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의심에 의심을
꿀벌은 벌써 한나절이 넘게 창고에 끼어 있었다. 몇 시간 전 상단의 르니예 방, 르니예는 밖에서 놀다 오라며 창문을 열어 주었다.
꿀벌은, 비록 진짜 벌은 아니지만 다른 벌을 쫓아다니고 꿀도 땄다. 그러다가 무심코 들어간 창고 안.
“저거 뭐야? 새야?”
“벌인데? 무슨 벌이 저렇게 커? 잡아 봐, 어?”
“날개 달린 놈을 무슨 수로 잡아?”
그렇게 말해 놓고 남자들은 꿀벌을 잡으려고 했다. 그들 손을 피해 더 높고 구석진 곳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남자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웨엥?
어떻게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을 수 있어? 밤이슬에 오들오들 떨며 일어나 꿀벌은 분노했다.
바로 벨데메르가 있는 저택으로 날아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단 운영 시간이 지나서도 창고 안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자, 빨리 옮기라고.”
“아니, 꼭 화살을 소금 안에다 포장해야 돼? 이거 포장하다가 내 손이 절여지겠어.”
소금 자루를 열고 그 안에 꼼꼼하게 포장한 화살촉을 넣으며 일꾼이 불만을 토했다.
그 일꾼의 머리 위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허, 무슨 잔말이 그렇게들 많나, 자정되기 전에 끝내야 한다니까.”
* * *
르니예가 꿀벌의 부재를 알아차린 건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아침, 밤새 벨데메르의 집요한 시선에 시달린 르니예는 퀭한 눈을 해서 꿀벌을 찾기는 했다.
“꿀벌.”
보통 꿀벌을 부르면 10초 안에 날아오곤 했다.
“꿀벌, 어디 있어, 출근해야지!”
가끔 불러도 오지 않는 경우가 있긴 했다. 르니예는 손뼉을 짝짝 치면서 꿀벌을 불렀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또 멀리까지 나간 모양입니다.”
사역마의 설정을 ‘벌’로 해 놓은 것이 문제였는지, 꿀벌은 가끔 너무 멀리까지 날아가곤 했다.
“내가 불러서 상단으로 보내지.”
“네,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렇게 나가려던 르니예는 제 뒤통수를 뚫을 것 같은 시선에 머리채를 잡힌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할 말이라도……?”
“그대가 독립적으로 사는 것과 인사는 무슨 관계가 있지?”
“네?”
벨데메르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서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는데.”
“막 매정하고 그러지는 않았는데…….”
“키스는 바라지도 않지만, 포옹도 해 주지 않았잖아.”
르니예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벨데메르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를 끌어안았다.
“갔다 올게요, 벨데메르.”
“조심히 다녀와, 르니예.”
어정쩡하게 떨어져 어색하게 나가는 르니예의 뒤로 벨데메르의 목소리가 따라 나갔다.
“내가 하루 종일 그대만 기다린다는 걸 잊지 말고.”
현관문이 닫히고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벨데메르는 아주 완벽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죄책감을 얹어 주면서, 자신이 얼마나 끈질긴 사람인지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하루 종일 할 일을 만들어 줘야겠어.”
그러나 르니예는, 많이 착해지기는 했지만, 겨우 그 정도에 죄책감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 * *
여기는 패러히트 공작 저.
울며 겨자 먹기로 수도에 올라왔지만, 펙은 의외로 적응을 빨리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라인허트 경?”
“예,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것은 세사르 덕분이었다. 아는 사람 없이 객식구로 들어앉은 펙에게 세사르는 다정하게 다가왔다.
그가 벨데메르 가문의 일원이며 샤피로와 아는 사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답장이 올까요?”
한 달에 한 번, 벨데메르에게 보고서를 보내는 날 펙은 세사르의 편지도 같이 보내 주기로 했다.
“답장을 꼭 써 달라고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라인허트 경.”
저 어린 게, 사역마에게 푹 빠졌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펙은 세사르가 필요했다.
“그나저나 셰론 후작은 어떤 분이십니까?”
정계 인물에 관해서 무지한 펙에게 세사르는 좋은 스승이자 정보원이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아까 보니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으시던데.”
공작저에 있으면서 펙은 패러히트 공작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중 셰론 후작은 유일하게 공작이 먼저 나와 마중한 사람이었다.
“저도 걱정입니다.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후작께서 바쁘시다더니, 얼굴이 많이 상하셨더군요.”
“분위기요? 어떤 분위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공작?”
세사르는 목소리를 낮추고 펙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전하께서 병상에 누우신 지 오래입니다. 언제까지 왕좌를 비워 놓을 수 없으니 누군가 왕위를 이으셔야 하는데…….”
민감한 주제였기에 세사르는 말끝을 흐렸다.
“1왕자 저하께서 적통이시지만, 왕비 전하께서 보고 계시지만은 않을 모양입니다.”
왕비 입장에서야 자기 아들인 2왕자가 이대로 밀려나게 둘 수는 없었으리라. 2왕자가 현 왕비의 친아들이라는 정도는 펙도 알았다.
“그럼 2왕자 저하께서도 왕좌를 노리시는 겁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우리끼리는 괜찮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함부로 입에 올리시면 안 됩니다, 라인허트 경.”
펙은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 보였다. 그러나 펙의 머릿속은 공을 세울 기회를 만난 기쁨에 날뛰었다.
왕좌를 두고 두 왕자가 싸우고 있다.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왕이 된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줄만 잘 서면,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우지 않고도 후작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소공작,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후작님. 지금 가시는 겁니까?”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세사르와 펙은 저희를 향해 다가오는 셰론 후작을 보고 일어섰다.
셰론 후작이 세사르와 가볍게 악수를 하고 펙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라인허트 가문 사람이라지?”
“예, 후작님. 펙 라인허트입니다.”
펙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오래 검을 잡은 이의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그래, 자네에 대해 공작께 말씀 많이 들었네.”
셰론 후작이 그를 보며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돌아온 탕아라지?”
“아, 하하, 예.”
펙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민망해할 것 없네. 다들 누구나 방황 한 번쯤 하는 거 아닌가. 나도 그랬고.”
셰론의 두툼한 손바닥이 펙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중요한 건 앞으로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하느냐지, 안 그런가?”
그랬다. 펙은 나름대로 믿음직스러워 보이게 웃어보았다. 펙이 서게 될 줄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해가 저물고 벨데메르에게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야 르니예는 꿀벌이 아직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까지 갔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가만있자. 어제저녁에 꿀벌이 있었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없었다. 그렇다면 저택에서 벨데메르의 집까지 따라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디 간 거야, 이놈의 자식.”
안 온 게 아니고, 못 온 건가? 르니예는 걱정되는 마음에 본격적으로 꿀벌을 찾아 나섰다.
일단 저택 주변 정원부터 돌아다녔다. 평소 르니예가 일하는 동안, 르니예의 방 가까이에 있는 꽃나무에서 놀던 것이 떠올랐다.
“어디 간 거지? 꿀벌! 꿀벌, 어디 있어?”
르니예는 그 주변 일대를 돌며 꿀벌을 불렀다.
“꿀벌!”
“작은 마님, 벌 잡으시게요?”
그때 정원을 지나가던 하인이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아, 그, 엄청 큰 꿀벌을 봤는데 잡아다 키울까 하고…….”
이런 핑계가 먹힐까? 르니예는 임기응변에 능하지 않은 제 입을 매우 치고 싶었다.
“작은 마님도 그 벌 보셨어요? 무지하게 크더구먼요.”
하인이 혀를 내둘렀다.
“저기 작업실로 들어가는 걸 어제 봤는데, 아직도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사람 불러서 시킬까요?”
르니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안 잡히면 말죠, 뭐.”
꿀벌이 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르니예는 바로 꿀벌이 갇혀 있는 작업실 문을 열었다.
윙-!
꿀벌이 르니예를 발견하고는 바로 날아왔다.
“너, 이 멀리까지 오면 어떡해! 벨데메르한테 이른다.”
힝-
꿀벌의 두 날개가 축 처졌다. 주인님은 무서웠다. 그런 꿀벌을 로브 모자 속에 넣고서 르니예는 돌아서려 했다.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짠 내가 나지?”
그럴 일이 없는데. 르니예는 작업실 안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았다. 말이 거창하게 작업실이지, 실은 포장을 하는 곳이었다.
르니예는 상자며 포대 자루 근처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이거 소금 아닌가?”
마룻바닥 사이사이에 흰 가루가 끼어 있었다. 결정이 보이는 가루를 손바닥에 올린 르니예는 살짝 혀를 가져다 댔다.
“아오, 짜.”
소금을 퉤- 뱉어낸 르니예는 의아했다.
“우리 상단에는 소금을 안 파는데, 왜 여기에 소금이 떨어져 있지?”
이 짠 내는 소금 한두 봉지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르니예는 의아해하며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잠깐 숙부한테 들렀다 가야겠다.”
무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르니예는 작업실 문을 닫고 나와 카밀의 사무실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르니예는, 발에 돌부리라도 걸린 것처럼 멈칫 섰다.
“여기는 아까 거긴데?”
작업실을 빙 둘러 오니, 마구간이 보였다. 르니예가 이전에 화살촉을 주운 바로 그 주변이었다.
“이상하네. 카밀 숙부한테 가 봐야겠어.”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함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르니예는 계속 이상해하면서 카밀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부단주께서 잠시 자리 비우셨습니다.”
“그럼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게요. 아, 차는 됐어요.”
카밀과는 가족같이 막역한 사이였다. 거기에 상단주의 딸이었으니, 아무도 그녀가 부단주의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앉을 데가 없네.”
르니예는 지저분한 사무실을 보고 혀를 쯧쯧 찼다. 르니예는 소파 위에 있는 서류를 착착 정리해 책상 옆 서류 더미에 올렸다.
아니, 올리려다가 멈췄다.
“이건…….”
“르니예?”
문에서 들리는 카밀의 목소리에 르니예는 얼른 서류를 올려놓았다.
“숙부, 사무실 정리 좀 하고 살아요. 여기가 쓰레기장인지 사무실인지 구분이 안 가네.”
르니예는 너스레를 떨면서 자기가 치운 소파 위에 폴짝 앉았다. 카밀은 허허 웃으며 소파 위에 서류를 그대로 깔고 앉았다.
“그래서 내 사무실에 무슨 일이냐, 르니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