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믿음의 이유
“분명히 가지고 있을 거야.”
르니예는 확신했다.
“하지만 보통 그런 비밀스러운 내용이 든 편지는 태우지 않나?”
영주와 카밀이 반란을 도우며 주고받은 서신. 르니예는 그 서신을 찾으려는 중이었다.
“그렇죠. 근데 카밀 숙부가 태웠을 리가 없어요. 만약에 반란이 성공하고 2왕자가 왕이 되면 펠레포네 영주는 수도로 올라가게 될 거란 말이죠.”
2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공이 있는 귀족에게 적어도 수도 안에 타운하우스 하나씩은 하사할 것이다.
영주는 아마 수도에서 머물면서 인맥도 쌓고 사교계도 진출할 꿈에 부풀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숙부도 뭔가를 얻을 거예요. 영주가 대가를 약속했겠죠. 뭘 약속했는지 모르겠지만.”
“하긴, 부단주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니 그래도 꽤 대단한 걸 약속받았을 거예요.”
“맞아, 그랬을 거야. 하지만 영주가 그걸 다 지킬까?”
르니예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지킬 수도 있지. 하지만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 카밀은 영주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를 대비했을 것이다.
“분명 주고받은 편지를 숨겨놨을 거야. 난 믿어.”
카밀이 그 정도도 치밀하지 못하다면 정말이지 실망이 클 것 같았다.
“어디에 숨겼을까요?”
“사무실 아니면 자기 방 아닐까?”
편지처럼 숨기기 쉬운 걸 땅속에 파묻지는 않았을 테지. 그랬다면 곤란한데.
“그런데 르니예.”
“왜요, 벨데메르?”
“편지를 찾으러 간다면서 우리는 왜 상단을 빙글빙글 돌고 있지?”
아까부터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데리고 상단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편지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은 전혀 없었다.
“벨데메르한테 상단 지리 좀 알려 주려고요. 대충 어디가 어딘지 알겠어요?”
“어느 정도는. 어째서 내게 상단 지리를 알려 준 거지? 어차피 난 그대 뒤만 따라다닐 텐데.”
“아.”
르니예는 벨데메르를 보며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
“편지 훔치는 걸 벨데메르가 할 거라서요.”
벨데메르가 용병 옷을 입고 등장한 순간 떠오른 계획이었다. 저번에 보니까 소리 죽여 돌아다니고, 잠입하고 이런 거 잘하던데.
벨데메르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또 벨데메르가 딱 적임자였다.
그러니 어쩔 수가 있나.
“……내가?”
“네. 아마도 카밀 숙부가 나 감시하고 있을걸요. 그리고 흔적 없이 움직이는 거 벨데메르가 잘하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일을 시키시겠다? 그것도 남의 방을 몰래 뒤지는, 그런 일을?
“도와줄 거죠?”
도와달라는 말이 좀 늦지 않나? 상단 지리를 일단 익히게 한 다음에 일을 시키다니.
“네? 벨데메르.”
확신하고 있었군. 내가 해 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제법 괘씸하군, 르니예.
이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도와달라고 하면 내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
“이 일을 빨리 끝내야 그대가 안전해지니 하는 거야.”
아니었다.
르니예가 뭔가를 부탁한 건 처음이었다. 들어주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애초에 거절이란 선택지는 있지도 않았다. 하긴 다리도 주무르고, 밥도 떠먹여 줬으면 이미 거기에서 끝난 거였다.
“대가를 기대하지, 르니예.”
나름대로 협박이었다. 저를 변태에 이어 거절도 못 하는 바보로 만든 대가를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얼음주머니랑 입술 보습제 미리 준비해 둬야겠네요.”
“아냐, 벨데메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닐 거야.”
“아, 그럼 양말로 준비할까요?”
르니예와 에니 둘 다 딱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무슨 대가를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다 준비해 볼게요.”
“에니.”
르니예가 그만 놀리라는 듯 이를 깍 깨물고 에니 이름을 불렀다. 에니는 입술을 다무는 시늉을 하면서도 킥킥 웃었다.
“크흠, 에드윈이 빨리 움직여 주면 좋겠는데.”
르니예는 애써 주제를 돌렸다. 그가 카밀의 시선을 조금만 분산시켜 준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아까 보니 창고 같은 곳에서 나와 어디로 뛰어가던데, 그자에게도 뭘 시켰나?”
르니예가 뭘 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르니예의 뜻대로 움직였다.
“금고 열쇠가 있으니 편하군.”
에드윈은 열쇠 꾸러미를 손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이건 우리 상단 창고 열쇠.’
어느 날, 콜론은 에드윈을 부르더니 열쇠를 내어 줬다.
‘그거면 상단에 있는 창고는 다 들어갈 수 있소.’
그리고 그는 열쇠 꾸러미를 하나 더 내밀었다. 아까보다는 개수가 확연히 적었다.
‘이건 금고 열쇠. 상단 재산은 다 그 금고에 넣어 놨지. 그리고 이건 좀 특별한 열쇠요.’
마지막으로 그가 건넨 열쇠는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 안에 있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재산을 모아둔 금고요. 금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몇 없지. 열쇠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없고.’
콜론은 개인적인 재산을 모아둔 금고 열쇠까지 내주었다.
‘이 열쇠를 가진 사람은 나랑 내 딸, 그리고 이제 라포어 경까지 딱 셋이구만.’
뜬금없었다. 이유를 묻는 에드윈에게 콜론은 대답했다.
‘이유는 라포어 경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오만.’
아마 르니예에게 더 잘해 주란 뜻이었을 거다.
‘이제 삼 년이나 지났으니 가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소. 가족이니 주는 게지.’
가족. 에드윈은 그와 가족으로 묶이고 싶지 않았다. 열쇠를 받으면 빼도 박도 못하게 가족이 되는 것 같았으나 거절할 수 없었다.
에드윈에게 마침 그것이 필요했으니까.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하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콜론의 뜻대로 르니예와 에드윈 사이가 나아지지는 않았으나,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한 것이다.
그가 준 열쇠가 반란을 막고 상단을 분란에서 구해 낼 토대가 될 테니.
“아이고, 작은 주인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요?”
“산책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군.”
필립, 그는 카밀의 오른팔이었다.
“그거, 이 금고 열쇠인가?”
에드윈의 시선이 필립의 손아귀에 든 열쇠로 향했다. 필립은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얼른 주머니에 열쇠를 넣었다.
“부단주가 심부름이라도 시킨 모양이지?”
“예? 아, 예.”
“하던 일 마저 하게.”
무슨 일을 시켰으려나. 콜론이 준 열쇠로 금고를 따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하여 에드윈은 뒷짐을 지고 물러났다.
“그, 그럼 살펴 가십시오, 작은 주인님.”
“응? 아니, 나 여기서 금고 안 구경 좀 해 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지?”
“구경이요? 아, 구경이 하고 싶으셨구나.”
필립은 에드윈 모르게 이를 깨물었다. 하필이면 여기서 만날 게 뭐람.
대충 일하는 척하고 얼른 내보내야지. 필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금고 문을 열었다.
“많기도 하네.”
금고 안에 가득 찬 상자를 보며 에드윈은 절로 감탄했다. 각기 자물쇠가 달린 작고 튼튼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여기가 제일 큰 금고지요.”
“그렇군.”
필립은 종이에 무언가를 쓰는 척하며 에드윈을 살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자네 할 일 하게.”
“예예.”
에드윈은 여전히 뒷짐을 지고 금고를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금고 상자를 노크하듯 두드려 보기도 하고, 개수를 세어 보기도 했다.
“저, 할 일을 다 해서 나가려고 하는데요, 작은 주인님.”
“벌써?”
에드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이 앞장서 나가자 필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십시오, 작은 주인님.”
필립은 에드윈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까지 보고 카밀에게 달려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와?”
“금고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작은 주인님께서 같이 들어가자고 하셨습니다.”
“뭐야?”
이번엔 수도로 금괴를 보냈다. 르니예 몫 유산이 없어, 일단 상단이 보유한 금 중에서 일부를 보내야 했다.
어차피 반란에 성공하고 콜론이 영영 나오지 못하면 금괴의 행방에 대해 따질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남은 금액은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으므로, 카밀은 필립을 보내 정확한 액수를 파악하게 시킨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구경만 하고 나가셨습니다. 제가 빈 상자 쪽은 확실히 가리고 있었고요.”
“빈 상자, 처리 안 했어?”
“예? 부단주께서 다시 쓰면 된다고, 아까우니까 그냥 두라고 하셨잖아요.”
상자도 다 돈이라고 카밀은 빈 상자를 잘 두라고 했다. 그래서 버리지 않은 건데. 필립은 억울해했고, 카밀은 이마를 짚었다.
“구경만 하고 나오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다시 들어갔을 거야.”
“제가 자물쇠 꼼꼼하게 잠갔습니다, 부단주.”
필립은 잘 잠겼는지 두 번이나 확인했었다.
“잠그면 뭐 해? 에드윈 그놈한테 열쇠가 있는데!”
* * *
똑같이 생겼다, 그 남자와 그 조각상.
“그거야. 그거라고.”
프리야는 품속에 넣어 둔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르니예의 방에서 훔쳐 온 붉은 보석이 들어 있었다.
에드윈이 신고한다고 해서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지만, 보석만큼은 챙겼다.
“광장 한복판에 놔뒀을 줄이야.”
프리야는 바딜의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간 돌봐 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줄 것은 없고, 편지는 한 장 남겼다.
대가 없는 친절. 프리야는 그런 걸 처음 받아 봤다.
“잘 있어라. 잘 살고.”
직접 얼굴을 보고 인사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바딜과 떨어지는 것이 아주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가야 했다. 소원을 위해서.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프리야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상단을 빠져나왔다.
“광장까지만 가면 돼.”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프리야는 늘어난 그늘을 이용하여 광장으로 한 발, 또 한 발 다가섰다.
“어이, 프리야.”
“젠장!”
그러나 광장을 코앞에 두고 프리야는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프리야, 지금 도망치면 대장 뒤통수치는 게 되는 거야.”
“…….”
“조용히 가자. 가서 빌어. 혹시 아냐? 빌면 대장이 좀 봐줄지.”
프리야는 이를 악물고 제 팔뚝을 붙드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대장이 너 딸처럼 생각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