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얼굴 보고 주고 싶더군
“아, 그게, 아니 요즘 상단에서 라임풀루트 수입 안 하나 해서. 주방에 달라고 했더니 없다네.”
화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소금을 판매하는 게 맞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요즘 수입 안 하고 있긴 하지.”
“왜요? 나 그거 먹고 싶은데.”
“철이 아니잖니. 아직 안 익어서 못 사 온다. 철 아닌 과일 찾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카밀이 옛날 생각이라도 나는지 웃었다.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르니예도 마주 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우리 상단에서 그거 수입 안 하는 줄 알았잖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데 그러기야 하겠니. 면회 갈 때마다 콜론 형님이 너 잘 챙겨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는데.”
면회를 가?
“아버지 면회 갔어요, 숙부?”
“그래. 아, 미안하다, 르니예. 내가 형님이랑 단둘이 할 말이 있어서 너를 데리고 못 갔다.”
르니예의 표정이 굳어진 게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한 카밀이 금방 해명했다.
“숙부랑 아버지랑 나 빼고 비밀 이야기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르니예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일어섰다.
“나 삐쳤어, 갈래.”
“다음에는 꼭 같이 가자, 응?”
“숙부 하는 거 봐서.”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니. 어디 아파?”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래요.”
“네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몸이 약했어. 안 되겠다. 몸에 좋은 약재 좀 챙겨 먹이라고 해야지.”
르니예가 손을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숙부. 나 얼마나 튼튼하다고.”
“그래도 형님이 없으니 내가 챙겨야지. 챙기라고 시킬 테니까 꼭 먹어, 알겠니?”
르니예는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을 보며 허허 웃던 카밀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카밀은 르니예가 서 있던 책상 옆으로 향했다. 그는 서류철을 하나하나 치우며 살폈다.
“이걸 봤나?”
화살촉 설계도면이 서류철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어제 주문한 화살촉이 도면과 같은 치수인지 보기 위해 빼놨다가 아무렇게나 둔 것이 실수였다.
“이게 뭔지 알아챘을까.”
르니예가 발견한 건 단순히 도면일 뿐이었다. 가격도, 주문자와 배송지도 쓰여 있지 않았다. 르니예라면 별생각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군.”
르니예가 갑자기 남자에 미쳐서 그렇지, 그전에는 제법 똑똑한 애였다. 그러니 방심할 수 없었다.
방심했다가는 여러 목이 날아갈 것이다.
“안 그래도 에드윈 그놈이 설쳐대서 성가신데, 르니예까지.”
콜론 형님 말씀대로 여행이나 다녀오면 좋았을 텐데, 르니예. 그러면 이 숙부가 너까지 손을 쓸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소금, 화살촉, 도면, 그리고 카밀 숙부.
르니예는 오늘 발견한 것들을 떠올렸다.
“아버지 면회를 갔다?”
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한 사람은, 오직 나뿐인가? 왜지?
의문투성이였다. 카밀 숙부와 아버지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카밀 숙부가 아버지를 배신…….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아니었으면 좋겠는 그 일이 이어지곤 했다. 르니예는 뻐근하게 저려 오는 목 뒤를 꾹꾹 눌렀다.
“왜 이렇게 목이 뻐근하지?”
어깨도 좀 결리는 것 같고.
“……꿀벌.”
생각해보니 꿀벌 때문이었다.
“너 안 내려와? 날개도 있는 게 날로 먹으려고 하네?”
르니예는 모자를 탁탁 털었다. 꿀벌은 마지못해 모자 속에서 나왔다. 저 무거운 걸 목에 걸고 다녔으니 어깨가 결리지.
“꿀벌, 거기 아니야. 에니랑 잠깐 얘기 좀 하게.”
카밀이 영 수상했다. 숙부라고 부르며 가족처럼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설마 배신이야 했겠어?
아버지랑 뭐가 있는 거겠지. 르니예는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그러니까 믿기 위해서야.”
만약 르니예가 카밀의 뒷조사를 한다면 그건 정말 카밀을 믿고 싶어서였다.
“주인님, 주문한 검이 도착했습니다.”
샤피로는 검이 든 기다란 상자를 뒷마당 바닥에 죽 늘어놓았다.
지난번, 실버리안 영지로 떠나기 전 무기상에 들러 주문한 검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흠.”
샤피로가 상자를 하나씩 착착 열었다. 벨데메르는 상자 안에 든 검을 들어 보고, 검집에서 빼 가볍게 휘둘렀다.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십니까?”
검 다섯 자루는 각기 길이도, 무게도, 검신의 모양도 달랐다. 어떤 것이 나을지 몰라 여러 개를 주문했건만, 딱히 마음에 들어차는 검은 보이지 않았다.
“더 실력 있는 대장장이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니다.”
벨데메르는 그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검을 들었다.
“어디 전쟁을 나가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주인님?”
이미 검은 있었다. 연습용으로 휘두르기에는 괜찮은 검이었다. 그러나 벨데메르는 새로운 검을 원했다.
물욕 때문은 아닐 테니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 샤피로는 그것이 궁금했다.
“결투를 할까 한다.”
세사르가 아주 큰 영감을 주고 갔다. 부티크에서 에드윈을 만났을 때 세사르가 남긴 영감이 반짝하고 켜졌다.
“누구와 말입니까?”
“누구긴, 에드윈 라포어지.”
그는 부티크에 옷을 사러 올 때도 검을 차고 왔다. 얼마나 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면, 그저 옷을 사러 오는 순간에도 검을 차는가.
“이혼을 르니예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겠어.”
“하지만 그건 르니예 님이 해결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르니예는 자신의 잘못을 제 손으로 만회하려 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었다.
“그랬지. 그런데 르니예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더군.”
“패러히트 공작에게 이혼을 하게끔 도와달라고 하는 건 어떠십니까?”
판사가 귀족의 편이라면, 작위가 가장 높은 귀족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이미 펙까지 맡기지 않았느냐.”
이 문제만큼은 패러히트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아닌 것이 있는 법이다.
제 사람 하나를 온전히 갖지 못해 남의 도움을 빌리는 사내라니.
벨데메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너무 안온하게 있었지.”
“연구하시느라 정신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연구에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봉인을 푸는 데 이쪽이 빠를지도 모르겠구나.”
연구는 진척이 없는데, 소원은 몇 개나 더 이뤘다. 이런 속도라면 봉인을 연구해 푸는 것보다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게 빠를 기세였다.
“주인님이 다치실까 염려됩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나 마찬가지니 이제 나서야지. 내가 다치는 건 두렵지 않다.”
벨데메르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서 말했다.
“다만 그자가 기사도를 완전히 잊었을까 그게 걱정이 되는군.”
“설마하니 결투의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기사 서품까지 받은 자가.”
샤피로는 에드윈을 잘 알진 못했다, 그러나 몇 번 마주쳤을 때 행동거지로 보아 그리 최악은 아니라 판단했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벨데메르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에드윈이 최악까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냥 ‘정부’인 것만도 충분했다. 정실 남편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요부 소리까지 들으면 그의 자존심은 남아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남편을 죽인 정부 역할은 하고 싶지 않거든.”
* * *
“왕립 아카데미 중퇴.”
셰론의 부사관인 이든은 펙의 이력서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뒤집어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경력은 그게 끝이었다.
“졸업도 아니고 중퇴.”
입학 성적은 나름 중위권이었지만 입학한 후 펙의 성적은 나날이 떨어졌다. 펙을 가르친 교수는 그가 학문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런 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실 겁니까?”
“그래.”
이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사단, 아니 기사단까지 갈 것도 없이 종자들 중에 뽑아도 펙보다 나은 인재가 수두룩했다.
“패러히트 공작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다.”
“패러히트 공작께서요?”
“그래, 그자의 조부에게 진 빚이 있다더군.”
1왕자와 2왕자로 나뉘는 정계에서 패러히트 공작은 중립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히 적통인 1왕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왕비가 손을 써 2왕자에게 돌아서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 전에 패러히트 공작의 환심을 사든 약점을 잡든 뭐든 하여 1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패러히트 공작저에서 지낸다니 공작저 동태를 파악하는 데 쓸모가 있을 것이다.”
셰론은 이든을 바라보며 걱정하지 말란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란 없어, 이든 경.”
그게 저 어디 해안가에 박혀 있는 누구라도 말이지.
* * *
“작은 마님이 집을 아예 옮기시려나 봐요.”
프리야가 에드윈에게 차와 다과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에니가 엄청 큰 자루를 들고 가던데. 사람도 들어가겠던데요?”
에드윈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아마 짐을 옮기는 건 아닐 것이다. 저번처럼 상단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것이겠지.
늦은 밤, 에드윈은 르니예의 방이 보이는 어귀에서 기다렸다. 어김없이 르니예는 시꺼먼 로브를 쓰고 몰래 방에서 나왔다.
에드윈은 그런 르니예의 뒤를 조심스레 밟았다. 르니예의 발걸음은 또다시 해안가를 향했다.
그 뒤를 한 발, 또 한 발 따라가던 에드윈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발목이 잡혔다.
“에드윈 라포어 경.”
에드윈은 자리에 우뚝 서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로브를 쓴 커다란 덩치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벨데메르 라인허트 경.”
에드윈은 애써 담담한 척했으나 검 손잡이를 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에게 벨데메르가 서신을 건넸다.
“직접 얼굴 보고 주고 싶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