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벨데메르와 에드윈이 결투하는 현장. 그 원인이 된 르니예는 차마 결투를 보러 가지 못했다.
르니예도 양심이 있었으므로, 가기 민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르니예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작은 마님, 저기 오네요.”
“둘 다 다치면 안 되는데.”
르니예와 에니는 결투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고지대에 미리 자리를 잡고 숨어 있었다.
그들은 망원경 하나씩 나눠서 가지고 결투 현장을 관람했다.
“머리색이 아니면 누가 누군지 구분을 못 하겠네요.”
“진짜 왜들 저래.”
르니예는 울상을 지었다. 에드윈과 벨데메르에게 같은 옷을 선물한 것을 들킨 이후로, 르니예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물론 그 옷이 르니예의 취향이었지만, 벨데메르와 에드윈에게 최대한 다르게 옷을 사 보냈다.
그러나 둘 다 거절을 하는 게 아닌가.
‘부인, 3년이나 부인의 취향으로 옷을 입혀 놓고 적응될 만하니 다른 옷을 입으라는 겁니까?’
‘르니예, 난 원래 그대가 가져오던 쪽이 더 마음에 드는군. 이건, 나와 안 어울려. 에드윈 그자에게나 가져다주지 그래.’
르니예는 미칠 뻔했다. 겨우 옷인데, 겨우 옷 가지고 유치하게!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 르니예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해서 그 결과로 에드윈과 벨데메르는 거의 비슷한 옷을 입고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아.”
르니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벨데메르 님이 질까 봐 그러세요?”
“좀 걱정이 되긴 하네.”
에드윈이 이기면, 그야말로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아니, 뭐, 생각해 보니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겠네.”
벨데메르가 지면, 에드윈은 벨데메르와 헤어지라고 하겠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헤어지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이혼만 미루자고 할 것이다.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그 목적을 이루고 나면 저와 이혼을 할 테고, 그러면 소원도 이뤄지겠지.
그냥 이혼을 금방 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좀 늦어질 것인지 그 차이였다.
“작은 마님.”
생각하느라 넋을 놓고 있던 르니예를 에니가 다급히 불렀다.
“시작하나 봐요.”
르니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망원경을 바짝 댔다.
“어우, 작은 주인님이 완전히 밀리시는데요.”
검에 문외한인 그들이 보기에도 실력 차가 뚜렷했다. 에드윈의 검은 벨데메르에게 닿지 못했다.
“와…….”
“이야.”
에드윈의 검이 날아가는 것을 보며 르니예와 에니는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완벽하게 벨데메르의 승리였다.
다친 사람도 없었다. 깔끔한 결투였고, 르니예는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
“검도 잘 다루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마법 실력에 검술까지. 벨데메르에게 오점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르니예는 자신이 그의 인생에 오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지워 버렸다. 그딴 생각을 한다니, 새사람이 되려면 멀었다.
“우리도 얼른 가자.”
승패가 결정되자마자 르니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벨데메르에게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러니 더 지체했다가는 그보다 늦게 들어가고 말 것이다. 르니예는 조금 빠르게 말을 몰아서 다행히 벨데메르보다 먼저 집에 도착했다.
르니예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사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데메르.”
“르니예, 빨리 왔군.”
“네?”
“관람한 소감은 어떤가?”
르니예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거 알았어요?”
“에드윈 그자도 알았을걸. 그대의 망원경이 굉장히 반짝이더군.”
모른 척해 주기에는 너무 반짝였다.
“다음엔 꼭 해가 비치는 반대 방향에 숨도록 해.”
르니예는 머쓱해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저녁에 축하 파티라도 할까요?”
민망했던 르니예는 나름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어때, 샤피로?”
“좋습니다, 르니예 님. 영지가 떠들썩하도록 큰 파티를 열고 싶지만, 아직 그건 안 되겠지요.”
샤피로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우리 주인님께서는 찬양받아야 마땅하신데.”
그는 진심으로 슬퍼 보였다.
“그럼 체이스라도 부를까?”
“흠, 그럴까요?”
아무래도 파티이니 한 사람이라도 있는 게 좋지 않겠어? 그래 봐야 체이스랑 에니 말고는 부를 사람도 없지만.
“아, 이럴 때 먹으려고 아껴 둔 포도주가 있어요. 그거 가져올게요.”
르니예는 씩 웃으면서 벨데메르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따 봐요.”
마구간.
여물을 먹는 말들 사이로, 메리를 비롯해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둥글게 섰다.
“여긴 왜 부른 거야?”
그들은 상단에서 일한 지 최소 15년이 넘는 사용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메리가 있었다.
“왜 불렀겠어? 여기 다들 아기씨 돈 받은 사람들이잖아.”
르니예는 착실하게 계획을 시행하는 중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수잔은 가장 최근에 르니예에게 다이아몬드를 받았다.
“그래서 뭐? 입조심하라고?”
수잔은 메리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돈 몇 푼 빌리고서 평생을 저당 잡힌 주제에 르니예에게 보이는 애정이 웃겼다.
거지가 공주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고 잘 사는 애를 불쌍히 여기는 꼴이 같잖았다.
“입조심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콜론 일가에게 감정은 있지만, 수잔도 바보는 아니었다. 큰돈이 생겼다고 입을 놀리면 범죄의 표적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여기 일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 있지?”
“여기 더 있을 이유, 나 없잖아.”
그것도 수잔이었다. 수잔은 돈을 받자마자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상단에 남은 빚은 르니예가 준 다이아몬드를 팔아 갚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게 입조심한 거야?”
어떻게 한 치 앞을 못 볼까.
“봐, 아기씨한테 돈 받은 사람들이 족족 일을 그만두고 빚을 갚아 버리면, 의심스럽지 않겠어?”
의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아기씨가 상단 자금 훔쳐다가 줬다는 건 다들 대충 짐작했을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고맙다고 절이라도 올려?”
“그거 부단주 놈이 알아차리면 어떡할래?”
수잔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카밀은 분명 훔쳐서 준 돈이니 적법하지 않네 어쩌네 하며 다이아몬드를 빼앗아갈 것이다.
“하지만 작은 마님은 상단주 딸이잖아.”
“카밀을 십 년 넘게 보고도 그놈이 어떤 놈인지 몰라?”
메리가 수잔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기씨가 상단주 딸이지 카밀 딸이야? 피라도 한 방울 섞였어?”
르니예는 카밀을 곧잘 따랐고, 카밀도 르니예를 어여삐 여겼지만, 그들은 남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
“지금 아기씨는 힘이 없어. 다들 알잖아?”
“요즘 부단주 놈 동태가 심상치 않네. 얼굴을 모르는 놈들도 상단에 많이 들어왔고.”
피터가 말을 거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그럼 돈도 생겼는데 영원히 여기서 일하다가 죽을까?”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기씨를 상단주로 만들어야지. 나이도 적당히 찼고, 상단주 자리도 비어 있으니 지금이 적기지.”
“그걸 우리가 무슨 수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메리가 읊조렸다.
“마땅히 아기씨가 상단주가 되어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게 만들어야지.”
에드윈은 충격에 빠졌다. 패배. 손에서 검을 놓치던 순간에서 에드윈은 벗어나지 못했다.
“도련님.”
바딜이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에드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결투 시작 전부터 지면 어떡하냐느니, 초를 치더니 속이 좀 시원한가? 바딜을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예. 저는 문 앞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바딜!”
에드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바딜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패배의 원인이 바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만 바딜을 탓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바딜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에드윈의 패배는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손쓸 겨를도 없이 끝나 버린 결투.
에드윈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이혼당하게 생겼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려 주시면 내가 도울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에드윈은 바딜에게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묻는 것도 금지했다.
“나를 믿지 않으시는 건가.”
입이 썼다.
르니예는 에니, 체이스와 함께 벨데메르의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에 든 바구니에는 좋은 날 아껴 마시려고 둔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제가 들게요.”
“아니야, 내가 들게.”
에니와 서로 바구니를 들겠다며 주장하던 르니예는 고개를 돌려 체이스를 쳐다보았다.
“우리 대화를 들으면서 느끼는 바가 없어?”
“내가 들었다가 금이 되면 어떡해?”
“이게 돌이냐? 돌이야?”
하여간 매너라고는. 르니예는 혀를 쯧 찼다. 그래도 체이스에게 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선물이니까 직접 들고 가고 싶었다.
“어어, 조심해요, 어!”
그들이 투덕거리며 길을 건너는데 건너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빽 질렀다. 휘둥그레진 얼굴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마차가 휘청일 정도로 빠르게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작은 마님!”
정확히 르니예를 향해서.
“악!”
르니예는 에니를 세게 밀치면서 옆으로 넘어졌다. 마차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에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으, 작은 마님, 괜찮으세요? 작은 마님?”
에니는 르니예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르니예가 들고 있던 포도주병이 깨져 르니예 주변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고용주, 괜찮……, 저거 피야?”
아니, 르니예를 새빨갛게 물들인 건 흘러나온 포도주가 아니라 르니예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작은 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