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르니예, 열여섯
“단기 기억상실증입니다.”
“장기가 아닌 거 확실하죠?”
“……확답을 드리기가 어려운 질문이군요.”
에니는 이마를 짚었다. 16살 르니예라니, 16살이라니.
“하필이면 열여섯 살로 돌아갔구나.”
같이 의원의 말을 듣던 카밀은 한숨을 옅게 쉬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르니예가 기억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었으나,
“어허, 하필이면.”
르니예가 열여섯 살로 돌아간 것은 절대 다행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열여섯의 르니예는 질풍노도 그 자체였다. 성격이 가장 개차반일 때였으며, 이 시기의 르니예는 한 마리의 야생동물과 같았다.
그때의 르니예는 다듬어지지 않는 날것 그 자체였다. 딸 사랑이 지극한 콜론마저 진지하게 호적을 파 버릴까 고민하게 만든 게 바로 열여섯 살 르니예였다.
“이거 큰일인데.”
에니는 더 골치가 아팠다. 에드윈, 프리야, 벨데메르,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차라리 내가 다칠걸, 내가.”
카밀에게서 르니예를 보호해야 하는데, 저 ‘르니예’를 내가 보호할 수 있을까? 에니는 자신이 없었다.
카밀과 함께 르니예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에니는 책임감으로 두 어깨가 무거웠다.
“르니예, 기억이 돌아올 동안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요양이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떻겠니.”
카밀은 르니예를 구슬려 보려고 했다.
“내가 뭐 노인네야? 요양을 왜 가, 내가.”
르니예는 카밀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요양은 숙부가 가야겠어요. 아니, 왜 이렇게까지 늙은 거야? 어?”
에니는 뒤에서 입술을 깍 깨물고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카밀은 한숨을 쉬면서 일어섰다. 요양은 보내지 못해도 시간은 벌었으니.
“간호 잘해라, 에니.”
“예, 걱정하지 마세요.”
에니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문을 닫았다.
“아가씨.”
“응, 에니. 이러니까 에니가 꼭 언니 같다. 근데 아버지는 왜 안 와? 딸내미가 몸져누워 있는데 들여다보지도 않아?”
에니는 심호흡을 하고, 르니예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 잘 들으세요.”
“작은 주인님, 오셨어요.”
“부인께서 나를 찾으신다지?”
“예.”
에드윈은 르니예가 사고를 당했다 깨어난 뒤 저를 찾는단 소식을 듣고, 르니예의 방을 찾았다.
왜 저를 찾는지 궁금하여 들어가려는데, 에니가 에드윈을 앞을 막고 섰다.
“지금 작은 마님께서는 열여섯 살이세요.”
“기억상실증이라는 이야기 들었다.”
“예, 그러니까 너무 충격받지 마세요.”
에니는 경고했다. 결투를 진 것보다 충격받을 일이 있을까. 에드윈은 에니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인, 지금 술을 드시는 겁니까?”
에드윈은, 이마에 붕대를 칭칭 감고 술 나발을 부는 르니예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
“당신이 내 남편이구나?”
르니예가 에드윈을 향해 살랑살랑 손짓했다.
“이리 와, 앉아 봐.”
존댓말과 예의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드윈은 르니예가 아프다는 것을 되뇌며 르니예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반반하네. 어른이 돼도 내 취향은 변함이 없나 봐.”
르니예가 에드윈의 얼굴을 뜯어보며 대놓고 품평했다. 기가 차면 말을 잃는다던가? 에드윈이 딱 그랬다.
“왔으니까 술 좀 따라 봐.”
“……지금 술 시중을 들라고 나를 부른 겁니까?”
“응. 혼자 마시기 적적해서. 그리고 남편 얼굴도 궁금하고.”
르니예는 에드윈을 향해 포도주병을 밀고서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에드윈은 꾹 참으며 포도주병을 들었다.
“남편인데 왜 나랑 같은 방 안 써?”
“그건,”
르니예가 음흉하게 웃으면서 에드윈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쓱 쓸었다.
“내친김에 오늘 합방할까요, 여보?”
열여섯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열여섯이 할 법한 언사인가?
에드윈은 이걸 타일러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반응이 왜 이래? 아, 내연녀가 있다고 그랬지.”
에니에게 들었다. 르니예는 혀를 쯧쯧 찼다. 어른 르니예는 성인군자라도 된 걸까? 어떻게 바람을 피우는 걸 그냥 내버려 뒀지?
“뭐, 얼굴 때문인가.”
열여섯 르니예는 딱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에드윈은 어린 르니예의 취향이기도 했다.
아마 어른 르니예는 저 얼굴 때문에 차마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바람피우는데 그냥 놔두는 건 좀 아니다.”
에드윈은 르니예의 혼잣말을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싶었다. 저런 거침없는 언사를 참아 주기에 그는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부인,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어딜.”
르니예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쾅쾅 쳤다. 이 상단 안에서 르니예는 공주님이나 다름없었다.
“내 얘기 안 끝났잖아요.”
르니예는 인상을 팍 쓰며 에드윈을 노려보았다.
“정리해.”
저 얼굴을 못 놓겠으면, 여자라도 정리시켜야지. 어떻게 그걸 그냥 다 두고 봤을까.
난 커서 마음이 매우 넓은 어른이 되는 걸까?
“아니면 확 가둬 놓을 줄 알아. 목줄 채워서.”
“부인, 아무리 아프다지만 말씀을 가려서 하세요. 열여섯이면 사리 분별할 나이, 아닙니까?”
에드윈이 참다 참다 터졌다.
“사리 분별하니까 아직 그쪽을 안 가둬 놨잖아요.”
얼굴이 반반해서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행동을 똑바로 하고 다녀요, 여보. 돈 없어서 팔려 왔으면 내 비위를 맞춰야지, 바람을 피울 게 아니라.”
에드윈은 황당해 할 말을 잃었다. 팔려 온 것은 맞지만 그 앞에서 누가 직접 팔려 왔다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에드윈은 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들어줄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성격 있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마침 그 찰나에 문이 열린 덕에 에니는 에드윈의 질린다는 얼굴과 마주했다.
에드윈이 폭발 직전인지라 에니는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마님!”
“그렇게 부르지 마, 징그러워.”
“아가씨, 제발요.”
에니는 애원했다.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세요.”
“왜 그래야 하는데?”
“왜냐면, 왜냐면.”
아가씨가 소원을 잘못 빌어서 남편이 둘 생겼으니까? 까딱하면 징역 10년이니까? 와중에 지켜 줄 콜론마저 감옥에 있으니까?
“에니, 정말 이상한 일이지 않아? 내가 성인이고 남편도 사 왔는데 왜 독수공방하는 거야?”
열여섯, 알 건 다 아는 나이였다.
“정확히 따지면 독수공방은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르니예가 눈을 반짝였다.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실은.”
에니가 벨데메르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고 멈췄다.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던 에드윈이 나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주인님, 여기는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잠깐 나 좀 볼까.”
“네? 저, 저요?”
에니는 눈치를 보다가 에드윈을 따라 나왔다. 방문이 닫혔다.
“단기 기억상실증이라고 했지.”
“예.”
“그럼 금방 기억이 돌아오겠군, 안 그래?”
열여섯의 르니예는 에드윈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벨데메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혼하려고 하는 이유를 기억하지 못한단 뜻이었다.
만일 르니예의 기억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니, 조금만 늦게 돌아온다면.
“그러니 굳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을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벨데메르, 그자 이야기를 굳이 해 줄 필요 없다는 뜻이다.”
벨데메르는 르니예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르니예를 만나러 가는 대신, 꿀벌을 찾았다.
“저 마차로군.”
꿀벌은 르니예를 친 마차를 쫓았다. 아예 대놓고 마차 위에 앉아, 벨데메르를 기다렸다. 그래도 마차의 주인은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할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술집으로 들어가기 바빴으니까.
“잘했다.”
벨데메르는 꿀벌을 불렀다. 마차 위에 앉아 있던 꿀벌은 포르르 벨데메르에게로 날아왔다.
“넌 이제 르니예에게 가 보아라.”
윙!
할 일을 마친 꿀벌은 르니예가 있는 상단으로 향했다.
“마차 먼저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잠깐, 샤피로.”
벨데메르는 팔로 샤피로를 가로막았다. 술집의 후문이 열리더니 누가 보아도 수상한 걸음걸이를 한 사내가 주변을 살피며 나왔다.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남자는 멀리서 보아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차 바퀴 나사를 느슨하게 풀었다.
“술집으로 들어가서 저자를 더 살펴보도록 하지.”
“예, 주인님. 정문으로 들어가시죠.”
사내가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벨데메르와 샤피로는 건물을 돌아 술집 정문으로 향했다.
“거기 비키시오.”
술집으로 들어가려던 벨데메르는 저와 샤피로 사이를 우악스럽게 밀치고 들어가는 손길에 눈썹을 찌푸렸다.
“병사들이 아닌가?”
“술 마시러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 그들은 술집으로 들어가더니, 뭐라 뭐라 소리치고는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는 남자의 두 팔을 붙들어 질질 끌고 나갔다.
“무슨 일이랍니까?”
샤피로가 술집 주인장에게 물었다.
“마차로 사람을 쳤답니다. 그러고서 도망쳤대요. 에라이, 나쁜 놈.”
그 대답을 듣는 벨데메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짙은 색의 눈동자가 향한 곳에는 마차 바퀴를 느슨하게 한 남자가 있었다.
벌벌 떨며 술잔을 드는 남자를 보던 벨데메르가 낮게 실소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