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프리야의 소원
“프리야라고요? 지금 프리야라고 하셨습니까?”
“예, 그랬습니다만 조금만 더 떨어져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얼굴이 너무 가까워 부담스럽군요.”
샤피로는 갑자기 훅 다가와 얼굴부터 들이밀고 이야기하는 바딜을 슬쩍 밀었다.
“그 얼굴로 프리야라는 이름에 흥분하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
한때 에드윈이 저랬지. 아무튼 그 짓을 바딜이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아, 이것도 연기야? 에드윈 따라 하는?”
“아닙니다.”
“그럼 뭐지? 둘이 친했어?”
바딜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친하긴 했으니까.
“프리야가 거기 있습니까? 깨어났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바딜은 절박하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르니예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둘이 무슨 사이야?”
한편 수도.
2왕자의 반란은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끝이 났다.
그러나 노르딕 백작이 자기 혼자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2왕자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조사를 계속하고 있으니 곧 증거가 나올 겁니다.”
세사르는 어른스럽게 펙을 위로했다.
“그 전에 도망가면 어떡합니까?”
어른인 펙은 어른스럽지 못하게 세사르에게 칭얼거렸다.
“왕비 전하와 2왕자 저하 모두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갇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인허트 경.”
1왕자가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 왕이 선양을 결정했으니 그는 곧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다.
“셰론 후작께서는 공작이 되실 겁니다. 라인허트 경께서도 작위를 받게 되실 거고요.”
“작위라니, 한 것도 없는데.”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펙은 생각했다. 이 반란을 막은 일등공신은 바로 저라고.
“펠레포네 영지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까?”
“물론이죠, 곧 편지가 도착할 겁니다.”
“혹시…….”
세사르는 말끝을 흐렸다. 펙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걱정하지 말란 듯 웃었다.
“셰론 후작께서 여는 무도회에 할아버님과 할머님, 그리고 샤피로도 초대했습니다.”
그 말에 세사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얼마 만에 보는 샤피로의 얼굴인지.
“무도회를 이리 기다려 보기는 처음이에요.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그러니까 작은 주인님이랑 똑같은 모습을 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단 말이야?”
프리야는 에드윈의 모습을 한 바딜이 아직 적응되질 않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피까지 흘리는 바람에 프리야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좋은 약과 샤피로의 간호 덕에 프리야는 이제야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자마자 들은 것이, 바딜의 소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째서 그런 소원을 빈 거야?”
“네가 노예로 팔려 간 줄 알았어. 노예를 살 때 아무래도 귀족인 게 유리하잖아.”
“그럼 그냥 귀족이 되게 해 달라고 빌지.”
“그랬다면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을 거야. 소원을 가지고 거래를 했거든.”
무작정 귀족이 되게 해 달라고 했다면, 벨데메르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들어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르니예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기에, 바딜은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 보석이 없었는데, 소원을 이뤘어?”
이야기를 듣던 프리야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딜에게는 그 붉은 보석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그는 소원을 이뤘다는 것이다.
“아, 그, 네가 가진 보석 아마 가짜일 거야. 작은 마님이 똑같이 생긴 걸 들고 계시던데.”
프리야는 그대로 멈췄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가짜 보석을 가지고 전전긍긍한 거네?
“어쩐지, 보석이 없어져도 안 찾더라니!”
프리야는 뒷골이 당기는 느낌에, 목덜미를 잡고 신음했다.
“괜찮아? 누울래? 눕혀 줄까?”
“어어, 천천히, 천천히.”
바딜은 프리야의 허리를 받쳐 주며, 프리야를 침대에 도로 눕혔다. 방문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며 르니예가 물었다.
“너희 친구 아니지? 너희 둘이 사귀어?”
“…….”
“…….”
“대답이 없는 걸 보니까 둘이 사귀네. 맞네.”
기가 차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에드윈과 프리야, 프리야와 바딜, 바딜과 에드윈. 관계가 복잡하기도 했다.
그 관계도를 그려보며 르니예는 하나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바딜은 프리야 때문에 에드윈이 되게 해 달란 소원을 빌었던 것이다.
“아무튼 둘이 만났으니 됐네.”
그래, 이제 와 과거의 일을 따져봐야 뭐 하겠나. 르니예는 이혼도 하고, 스텐의 위치도 알아냈다. 그럼 됐다.
“되다뇨!”
되긴 뭐가 돼! 프리야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제 소원은요? 작은 마님이 시키는 일 열심히 했잖아요.”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프리야는 르니예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소원은 이루지도 못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와중에 칼에 찔리기까지.
프리야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거, 이거 보세요.”
프리야는 노예로 팔려 가면서까지 속옷 안에 숨겨두었던 르니예의 각서를 꺼냈다.
“각서도 써주셨잖아요.”
“그걸 아직도 들고 있었어? 좋아. 뭐…… 원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써 준 각서는 무효지만, 이건 들어줄게. 그래서 네 소원이 뭔데?”
“제 소원은요.”
프리야는 소원을 말하려다 옆에 있는 바딜을 흘끗 쳐다보았다.
“말해, 괜찮아.”
바딜은 프리야의 소원을 알고 있었다. 프리야가 바딜의 방에 숨어 살던 때, 프리야는 그에게 말했다.
‘내 소원은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히는 거야. 새 인생을 살고 싶거든.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떠났는데도 네가 날 기억하고 있다면, 난 소원을 이루는 데 실패한 거지.’
바딜이 프리야가 도둑 길드에 도로 잡혀갔다고 생각한 원인이 된 말이기도 했다.
“제 소원은 아무도 절 기억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무도’라는 단어에는 바딜도 포함이었다. 바딜에게는 잔인한 소원이기도 했다.
그는 프리야를 위해서 자신의 외모까지 포기했으니.
하지만 프리야는 이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도둑 길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에요. 길드를 없애 버리거나, 제가 죽거나.”
하지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한 가지 방법이 더 생기는 것이다.
“저라는 존재를 잊으면, 그들도 저를 찾지 않겠죠. 저는 도둑으로 살고 싶지 않았어요.”
어쩌다 보니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업이 되어 버렸지만, 결단코 프리야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더 이상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싶지 않아요.”
프리야가 르니예 눈치를 슬쩍 보며 덧붙였다.
“……남의 남자도.”
르니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런 소원일 줄 알았는데.
“그래.”
들어줄 만한 소원이었다. 르니예는 이제 그만 프리야도 놓아주기로 했다. 정확히는 프리야를 미워하던 마음을 놓아 버리기로 했다.
“네 소원, 들어줄게.”
* * *
“주인님, 뭐 하십니까?”
“일주일 동안 소원을 몇 개나 더 들어줄 수 있는지 세어 보는 중이었다.”
일주일 뒤면 르니예는 이혼을 한다. 그러면 르니예의 소원이 이뤄지고, 아마 벨데메르는 조각상 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조각상 밖으로 나와 있는 이유가, 르니예의 소원 때문이라면 말이다.
“하루에 하나씩 들어주어도 부족하겠군.”
마음 같아서는 아무나 데려와 줄 세워두고 소원을 빌라 하고 싶었다.
벨데메르 본인은 그래도 상관이 없었지만, 르니예는 소원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르니예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쪽으로 따라 주고 싶었다.
“내가 조각상 안에 다시 갇히게 되면, 너는 르니예를 도와서 최대한 빨리 소원 개수를 채우는 데 집중해라.”
“예, 주인님.”
“르니예 곁을 떠나지 말고 무조건 옆에 붙어 있어.”
“르니예 님이 도망갈까 봐 그러시는 겁니까?”
조각상을 보고 청혼을 한 사람인데, 다시 조각상으로 돌아간다고 도망을 가겠나. 샤피로는 다른 것을 걱정했다.
예컨대 르니예가 벨데메르의 조각상을 집으로 가져가서 자기만 보겠다고 우기면 어떡하나, 이런 종류의 걱정이었다.
“아니, 르니예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나. 반란에 연루된 이들이 하루아침에 전부 정리되진 않을 거다.”
그들 중 누군가 르니예에게 억한 마음이라도 품는다면, 그랬는데 하필 그때 조각상에 갇혀 있게 된다면…….
벨데메르가 르니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치는 샤피로를 르니예의 곁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너를 믿는다, 샤피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이 샤피로가 주인님이 나오시는 날까지 르니예 님을 철저하게 감시하겠습니다.”
“감시가 아니라니까.”
“아, 보호, 보호하겠습니다.”
감시와 보호는 어쨌든 한 끗 차이 아닌가. 샤피로의 유리구슬같이 파란 눈동자에 이채가 싹 서렸다.
“조각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놈은 확실히 처리하고 가야겠지.”
“그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조처를 해 두었습니다.”
바딜에게서 스텐이 어디 여인숙에 있는지 들었다. 르니예는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벨데메르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었다.
“엿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자이니, 벌이 아니라 상일 수도 있겠군.”
벨데메르는 스텐의 영안을 열어 주기로 했다. 마법을 직접 쓰지 않고 약물을 이용해 열어 주어서 펙처럼 선명하게 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보이기는 할 것이다.
이제 스텐은 남의 결혼식뿐 아니라 영계까지도 엿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도 어디 떠들어대고 다녀 보라지.
물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어야 하겠지만.
“후속 조치가 필요한지 틈틈이 지켜보도록 해라.”
“예, 주인님. 이미 방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들어하니 곧 정신을 놓을 것입니다.”
약물은 효과가 느리게 나타났다. 펙처럼 한 번에 영안을 뜨지 못해 유령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는 바람에, 스텐은 아직 제정신이었다.
하지만 곧 혼이 계속 보이기 시작하면 스텐은 남을 협박할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주인님, 그자를 보러 갔다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 자를 하나 더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