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빈집털이범
카밀. 그는 빈집을 터는 데 재주가 있었다. 그 재주로 굶지는 않고 살았으니, 밑바닥에서 태어난 아이치고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빈집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고,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훔치는 법을 금방 터득했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 콜론의 밑으로 기어들어 오면서부터 그 생활을 청산했지만, 가끔 빈집을 보며 그때 생각이 나곤 했다.
그런데 지금 콜론의 상단이 비어 버렸다. 오래된 버릇이 튀어나오려고 근질근질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터는 것으로 끝나진 않겠지만.
“아, 부단주 왔는가.”
“영주님.”
카밀은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했다. 허리를 숙인 그의 얼굴이 잠시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성급하게 굴기는.
카밀은 속으로 욕을 짓씹고서,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는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내 선물은 잘 받았나 모르겠군.”
선물이란 르니예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카밀은 영주 성에 오기 전, 르니예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예. 그런데, 죽지도 않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르니예를 없앨 거면 확실히 죽이든지, 이건 뭐 이도 저도 아니었다. 르니예가 정신을 차리면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 것이다.
이래서야 르니예에게 의심할 거리만 던져 준 격이었다.
“그럼 자네가 마무리하면 되지 않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르니예는 상단의 공주님이었다. 콜론의 딸인데도 불구하고 르니예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사용인이 많았다. 성격은 개차반이었으나 심성은 고왔던 탓이었다.
성격은 더럽지만 심성은 고왔다니, 이상하게 들렸지만, 아무튼 르니예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주가 있었다.
그 애가 유일하게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한 사람은 에드윈뿐이었다.
“상단주가 잡혀가고, 상단주 딸이 죽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에드윈이 의심을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에드윈이 아무리 상단 일에 무지하다지만 ‘작은 주인님’으로 불리지 않나.
“어디 요양차 한적한 데 가서 며칠 쉬고 오라고 해. 아픈 부인 혼자 요양을 보낼 수는 없으니 라포어 경도 같이 보내 버리라고.”
영주는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식이었다.
“라포어 경까지 한 번에 사라지면 자네가 훨씬 편할 게 아닌가.”
에드윈은 영주에게도 거슬리는 존재였다. 콜론을 인질로 르니예와 협상을 해 볼까 하고 불렀더니, 기어코 영주 성까지 따라오다니.
그날 르니예와 대화만 잘되었어도, 지금 르니예는 멀쩡히 걸어 다녔을 것이다.
“한 두어 달만 있으면 우리 할 일은 끝날 게야.”
영주는, 평민 같은 것과는 악수도 하지 않는 그 고귀한 손으로, 카밀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2왕자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걸 후회하지 않게 해 드려야지.”
“물론입니다.”
콜론의 장사 지론이 하나 있었다. 정치에 끼지 않는다. 콜론은 비록 영주에게 뇌물을 바치고 있지만, 절대 반란에 가담하지는 않으려 했을 것이다.
콜론을 떠보던 영주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카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금이 좀 필요하시다더군.”
“예? 저번에도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까?”
“원래 거사를 치르는 데 자금이 많이 드는 법이야.”
그래서 르니예를 치워 버리려고 하셨군. 거사라는 단어가 카밀의 귀에는 대대적으로 상단을 털어가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알기로 상단주가 제 딸 앞으로 유산을 미리 모아뒀다던데.”
그걸 사용하면 일단 장부상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반란이 성공할 때까지 최대한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는 편이 좋으니, 영주가 제시한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간과한 점이라면, 르니예가 멀쩡해도 그 유산을 가져다 쓰는 데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사는 르니예가 유산에 미리 손댈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상단주도 없고, 그 딸도 정신없으니 자네가 아주 일하기 수월하겠군.”
“영주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영주는 토 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카밀은 영주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굳이 티 내지 않았다. 티 내면 어쩔 것인가, 이미 르니예는 다쳤는데.
아, 영주가 한 일 중에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었다. 탈세 혐의로 콜론을 상단에서 없애 버린 것. 그거 하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 준비되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난 자네만 믿고 있겠네.”
카밀은 신뢰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영주성에서 빠져나왔다. 상단으로 돌아오는 카밀의 표정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에드윈이랑 요양을 보내라니. 둘이 한방을 쓰지도 않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벌여서 말이야.”
사람 곤란하게 하고 수습은 꼭 저를 시켰다.
“부단주, 오셨습니까?”
“르니예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깨어나지 못했다. 카밀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깨어나기 전에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는 건, 어떨까.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기다렸다. 파티를 하자더니, 르니예는 저녁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샤피로, 르니예가 왜 이리 늦는지 알아봐라.”
“지금 오신 것 같은데요, 주인님.”
샤피로는 멀리서 대문을 향해 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달려오시는군요.”
이런 날 늦으시다니. 샤피로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르니예를 마중하러 나갔다.
그러나 대문 앞에서 샤피로가 마주한 것은 르니예가 아니라 체이스였다.
“체이스 님, 혼자 오셨습니까?”
“그게, 그게.”
체이스는 놀라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오다가 사고가 좀 났어.”
“사고요?”
체이스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마차가 르니예 쪽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르니예가 다쳤나?”
벨데메르가 현관 밖으로 나오며 체이스의 말허리를 삭둑 자르고 물었다.
“마차에 부딪히지는 않았는데, 머리를 좀 부딪혀서, 예, 좀 다쳤습니다.”
체이스는 르니예의 머리에서 흐르던 그 새빨간 선혈이 다시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다시 상단으로 돌아갔습니다. 의원을 불러 치료를 하는 중인데 목숨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벨데메르 님.”
에니는 벨데메르가 기다리다가 성급하게 움직일까 체이스를 보내 상황을 전하게 했다.
“깨어나는 대로 또 연통을 보낸다고 하였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르니예가 다쳤는데 기다리기만 하라고? 그러나 섣불리 상단으로 향했다가 르니예가 곤란해지는 것은 피해야 했다.
결투에서 이겼지만, 아직 에드윈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정부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샤피로, 꿀벌은 지금 뭐 하고 있지? 르니예의 곁에 있나?”
“그것이, 얘 아직 밖인 것 같습니다. 르니예 님을 따라가지 않고 대체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샤피로가 귀로 온 신경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주인님.”
소리를 듣던 샤피로의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말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르니예는 좀 어떠냐?”
“계속 주무시기만 하시네요.”
르니예의 방에 들어온 카밀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르니예를 살폈다. 르니예에게서 카밀이 수상하다는 언질을 듣지 못했다면, 에니는 그의 걱정이 진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곧 깨어나시겠죠.”
“그래야지.”
카밀은 르니예를 보던 시선을 돌려 그대로 에니를 쳐다보았다.
“피를 많이 흘렸다고 들었다. 깨어나도 한동안 조심해야 한다고 의원이 그러더군.”
“네, 저도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어디 공기 좋은 데서 요양차 며칠 쉬다 오시는 건 어떻겠니?”
요양? 아직 깨어나지도 않은 환자에게 요양이라니.
너무나 뜬금없고 의심스러운 제안에 에니는 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작은 마님 깨어나시면 여쭤볼게요.”
“언제 깨어나실 줄 알고.”
애초에 에니의 동의를 구하려고 물어본 게 아니었다.
“한적한 곳에 계시면 정신도 금방 차리실 거다.”
카밀은 에니의 어깨를 툭툭 다독이며 자애로운 숙부인 양 말했다.
“네가 같이 가서 돌봐 드릴 테니, 내가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에니와 르니예를 동시에 보내 버리고, 에드윈은 따로 처리할 계획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에드윈이 르니예를 따라가게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기회가 온 김에 르니예 먼저 처리하고, 에드윈은 차차 정리하기로 했다.
“부단주님.”
에니가 뭐라 따져 물으려던 참이었다.
“으, 시끄러워.”
쉰 소리를 내며 중얼거린 르니예가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가 왜 이렇게 아파?”
“작은 마님!”
에니는 얼른 침대 옆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신이 좀 드세요, 작은 마님?”
에니는 르니예의 손을 주무르며 물었다. 르니예는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깜빡거리며 에니와 카밀을 쳐다보았다.
“에니.”
르니예가 힘겹게 에니를 불렀다.
“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머리를 다치셔서 그래요, 작은 마님.”
“자,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의원을 불러오마.”
르니예가 깨어날 줄 몰랐던 카밀은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가려다가 발목을 잡힌 듯 우뚝 멈춰 섰다.
르니예가 의아한 목소리로, 이상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에니. 나를 왜, 작은 마님이라고 불러?”
“……그야 작은 마님이시니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꼭 내가 아버지 두 번째 부인이 된 것 같잖아.”
르니예가 아주 불쾌해하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깨진 머리가 아픈지 끙,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카밀을 보고 정말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숙부, 갑자기 왜 그렇게 늙었어요?”
“……작은 마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가씨.”
드디어 르니예가 만족스럽다는 듯 응, 하고 대답했다.
“지금이 몇 년도죠?”
“왕국년 2335년.”
“우리 아가씨, 몇 살?”
어린애에게 나이 물어보는 듯하는 에니를 보며 르니예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어린애 흉내를 내며 대답을 해 주었다.
“르니예, 열여섯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