개의 감촉을 마지막으로 류드밀라는 잠에 빠져든다.

    잠든 그의 껍데기 님을 내려다보는 루슬란의 눈빛은 따스하다. 이렇게 잠이 들어 있을 때면 그가 기억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그녀의 진실된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인 그는, 그 사실이 안타깝다. 그녀에게 기억을 돌려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였는지 그녀가 기억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바람인 것을. 과거를 기억하는 그의 아픔보다 그녀가 기억하는 지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다정한 시선을 쉬이 거두지 못한다.

    ***

    잠든 류드밀라는 뜻밖의 상쾌함을 느끼며 눈을 뜬다. 루슬란의 볼에 아침 인사를 남겨 주곤 욕실에 가서 아래 덧댄 천을 확인하는데 하얗게 깨끗하다. 낮에도 양이 점차 줄더니 월경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끝나셨군요.”

    욕실을 나온 그녀의 기쁜 표정을 본 그가 살짝 웃어 준다.

    “네, 루슬란 님.”

    “이리 올라와서 아침 드세요.”

    그동안 못 한 것들이 많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린다.

    그의 옆에 앉아 산딸기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그녀는 걱정에 빠져든다. 정을 통하지 않던 지난날들이 이어져 그의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닐까. 물론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다정했지만 그녀는 떠올린다. 그에게 보내졌다가 살해되었다는 수많은 여인들에 관한 소문을.

    그녀의 초조함을 눈치챘는지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작은 머리를 토닥인다.

    “걱정 마셔요. 월경이 끝났다고 해서 제가 그대를 괴롭힐 뜻은 없으니 말이에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저도 산딸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그는 느긋하게 몸을 베개에 기댄다. 그의 말뜻을 이해해 보려 하던 그녀는 그들의 의사가 어긋났음을 깨닫고 당황한다. 그래도 혹시 몰라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를 괴롭힌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번에도 제가 그대를 몰아붙여 아프게 만들었잖아요. 그대도 제가 이러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 앞으로 자제하기로 했어요.”

    류드밀라는 당혹스러움을 겨우 삼킨다. 이토록 위대한 마법사가 그녀를 생각해 제 욕구를 다스릴 줄은 몰랐다. 물론 그를 욕구 하나 못 다스리는 이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은 원래 여인과 정을 통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들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가장 행복한 순간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와 즐기고 그녀를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서 그의 말동무만 해 주다가 마녀님께 발각되면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즐길 다른 이로는 나탈리아가 떠오른다. 아름다웠던 마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쁜 감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류드밀라는 불안과 질투를 한꺼번에 느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불을 붙잡고 배배 틀다가 결국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느긋한 태도는 다 버리고 서둘러 그녀의 고개를 들게 해 눈을 마주한다.

    “왜 그러시나요? 내가 한 말 중에 그대를 두렵게 한 말이 있었나요?”

    “저, 저랑 더 이상 정을 안 통하시겠다고…….”

    “네, 그대가 나를 자꾸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랬어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난 내가 한 말은 지킨답니다.”

    여전히 그녀가 우는 이유가 그를 두려워해서라고 여기던 그가 걱정스레 타이른다. 한편 그녀는 절망스럽다.

    정말 그의 마음이 떠나 버렸구나. 나를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원하지 않는구나. 보통 여인이라면 안도해야 했다. 그와 정을 통하는 게 때로는 버겁고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평생을 마녀에게 교육 받았던 류드밀라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 그럼 더 이상 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잖아요…….”

    충격 받은 루슬란은 처음으로 할 말을 잃는다. 그녀의 대꾸는 마녀들의 잔인한 가르침의 결과이다. 마법사의 씨를 받아 낼 것. 그러지 못한 껍데기 여인은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한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류드밀라는 더욱 심하게 울먹이며 계속 말한다.

    “전에는 저보고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은…….”

    “난 그대를 여전히 사랑해요. 내가 내린 결정도 그대를 사랑해서 한 것이었어요. 그대가 날 두려워하지 않게, 그대가 나 때문에 아프지 않게.”

    그는 아침 식사 쟁반을 치우고 몸을 일으켜 그녀 앞에 바르게 앉아 양 뺨을 손에 쥔다. 그리고 촉촉한 보랏빛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다.

    “그대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나와 정을 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대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마녀님들께서 저는 마법사님의 씨를…….”

    “마녀들이 가르쳐 준 건 잊으셔요. 내 곁에서 그대는 그저 그대가 내키는 대로,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되는걸요.”

    그녀가 여전히 마음을 쉬이 놓지 못하자 그는 뺨 대신 그녀의 손을 찾아 꼭 쥔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그대를 사랑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영겁의 시간이 흘러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그대가 말해 보셔요. 다 들어줄게요.”

    그녀는 전에 느꼈던 그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기분을 다시 느낀다. 별안간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울어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져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조금 더 대담해진다. 전에 그가 해 줬던 다정한 말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입을 연다.

    “전 루슬란 님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제 아이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라고 했죠.”

    이렇게 고쳐 주면서도 그는 천천히 미소 짓는다. 여전히 그를 약간은 겁내 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준 그녀의 한마디가 사랑스럽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그녀의 입에 제 입술을 포갠다. 그러면서 제 옷도 벗고 그녀의 가운을 천천히 벗겨 낸다. 이번만큼은 그의 손길에 움츠러들지 않은 그녀가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몸을 밀착시켜 온다.

    그런데 더 이상 거기서 다른 걸 하지 않고 입맞춤만 하고 있자 그가 입을 살짝 떼고 장난스레 물어 온다.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는 아시고 그런 말을 하셨나요?”

    “저, 저도 알아요.”

    “그럼 그대가 알아서 해 보실래요?”

    그가 그녀의 황망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자 하얀 송곳니가 반짝인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은 그녀는 그의 입술을 어루만진다. 그러다가 송곳니에 베여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지만, 그것마저도 짜릿하게 느껴진다.

    얕게 베인 거라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아 그도 눈치채지 못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빨면서 그녀는 그 위에 올라가 걸터앉는다. 아무리 부끄럽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아래쪽에서 단단한 것이 느껴지자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아래를 슬쩍 보니 핏줄이 돋아 있는 창백하고 커다란 것이 보여 더 부끄럽다.

    그래도 그가 알아서 해 보라고 하셨으니 그래야지. 그리고 이번에 그녀는 뭔가 달라지고 싶다. 더 이상 그의 보살핌만 받고 주지는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류드밀라는 엉덩이를 조금 들고 움직여 그의 것을 천천히 안에 넣는다. 크기가 너무 커서 절로 숨이 가빠진다. 아프다. 그래도 그가 넣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게 덜 무서워서 그녀는 아픔을 꾹 참고 조금씩, 조금씩 앉는다.

    마침내 다 앉았을 때 그가 대견하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해 준다. 그가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고 그녀는 리듬에 맞춰 이끌려 간다.

    열이 올라 뽀얀 피부가 분홍빛이 되어 갈 무렵 그녀는 아픔 대신 서서히 커져 가는 쾌락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이며 그에게 매달리자 그는 한숨 같은 숨을 토해 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아프진 않나요?”

    루슬란이 다정하게 물어 온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파묻힐 것 같은 정신을 붙들고 겨우 대답한다.

    “흐으, 이제 아프지는 않아요…….”

    그에게 이끌리면서 류드밀라는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을 겪는다. 더 이상 어디가 아래고 어디가 위인지 모르겠다. 그저 그의 몸짓에 맞춰 허리를 휘며 애달픈 신음만 내뱉는다. 기분 좋은 어지럼증도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황홀감에 고개를 뒤로 젖히자 길고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엉덩이를 간지럽히다 허리를 쥔 그의 손을 스친다. 그는 손자국이 남을세라, 살살 쥐었던 허리를 조심스레 끌어당기고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문다.

    “하윽, 읏…….”

    이미 어지럼증에 휩싸인 그녀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움츠러들지 않자 그는 혀로 톡 튀어나온 분홍색 끝을 입 안에서 굴린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오는 쾌락에 그녀는 잘게 흐느낀다.

    그녀가 마침내 몸을 바르르 떨며 절정에 다다르자 그도 그의 흔적을 그녀 안에 남긴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하고 싶지만, 그는 그녀의 몸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 걸 보며 욕정을 참아야 한다.

    휘청이던 그녀가 어느 순간 그의 몸에 완전히 기댄다. 까무룩 잠이 든 것이다. 그는 전처럼 다쳤을까 걱정되어 그녀의 아래를 손으로 훑고 붉은빛이 묻어 나오지 않자 그제야 마음을 놓는다.

    욕실로 데려가 땀으로 반들거리는 몸을 씻기고 그의 씨물도 안에서 빼낸다. 머리카락도 향유를 써 가며 깨끗하게 감기고 혹여나 감기에 걸릴까 뜨거운 바람을 불러와 말려 준다.

    그 모든 일을 해도 곤히 든 잠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는 그녀가 그 때문에 얼마나 지친 걸까 문득 걱정이 든다. 미안해진 마음이 그를 이끌어 그녀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류드밀라는 이번에는 꿈을 꾼다. 악몽이다.

    꿈에서 루슬란은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멀어지고 있다. 그녀가 불러도, 손을 뻗어도, 달려가 보아도 돌아보는 기색 없이 자꾸만 멀어진다. 그녀는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도록 울면서 그를 쫓아가지만, 거리는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침내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잠에서 깨어난다.

    읽던 책을 떨군 그가 걱정스레 그녀를 돌아본다.

    “괜찮으신가요? 자면서 우시길래 깨워 볼 생각도 했었는데, 미안해요.”

    얼굴을 더듬어 본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것을 발견하고 부끄러워서 귀까지 새빨개진다.

    “왜 저를 깨우지 않으셨어요?”

    “전에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너무 행복해서 우는 것일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투정 부리듯 그녀가 대꾸하고 그는 미안해하며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물수건으로 닦아 준다.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다가 그녀는 그게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과 투정 부린 자신이 너무 창피하다는 생각에 빠져들어 잠시 말이 없다.

    “무슨 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묻자 그녀의 생각도 끝이 난다.

    “루슬란 님께서 제게서 자꾸 멀어지시는 꿈이었어요.”

    “저는 그대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요, 그게 두려우신 거면 말이에요.”

    류드밀라는 한숨을 쉬며 몸을 조금 일으켜 앉아 그에게 기댄다.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붙잡고 싶다. 그에게 그가 떠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받고 싶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여기까지 전달이 잘 안 되어요. 바보 같게도.”

    그녀가 가는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가리키자 그는 그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바보 같지 않아요. 저도 그럴 때가 많은걸요.”

    “어떨 때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요.”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눈을 스르르 휜다.

    “머리로는 그대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 가슴은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답니다. 그대가 날 무서워하고 내게서 도망칠까 봐요.”

    류드밀라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그 사실도 머리로만 알고 있죠.”

    루슬란은 달콤한 숨을 내쉬며 슬프게 대꾸한다.

    “머리로는 그대가 내 곁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 가슴은 제 자신을 못 미더워한답니다. 혹여나 제 말이나 행동이 그대를 상처 입힐까 겁이 나요.”

    그의 말에 그녀는 약간씩 안심하기 시작한다. 그도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가 이상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도감은 곧 또 다른 종류의 몽글몽글함으로 바뀌어 그녀로 하여금 그를 껴안게 만든다.

    그 몽글몽글함은 아마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을 듯한 루슬란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동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도 두려워하고 있고, 그런 부분에서 그녀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서서히 와 닿는다.

    그는 그녀가 먼저 껴안자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가 이내 긴장을 풀고 마주 안는다. 항상 그의 어깨에 기대기만 했던 그녀가 그에게 어깨를 내어 준다.

    “나도 무서웠어요.”

    그가 조용히 말하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군다. 그녀는 가만히 멈춰 있던 제 손을 움직여 등을 토닥여 준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루슬란 님.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루슬란 님 곁을 지킬 거예요.”

    다시 고개를 든 그가 눈물을 훔쳐 내며 약간 부끄러워한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걸 보니 그가 왜 자신과 사랑에 빠졌는지 이해도 간다. 그녀와 시선을 차마 못 마주치는 그가 더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머리를 맴돈다.

    사실 아직은 그가 조금은 두렵다고.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가끔 인간이 아닌 듯한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사랑이 더 크다.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에게 모든 걸 내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녀는 그와 혀를 섞으며 눈을 감는다. 항상 겁에 질려 동그랗고 크게 뜨고 있던 눈을 감는다. 그의 앞에서라면 어둠에 휩싸여도 안전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가 막 그녀의 가운 어깨를 내리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이불 속에 파고들고 그는 웃음 지으며 그녀를 확인한 후에 손짓하여 문을 연다.

    점심 식사 쟁반을 받쳐 든 시종이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손을 떠난 쟁반이 침실에 들어오자 다시 문을 닫은 루슬란은 쟁반에서 레몬 타르트를 집어 그녀에게 내민다.

    “다른 일은 미뤄도 되니 먼저 식사를 하셔요. 배고플 텐데.”

    타르트를 받아 든 그녀는 한입 베어 문다. 하는 일도 없이 거의 침실에서만 보내는데 배는 또 제때가 되면 고프다. 이러다가 살이 찌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타르트가 너무 맛있어 한입으로 끝낼 수가 없다.

    타르트 하나를 금세 다 먹고 약간의 갈망이 담긴 눈치로 식사 쟁반을 바라본다.

    그녀의 걱정을 알아챘는지 그가 살짝 웃는다.

    “그대는 워낙 마르셔서 더 먹어도 되어요. 게다가, 전 통통한 그대의 모습도 보고 싶은걸요.”

    “살이 찌면 건강에 안 좋잖아요.”

    “그러면 운동을 하면 되죠.”

    여전히 고민에 빠진 그녀에게 그는 복숭아 파이를 내민다.

    “살이 찌는 게 걱정되면 운동하는 걸 도와 드릴게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파이를 받아 든다. 전에는 신경이 예민하여 음식이 아무리 먹고 싶어도 잘 먹지 못했는데, 그와 함께 있으며 긴장이 풀렸나 보았다.

    그는 파이를 야금야금 먹는 그녀가 기특하다는 듯 지켜본다. 그녀가 다 먹자 과일도 먹으라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된 산딸기가 담긴 소반을 건넨다.

    그렇게 점심 식사를 마친 그들은 서로의 품에 기대어 꾸벅꾸벅 존다. 정말 게으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든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

    “도서관에 또 가 봐도 되나요, 루슬란 님?”

    그녀는 머뭇머뭇하다가 말을 먼저 꺼내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는 나탈리아나 사샤와 만나지 말까요?”

    “아니에요. 그분들도 보고 싶어요.”

    “원하는 대로 하셔요.”

    류드밀라가 눈을 한번 깜박이자 그들은 예전에 호두까기 인형 책을 읽으러 왔었던 소파로 이동해 있다. 건너편의 거대한 탁자에서 책을 읽던 사샤가 마법을 느끼곤 그들을 발견한다.

    신나서 달려온 소년 곁에는 나탈리아가 없다. 이상하게 여긴 그녀가 묻자 아이는 누나가 마법 연습을 하러 갔다고 말해 준다.

    “잘되었군요. 마녀들의 연습실에 가 보시겠어요?”

    “제, 제가 그런 곳엘 가도 될까요?”

    그녀는 상급 마녀들이 아직은 두렵다. 하지만 상급 마녀라면 연습을 자주 하지는 않을 테고, 또 루슬란이 곁에 있을 것이니 그들도 그녀에게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 와서 가기 싫다고 내빼는 것도 모양새가 영 아니다.

    “가기 싫지만 않으시다면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이 루슬란이 부드럽게 대꾸하자 마음을 조금 놓은 그녀는 고개를 조심스레 주억인다.

    “저도, 저도 가도 될까요, 성하?”

    “일단 네 스승님께 허락을 먼저 맡아야지. 공부하고 있었던 것 아니냐.”

    사샤는 곧바로 다른 아이를 봐주고 있던 마법사 제복을 입은 노인에게로 달려간다. 아이와 몇 마디를 나눈 노인이 루슬란과 눈을 마주치곤 절을 한다.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한 그에게 사샤가 신이 나서 폴짝이며 돌아온다.

    “스승님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그럼 가 볼까요?”

    또다시 눈을 깜박이자 그들은 거대한 홀 한구석에 도착해 있다. 홀의 가장자리를 따라 마법을 흡수하는 일렁이는 벽이 있고 가운데에서는 마녀들이 마법을 연습하고 있다.

    이그나티 제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껍데기들을 제외하곤 모두 다 기본적이고 간단한 마법은 할 수 있다. 황실에서는 그중에서도 마법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선발하여 마녀와 마법사로 양성한다. 그렇게 황립 마법 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마녀와 마법사로 자라나 제국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특히 그 자질이 두드러지는 이들은 마법 학교가 아닌 황궁에서 길러지며 그 과정에서 황제에게 충성하는 소양을 주입받는다. 마녀와 마법사의 보유가 곧 국력이기에 이그나티 제국은 마법인 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마법 능력이 더 강한 자손을 남기게 하기 위해 껍데기 여인들을 기르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제치고 특별히 선발되어 황궁에서 교육받고 있는 마녀와 마법사들이 바로 류드밀라의 눈앞에 있는 이들이다.

    기본 교양 공부 때 그 복잡하고 어려운 양성 과정을 배워서 알고 있는 그녀는 그들이 정말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들이 이그나티 제국의 미래인 것이다. 그녀 같은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들이 말이다.

    젊은 마녀와 마법사들은 하던 연습을 멈추고 루슬란에게 절을 한다. 그녀는 그들의 절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부끄러워져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든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짓하여 하던 일을 계속하게 만들고 시선으로만 나탈리아를 찾아내 불러온다.

    “성하, 류드밀라 님.”

    나탈리아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그녀도 서둘러 마주 인사한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는 모습에 나탈리아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제게 그렇게 인사하지 않으셔도 돼요, 류드밀라 님.”

    “그럼 어떻게 인사해야 하나요?”

    순수하게 묻는 모습에 젊은 마녀는 잠시 당혹스러워하다가 대답한다.

    “그냥 손을 흔드셔도 돼요.”

    “그건 못 하겠어요.”

    류드밀라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나탈리아는 곧고 긴 머리카락을 난처한 듯 배배 꼬며 루슬란에게 도움을 구한다.

    “인사는 그대가 하고 싶으신 대로 하셔요.”

    상황을 이렇게 일단락 지은 그가 이번에는 나탈리아를 부른다.

    “나탈리아, 껍데기 님께 마법을 구사하는 걸 구경시켜 드리렴. 이런 유의 마법은 네가 더 잘 알잖니.”

    “하긴 제가 불 속성은 강하긴 하죠.”

    또 그들만 아는 이야기로 넘어가려 해 그녀가 소외감이 들려는 순간 루슬란이 나선다.

    “저는 물 속성 마법을 사용해서 불 속성과는 상극이랍니다. 나탈리아는 불 속성 마법을 사용해서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뜻이었어요. 불 속성 마법은 그대가 전에 보지 못했고 또 화려해서 보면 즐거울 거예요.”

    “물 속성 마법이신데도 루슬란 님께서는 불빛도 만드실 줄 알지 않나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궁금증이 생긴 그녀는 두 번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입을 떼고 만다. 무례한 질문이었을까 봐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데 나탈리아가 친절하게 그녀를 이끌고 홀의 가운데로 나아간다.

    가운데에는 보석 다섯 개가 공중에 오각형을 그리며 둥둥 떠 있다. 사파이어, 루비, 오팔, 다이아몬드, 그리고 오닉스. 그 보석들을 그녀가 홀린 듯이 지켜보는데 나탈리아가 설명을 해 준다.

    “물, 불, 흙, 공기, 그리고 암흑. 마법 능력의 5가지 속성이랍니다. 각각의 개인이 타고난 성질이 모두 달라요. 그럼에도 물은 불을 제외한 모든 속성을 넘나들 수 있어 가장 강력하답니다. 흙 속에도 수분이 있고, 공기에도 습기가 있으며,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과 축축함은 뗄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죠.”

    류드밀라가 열심히 듣자 그녀는 뿌듯해하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간다.

    “그래서 루슬란 님께서 불빛을 내는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랍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의 몸에도 수분이 있고 환히 빛나는 발광 생물도 모두 심해에 살잖아요. 물 속성의 사람이 내는 불빛은 모두 그런 빛이랍니다. 거꾸로 저도 전에 빙결 마법을 사용했었죠? 전혀 다른 속성의 마법이지만 다른 속성을 가진 이가 곁에 있으면 그의 마법을 빌려 쓸 수도 있답니다.”

    “그렇군요.”

    이해되었다는 듯 류드밀라가 밝게 대꾸한다. 나탈리아는 더욱 신나서 손바닥을 펼친다.

    “그럼 이제 류드밀라 님께서 보지 못했던 불 속성 마법을 보여 드릴게요.”

    그녀의 손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른다. 그 불꽃은 커지고 커져 거의 횃불만큼 자라나더니 갑자기 거대해져 용의 화염처럼 천장으로 솟아오른다. 노랗고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길이 주변 공기에 아지랑이를 만든다.

    넋을 놓고 보던 류드밀라는 기대하는 눈길로 다음 마법을 기다리고 나탈리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들떠서 이런저런 불 속성 마법들을 보여 준다.

    그녀의 손에서는 푸른 화염이 솟구치기도 하고 새빨간 도깨비불들이 그녀의 지휘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으며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작은 태양을 만들어 홀 전체를 환하게 밝히기도 한다.

    류드밀라는 그 모든 것을 경외심을 가득 담고 지켜본다. 루슬란의 마법이 우아하고 잘 정제되어 있다면 나탈리아의 마법은 거칠고 사나우며 길들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 날것 그대로의 무언가에 그녀는 매혹되고 만다.

    결국 루슬란이 다른 볼일이 있다고 나서서야 나탈리아의 화려한 뽐내기가 막을 내린다.

    “다른 볼일이요?”

    상기된 얼굴로 류드밀라가 그를 돌아본다.

    “그럼요. 오늘 하루는 길고 아직 우리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답니다, 나의 껍데기 님.”

    그들은 침실로 돌아오고 잠시 고민하던 루슬란이 그녀를 지그시 응시한다.

    “이번에는 후원에 가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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