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깟 자존심
“……거기, 잠깐 서지.”
에드윈은 남자를 불러세웠다. 그에게로 다가갈수록 설마 했던 것이 점차 사실이 되어갔다.
“저 뒤로 들어온 건가?”
에드윈은 멈춰 선 남자에게 다가가며 숲 쪽을 쳐다보았다. 저쪽으로 들어오는 길이 있었던가.
“눈으로 보고도 묻는 건가? 딱 봐도 저쪽에서 들어왔을 텐데.”
“역시 당신이었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래도 눈 밑으로는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벨데메르를 알아보는 데 눈이면 충분했다.
그 짙은 보라색 눈을, 저를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는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벨데메르 라인허트 경.”
에드윈은 그의 차림을 훑었다. 평소에 입던 깔끔한 옷은 어디에 두고, 용병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그 재수 없는 하인 놈도 두고 왔군.
“부인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거 말고 내가 여기 올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말하고서 벨데메르는 짧게 혀를 찼다.
“아, 너를 만나러 온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혼을 종용하러?”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에드윈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것이 찔리긴 하나 보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이혼은 할 테니까요. 다만, 부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미루는 것뿐입니다.”
핑계도 다양하네. 벨데메르는 실소를 터트렸다.
“르니예의 기억과 이혼이 무슨 상관이지?”
“적어도 이혼 전에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편지로 해도 되는 것을.”
애초에 그날 죽였어야 했나. 이제 생각해 보니 사별시키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나와 당장 이혼해 봤자 부인께도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시일이 지나면 라인허트 경도 내게 고마워할 겁니다.”
에드윈이 반란에 관련된 일을 말하고 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왜 르니예와 저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과연, 그럴까?”
벨데메르는 에드윈의 목적을 알면서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굳이 이쪽에서 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에드윈이 삽질하는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다.
자기가 내내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그땐 어떻게 반응하려나.
“그런데 라인허트 경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자존심?”
“정부로 있는 것에도 만족한 모양이고, 부인을 보러 그런 차림까지 하고 상단에 숨어드시지 않았습니까.”
벨데메르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은 옷이었다. 입을 생각도, 필요도 없었고.
“고작 옷차림에 자존심이 상할 리가 있나.”
그러나 벨데메르는 이 옷을 입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르니예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왜 자존심이 상해야 하지?”
마법을 쓸 수도 없고, 가문의 권세에 기댈 수도 없으니, 벨데메르가 르니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지키는 일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허름한 옷 한 벌 입은 것인데, 자존심 운운할 필요가 있나.
“겨우 옷 따위에 상하는 값싼 자존심이라면,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은 편이 낫겠어.”
진짜 자존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자존심을 운운하니 비웃음도 나질 않았다.
자존심을 아는 이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야말로 웃기는 일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지. 르니예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보고 싶기도 하고.”
벨데메르는 에드윈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에드윈에게 들키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결투에서 진 몸. 벨데메르와 르니예 사이를 문제 삼을 자격은 결투에서 박탈당했다.
만일 문제 삼고 늘어진다면, 그땐 공개적인 장소에서 숨통을 끊어 주지.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에드윈은 저택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린 벨데메르를 불러세웠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마법사입니까?”
“모르는 편이 좋을 텐데. 마법사에게 기사가 검으로 졌다고 하면 너의 그 비싼 자존심이 구겨지지 않겠나.”
벨데메르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뒤를 돌았다.
“가는 사람 잡지 말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지. 개처럼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데, 소화라도 시키고 있었던 건가?”
에드윈은 입술을 짓씹었다. 명백한 무시와 비웃음이 비수처럼 꽂혔다.
당장 가서 멱살을 잡아 붙들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에드윈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걸음도 들어가기 전에 짠 내가 훅 풍겼다.
“소금인가?”
에드윈 역시 마룻바닥에 낀 하얀 가루를 발견했다. 물로 청소한 정황이 보이지만, 그래도 사이에 낀 소금 하나하나 녹일 정성은 들이지 않았나 보다.
“소금 자루를 이용한 거다.”
이러면 르니예가 화살촉만 가지고 있던 게 설명된다. 촉 따로, 대 따로, 활 따로.
재료를 따로 보내고 그 안에서 조립한다. 재료만 있다면 조립이야 일도 아니니.
어딘가에 숨겨서 보냈을 거라 막연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소금일 줄이야.
“이러니 못 찾았지.”
에드윈은 지금까지 밤에 움직였다. 콜론이든, 르니예든, 카밀이든 무기를 숨기는 작업은 밤에 할 거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 몰래 증거를 잡으려면 밤에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군.”
바쁘고 어수선한 틈을 타 소금 포대 안에 숨긴다. 그리고 수도로 향하는 상단 물품에 살짝 끼워 넣는다.
“그랬군. 그랬으니 이제까지 발견을 못 한 거야. 하지만.”
무역선은 어제 들어왔다. 작업실에 소금 냄새가 아직 나는 것을 보면 어제도 작업을 했단 뜻이다.
그러나 르니예는 여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르니예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명령대로 시행하는 건가?
아니면 르니예가 아니었던 건가.
“납치에, 마차 사고.”
확실히 이상했다. 두 사고의 간격이 너무 짧았다. 그것도 콜론이 감옥이 가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마치,
“르니예를 제거하려는 것 같군.”
제거하려는 이유는 하나다. 방해가 되니까. 그렇다면 2왕자와 결탁한 사람이 콜론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영주의 눈 밖에 나 감옥에 간 걸로 증명은 되었지만, 제 딸을 죽일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르니예가 눈엣가시인 사람은 한 명뿐이지.
“카밀 부단주.”
르니예가 없으면 상단은 그의 것이다. 무역선을 확인하고 상단 일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것도 카밀이었다.
그런데 왜 영주가 르니예를 추수절에 부르려고 했던 걸 나한테 알렸지?
패러히트 공작이 상단주의 선처를 부탁했다는 정보도 카밀이 알려 준 것이었다.
“설마 나를 이용하려고?”
그렇게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인가, 부단주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든 답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
카밀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다음 무역선이 들어오는 날 덮칠 수만 있다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 일만 성공하면, 벨데메르 그자도 큰소리칠 수 없을 거다.”
“에니, 이건 내 기억과는 달라.”
“기억이 좀 왜곡된 것 같은데요. 아가씨는 이런 드레스를 좋아하셨다니까요.”
“그럴 리가 없어. 내 안목이 이랬다고?”
르니예는 에니가 가져온 드레스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 드레스는 한마디로 기괴했다.
“이거 입잖아? 그럼 벨데메르가 나 못 알아볼걸? 비둘기인 줄 알지도 몰라.”
“설마 내가 비둘기랑 그대도 구분 못할까.”
“못 할……, 벨데메르?”
르니예는 놀란 얼굴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벨데메르가 서 있었다. 뭐랄까, 평소와는 엄청 다른 벨데메르가.
“이, 일단, 들어오세요.”
에니가 주변을 살피며 창문을 열었다. 벨데메르는 높은 창문을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넘어왔다.
“벨데메르, 옷이, 옷이 그게 뭐예요?”
에드윈이랑 비슷한 옷을 입기 싫어진 걸까? 그럴 수는 있겠지만, 옷 스타일이 너무 파격적으로 변했는데?
“용병은 이런 식으로 입는다고 그러던데.”
“그렇긴 한데, 벨데메르가 왜 용병 옷을 입고 있냔 말이에요.”
“그대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용병인 척하면서 그대 옆에 있으려고?”
뭐지, 진심인가? 농담인가? 가벼운 그의 말투에 르니예는 진위를 알 수가 없었다.
“진짜로요?”
“그래. 이제 상단도 그대에게 안전한 곳은 아니니.”
벨데메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르니예의 붕대를 만지작거리다가 밤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저번처럼 마차가 돌진하면 꿀벌로는 여의치 않을 것이다.”
르니예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지 못했다. 이처럼 스스로가 무능력하고 쓸모없이 느껴진 적이 없었다.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 용병으로 분해 르니예 옆을 지키는 것이라니.
“이번엔 좀 더 직접적으로 죽이려고 들 수도 있지.”
그러나 막상 르니예의 방에 들어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무얼 할 수 없는 덕분에 르니예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늘 궁금했다. 집을 떠난 르니예의 하루가. 뭘 하고 누굴 만나는지, 르니예가 지내는 곳은 어떤 곳인지.
“그래서 용병처럼 옷을 입고 온 거예요?”
“왜, 별로인가?”
“아니요.”
가죽 소재도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벨데메르.”
“왜 하지만이 붙지? 내가 옆에 붙어 다니는 게 싫은 건가?”
“그런 건 아니고요.”
르니예의 입꼬리가 올라갈 듯 말 듯 움찔거렸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데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서 재미를 보셨겠다?
“내 호위인 척하려면 나를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데, 괜찮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