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100화 (100/120)

100화. 소원이 이뤄지고 난 자리에

샤피로가 보았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자’는 바로 에드윈이었다. 에드윈은 르니예가 챙겨 준 돈으로 술을 샀다.

낮이나 밤이나 그는 취해 있었다.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는 술을 훔쳤다.

그러다가 걸려 흠씬 두들겨 맞았고, 숙박비를 내지 못해 여인숙에서도 쫓겨났다.

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 아무 데나 들어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 비가 그치고 해가 떴으나, 에드윈의 날씨는 그대로였다. 맑아질 것 같지 않은 하루하루.

에드윈은 모든 의지를 잃었다. 그는 낮과 밤도 잊고, 먹고 마시는 것도 잊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도련님.”

정신을 차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제 얼굴이었다. 더 이상 저만의 것이 아닌 자신의 얼굴.

“정신이 드십니까?”

바딜은 샤피로에게 에드윈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쓰러진 에드윈을 찾아 방으로 데려왔다.

미워하긴 하였으나, 자신의 주인인 자였다. 그런 이가 부랑자처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바딜.”

에밀리 선물 이야기를 했을 때, 에드윈은 그가 바딜인 것을 알아차렸다. 에밀리의 선물을 챙기는 건, 오빠인 자신이 아니라 실은 바딜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에드윈은 바딜과 상의해 에밀리의 선물을 샀다. 그러나 올해 에드윈은 반란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바빠, 바딜에게 알아서 보내라고 했다.

그러니 올해 에밀리 선물에 관해 바딜은 알고 에드윈은 모르는 것이었다.

“뻔뻔해졌구나. 내 인생을 빼앗아 놓고 여길 나타나다니. 내가 어떻게 밑바닥에서 구르는지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무엇이라도 던지고 싶었으나 에드윈은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긴 던져서 무엇하겠나.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보고 나니 감상은 어떠하냐? 네가 기대했던 그대로의 모습이냐?”

“그보다 더 최악이십니다.”

바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의 인생을 빼앗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프리야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딜은 옷이 든 꾸러미와 돈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방값은 이미 냈습니다. 도련님 옷도 가져왔습니다. 목욕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그런 다음 돌아오십시오.”

바딜은 일어섰다. 에드윈은 고개만 돌려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내 인생을 빼앗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내 여자는 빼앗고 싶었던 거로구나.”

“프리야를 그리 아끼지도 않으셨으면서 그런 소리를 잘도 하십니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리 쉽게 내치지는 말았어야 했다.

“도련님은 프리야가 아니라 프리야에게서 보이는 도련님의 모습을 동정하셨던 겁니다. 프리야는 도련님과 처지와 비슷했으니까.”

바딜은 흥분해 높아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낮추었다.

“그리고 도련님이 내 여자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작은 마님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바딜은 이번 일로 르니예를 새로 보았다.

“그전까지는 작은 마님이 도련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돈 주고 귀족이 되고 싶어 한 르니예 때문에 에드윈의 인생이 꼬였다고, 바딜은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도련님 인생을 망친 건 도련님 자신이십니다. 물론 거기에 동조한 제 잘못도 있고요.”

바딜은 에드윈에게 끊임없이 르니예의 흉을 보았다. 그리하여 바딜은 에드윈이 되어 르니예가 원하는 것을 해 주며 나름대로 죗값을 치르는 중이었다.

“작은 마님이 하신 거라고는 도련님을 진심으로 좋아한 일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도 도련님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 작은 마님 아니십니까?”

그랬다. 에밀리도 알아보지 못한 에드윈을 알아본 사람은 르니예였다. 돈주머니를 주면서 르니예는 정확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속사포로 말을 쏟아낸 바딜은, 대답이 없는 에드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서 방을 나갔다.

이것이 에드윈과는 마지막일 것이다.

그는 이혼만 마무리되면 떠날 것이었으므로. 그러면 에드윈은 다시 제자리를 찾겠지만, 그는 철저히 혼자일 것이다.

“몸은 어때요, 숙부? 오늘 밤이면 걷고 움직이는 데 무리 없을 거예요.”

펙에게서 수도 상황이 정리되어 간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르니예는 약속대로 카밀에게 해독제를 주었다.

“무일푼으로 쫓아내고 싶지만, 숙부가 지금까지 모은 돈은 가지고 가도 좋아요.”

“너그럽구나, 쓸데없이.”

르니예는 카밀의 비아냥거림을 못 들은 척 넘겼다.

“그럼 여기서 마지막 인사를 하죠.”

오늘이 카밀을 볼 마지막 날일 것이다. 르니예는 영주에게 익명의 편지로 카밀의 배신을 알렸다.

카밀은 아마 상단에서 몇 발 가지도 못하고 영주에게 잡힐 것이다. 그리고 영주는 곧 수도에서 내려오는 병사들에게 잡히겠지.

그 후는 1왕자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것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카밀을 처리할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한때나마 가족으로 여겼던 카밀을 자기 손으로 처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도 반복하다 보니, 진짜로 착해진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르니예,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내가 왜 너한테 욕도 안 하는지 아니?”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난 이미 너한테 복수를 한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카밀은 쿡쿡거리며 웃다가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넌 네 어미를 죽인 원수를 공작으로 만든 게다. 그자가 네 어미를 죽였다는 걸 알고도 도운 거야.”

“그런 말 해 봤자 숙부가 더 얻을 건 없어요.”

“내가 뭘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난 사실을 말해 주는 것뿐이다, 조카야. 숙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카밀을 숨을 흘리듯 웃음을 흘렸다. 르니예는 고개를 저으며 카밀의 방을 나왔다.

마지막까지 나를 흔들려고 하네.

“뭐야, 진짠가.”

흔들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르니예는 좀 흔들렸다.

아버지한테 가? 아니, 지금까지 말해 주지 않았으니, 말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셰론 후작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네.”

후작을 잘 아는 사람이 일단 펙이랑 그리고 또……,

“하필이면 에드윈이네.”

* * *

르니예는 에드윈에게 바로 가는 대신, 먼저 벨데메르의 집에 들렀다. 그는 이혼을 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소원을 들어주려 했다.

그중 첫 번째는 찰리였다. 찰리는 영주 성에서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으므로, 소원을 이룰 자격이 있었다.

“제 소원은, 여기 샤피로처럼 잘생겨지는 거예요.”

찰리가 소원을 비는 것을 보면서 샤피로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이런 얼굴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쯧쯧.”

르니예는 그가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하네.”

그리고 프리야는 생각만 하지는 않았다. 프리야는 자기 소원을 비는 것도 아닌데, 남의 소원 뒤치다꺼리에 끌려 나와 심기가 불편했다.

샤피로는 몸도 거의 다 나았으니 밥값을 하라며 프리야를 기어코 데려왔던 것이다.

“저만큼 잘난 얼굴로 살아 보지 못했으니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지요.”

물론 샤피로는 프리야의 비아냥거리는 말 따위에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자, 거기 잘생기신 분, 그리고 억울하신 분, 알겠으니까 저거부터 줍자, 얼른.”

그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찰리의 소원은 이뤄지고 벨데메르는 조각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조각상이 부서져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거 일일이 주워서 붙이는 거예요?”

“어,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빨리 주워.”

소원을 비는 방식이 되게 마법 같으면서도 마법 같지 않고, 굉장히 수작업 같다고나 할까.

프리야는 뭔가 찝찝했지만 아무튼 소원만 이뤄지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조각을 주워 붙이는 사이 르니예는 로브를 입는 벨데메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해요, 벨데메르?”

“소원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는 중이야. 많이 줄었군.”

틈틈이 아기를 가지게 해 달라, 병을 낫게 해 달라, 하는 작은 소원을 들어주면서 소원의 개수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아직 열 개가 넘게 남았지만, 확실히 많이 줄긴 했다.

“이것도 금방 없앨 수 있을 거예요. 벨데메르는 봉인이 풀리면 뭘 제일 먼저 하고 싶어요?”

“음.”

글쎄, 뭘 하고 싶지? 짧게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그러고 나서는 뭘 하지? 평생 여행만 다닐 수는 없을 테고.

예전처럼 성안에 갇혀 마법을 수련하는 일을 해도 되겠지만, 영 끌리지 않았다.

“무얼 하면서 살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고 싶군.”

“봉인이 풀리면, 고민을 하고 싶다고요?”

“정확히는, 상의?”

앞으로 여생을 르니예와 함께 살아가게 될 테니, 상의가 필요하겠지.

집은 어디로 할 것인지, 결혼식은 또 할 것인지, 이런 것들을 하나씩 상의해 결정하고 싶었다.

“상의요? 무슨 상의? 뭘?”

“그건 나중에 말해 주지.”

그대의 소원을 이루고, 내 봉인이 풀린 그다음에.

* * *

펠레포네 영주의 별장. 현재는 콜론의 감옥으로 쓰이고 있는 곳으로, 그림자처럼 검은 형체가 들어갔다.

“형님.”

방 안에서 책을 읽던 콜론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왔나, 앉게.”

“독서도 하고, 얼굴도 좋아 보이시네요.”

친근하게 말을 붙이며 들어간 검은 형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렸다.

일렁이는 촛불에 남자의 일그러진 한쪽 얼굴이 드러났다.

“자네도 좋아 보여, 마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제 나이가 몇인데.”

마코야데스는 그 애칭에 진저리를 쳤고, 콜론은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허허 웃었다.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일이 제대로 풀렸다는 뜻이겠지, 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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