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불러봐요, 주인님이라고
“벨데메르, 누굴 주인으로 모셔 본 적 있어요?”
“……한 번도 없다.”
“존댓말을 써 본 적은?”
스승과 부모에게는 존댓말을 썼으니, 존댓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 나가기 전에 연습해 보자고요. 나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야겠어요?”
“르니예, 님?”
망설이는 입술에서 르니예 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자 르니예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뭔가 짜릿해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샤피로가 벨데메르를 어떻게 불렀는지 까먹었어요?”
“설마,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원하는 건가?”
“그럼 작은 마님이라고 부를래요?”
그건 주인님보다 더 최악이었다. 르니예는 들뜬 얼굴로 얼른 말해 보라며 벨데메르를 재촉했다.
“……주인님.”
억지로, 아주 간신히 뱉는 호칭에 르니예는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벨데메르가 나한테 주인님이라니. 어쩐지 전세가 역전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주 짜릿했다.
“그대는 아주 재미있어 보이는군.”
르니예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애초에 화가 나긴 했나?
다른 사람이 저를 놀렸다면 그랬겠지만, 르니예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졌다.
르니예가 하면 무엇이든 괜찮은 것이, 그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무력감도 괜찮은 게, 이상했다.
“미안해요.”
르니예는 터져 나온 웃음을 거두었다. 그래도 여전히 미소 가득한 눈은 반달처럼 휘어 있었다.
“벨데메르는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좋겠어요. 어색해서 들키겠어.”
“연기는 어렵군.”
벨데메르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노력이 가상했다.
저를 위해서 평생 입지도 않던 옷을 입고 상단에 몰래 들어오다니.
초반의 벨데메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고마워요.”
벨데메르는 변했다. 내가 변하게 만든 건가? 아니면 봉인이 풀리고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변한 걸까.
이유가 어떠하든, 그가 처음처럼 차갑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자꾸만 생겼다.
기대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는 자꾸만 기대하게 했다.
“고마운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내 얼굴을 보지도 않잖아.”
왜 못 보는지 알면서 벨데메르는 기어코 그걸 물고 늘어졌다. 르니예는 초점을 흐리게 하며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처음보단 얼굴이 덜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르니예의 두 볼은 붉은 물이 들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벨데메르가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매우, 많이, 진심으로 고마워도?”
벨데메르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으려나.
“말로만 고맙다고 해 봐야 전혀 전해지지 않을 텐데.”
벨데메르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완전히 내렸다.
“나한테 뭐라도 물려줘야 하지 않나?”
보통 이럴 땐 뇌물을 물려주긴 하는데. 벨데메르,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정확히 어떤 걸 원하는데요? 말만 해요. 뭐든 가져다줄 테니까.”
“뭐든?”
“그래요, 뭐든.”
“그게 그대 입술이라도?”
내 입술?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말을 뇌 속에 입력하고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이, 정말.”
르니예는 벨데메르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콩콩, 때렸다. 그러고는 수줍은 듯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촉 하고 민망한 소리가 나서 르니예는 얼굴을 붉혔다.
“딱 그만큼만 고마운 건가? 내가 이런 옷까지 입고 왔는데?”
너무 빨리 떨어진 입술에 벨데메르는 아쉬운 듯 르니예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밀어낼 것처럼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지만, 밀어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내 진심을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알아, 나도 그대의 진심이 어떤지 느껴 보고 싶군.”
그들은 가까워졌다. 코끝이 서로 닿는 순간,
“키스 한 번 하는데 이유가 되게 거창하네요.”
에니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르니예는 뒤늦게 에니의 존재를 지각했다. 에니는 여전히 그 비둘기 같은 드레스를 들고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에니가 뻔뻔하게 내뱉었다.
“계속 서 있으려니 다리가 좀 아프기는 하지만, 금방 끝내실 거잖아요?”
르니예의 귀에는 그게 지금 당장 끝내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우리 아가씨께서는 참 할 일이 많으신데, 입 맞추고 있을 시간이 있으시려나?”
에니는 혼잣말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부단주가 영주랑 한편인 증거도 알아내야 한다고 그러셨으면서.”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꺼낸 에니가 환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키스할 시간은 있겠죠. 하시고, 하시고 난 다음에 증거를 찾으러 가시죠.”
그 말이 르니예의 귀에는 꼭,
‘지금 네가 연애질할 때냐? 정부랑 시시덕거릴 때냐고. 아버지는 감옥에 갇혔고, 숙부라고 부른 놈은 상단을 꿀꺽하고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입술이나 쪽쪽 거리고 있겠다는 거야?’
라고 들렸다.
“……아니야, 나, 지금 갈게.”
르니예는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혀로 핥았다. 벨데메르가 정신을 쏙 빼놔서 에니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에니를 까먹다니. 아직 머리 다친 게 다 회복이 안 된 것이 분명하다.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정말 그걸 입혀야겠어?”
“소품이 완벽해야 연기도 먹히는 법이라고요.”
에니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벨데메르를 쳐다보며, 손으로는 정중하게 문을 가리켰다.
“벨데메르 님, 아가씨께서 환복하시는 동안 잠시 나가 계시겠어요?”
“굳이 그래야 하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에니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두 눈썹을 까딱까딱 올렸다.
“그럼 구경하실 셈이세요?”
“……그것도 그렇군.”
벨데메르는 순순히 일어섰다. 르니예가 옷을 갈아입는 걸 쳐다보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신발은 내가 갈아 신기지.”
“내 신발을 말하는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누구 신발이겠어, 하고 벨데메르가 쳐다보았다.
“뭐, 추적 마법 같은 거 걸려고요?”
“아니. 그냥 신겨 주려고 한 건데.”
추적 마법을 걸어도 좋겠군. 그 생각은 못 했지만 이따가 걸어두긴 해야겠다고 벨데메르는 생각했다.
“내 신발을 왜요?”
“그대의 발이 귀여워서 또 보고 싶군. 신발을 신겨 주는 핑계로 또 볼까 해서.”
그의 말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종종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발이 귀엽다니?
저번에도 다리를 주무르고 싶다고 해서 기함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발이 귀여워?
“……못 본 새 변태가 되셨네.”
“에니!”
“죄송해요.”
에니는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뱉었다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괜찮다. 내 귀에도 변태처럼 들렸으니까.”
발이라니. 눈도 있고 귀도 있고 하다못해 손도 있는데 발이라니. 아니지, 발까지 귀엽다고 해야 하나?
“날 이렇게 만든 책임을 꼭 지도록 해, 르니예.”
그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르니예와 눈을 맞추고는 문을 닫았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옷감이 비벼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벨데메르를 변태로 만든 거야? 왜지? 내가 변태라서?”
“스스로를 변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가씨. 그게 비록 사실일지라도.”
“에니?”
에니는 또 실수했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저렇게 만들었나 봐, 어떡해.”
어떡하긴 어떡해, 평생 책임져야지. 물론, 소원이 이뤄지고 난 뒤에도 그가 르니예의 발을 보고 싶어 할 때의 일이었지만.
* * *
“프리야, 나야.”
바딜의 목소리에 프리야는 그의 옷장 안에서 조심스레 나왔다. 며칠 햇빛을 보지 못한 프리야의 낯빛이 창백했다.
“먹으면서 들어.”
“고마워.”
바딜은 품에 숨겨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하인에게 배당되는 음식의 양은 정해져 있었다.
에드윈이 데려온 하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많은 음식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프리야가 먹는 음식은 바딜이 굶으며 가져다준 것이었다.
“넌 안 먹어도 돼? 반 나눠 먹을까?”
프리야가 아무리 뻔뻔하고 이기적이라고 해도, 사정을 뻔히 아는 이상 혼자 그 샌드위치를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난 괜찮아. 도련님이 남기신 거 좀 먹었어.”
그제야 프리야는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가만히 숨어 있기만 하는데 왜 이리 허기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깜짝깜짝 놀라기를 반복해서 그런가.
“있잖아, 그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말이야.”
“응.”
프리야는 바딜에게 다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고 나니 어쩐지 후련했다. 몸까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작은 마님이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응. 왜? 작은 마님이 무슨 언질이라도 하셨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상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시는 걸 보니 정신은 아직 못 차리신 것 같던데.”
르니예의 동태를 살피러 갔던 바딜은 르니예의 드레스를 보고 놀랐다.
상단 안에 커다란 비둘기가 돌아다니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대체 그딴 드레스는 어디서 사 오시는 건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작은 마님의 정부 얼굴 본 적 있어?”
“아니, 없는데.”
“난 봤거든.”
평소에는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결투하던 날, 바딜은 벨데메르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광장에 있는 조각상 본 적 있어?”
“본 적이야 있지. 자세히 쳐다본 적은 없지만.”
“그 조각상이랑 그 남자, 아주 똑같이 생겼어.”
마치 그 남자를 본떠 조각상을 만든 것처럼.
열여섯으로 분장한 르니예는 잔뜩 화난 얼굴로 상단을 가로질렀다.
화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화난 척을 하느라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나 정말 매일 이 표정으로 다녔어?”
“네, 기억 안 나세요?”
열여섯 살짜리가 무슨 화가 그리 많아서 찡그리고 다녔담.
르니예는 이마에 힘을 팍 주었다.
“그런데 그대는 그 숙부라는 사람을 믿나?”
조용히 따라오던 벨데메르가 물었다. 르니예는 확신에 가득 차 고개를 끄덕였다.
“믿죠. 난 카밀 숙부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