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결투의 이유
전날 밤.
르니예는 늦게까지 검술 수련을 하는 벨데메르를 의아하게 여겼다. 넘치는 힘을 분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그러기에 수련이 너무 본격적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저택에 누가 침입하기라도 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봉인을 깨는 연구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검술에 열을 올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그대가 근육질의 몸을 선호하는 것 같아, 관리를 하고 있을 뿐.”
르니예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아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는데. 당황한 르니예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더 변태 같아져 버렸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정말이었군.”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건네는 수건을 받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니예의 귀가 금세 달아올랐다.
“나,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아, 그래?”
이미 늦었다. 해명해 봐야 더 변태 같아질 뿐이었다.
“그런데 검술은 진짜 왜 연습하는 거예요?”
“증명해 보이려고.”
증명? 무슨 증명을 한다는 걸까? 르니예는 대화를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에드윈 그자와 이혼하는 걸 돕겠다.”
“벨데메르, 그 문제는,”
“알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해야 한다는 거.”
르니예는 평민 출신, 에드윈은 귀족 출신, 그리고 펠레포네 영지의 판사는 무조건 귀족의 편을 든다는 것.
르니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까딱 잘못해서 르니예가 벨데메르와 결혼식을 한 것을 들키면 그야말로 에드윈에게 큰 약점을 잡히는 것이라는 것 또한.
“그자와 단둘이 조용히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소원이 이뤄진 다음에도 내가 그대에게 한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소원이 이뤄지고 난 다음에도 나를 곁에 두겠다는 그 약속 말인가. 르니예는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벨데메르는 늘 자신을 증명해 보이며 살았다. 그걸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제가 믿지 않는다고 한 말에 자꾸만 집착했다.
“벨데메르.”
“그대의 말은 내가 약속을 지키고 난 뒤에 듣도록 하지.”
마음이 어쩌고, 하는 말을 과연 소원이 이뤄지고 난 뒤에도 할 수 있을까?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불안이 약속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고 여겼다.
“그보다 그대의 이혼과 내가 검술을 수련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그러게? 생각해 보니 이혼을 돕는 것과 검술이 애초에 무슨 상관…….
“설마 벨데메르, 에드윈을 죽이려고요?”
르니예는 두 손으로 놀라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단둘이 조용히 해결한다는 게, 에드윈을 죽이는 거였어?
“그건 안 돼요.”
벨데메르는 어째서 신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려고 할까? 신이 금기한 주술을 해 조각상에 가둬 놓고, 사람을 해하려 하다니.
“죽여서 해결할 거였으면 진작 그렇게 했죠.”
물론 뒤처리가 아주 복잡하겠지만 말이다. 아, 물론 에드윈을 한 번 죽이기는 했다. 죽였다가 시체로 깨어나게 했으니 완전히 죽인 건 아니지만.
아니지, 그러고 나서 관에 넣고 묻었으니까 죽인 건가? 아무튼 르니예는 또다시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 죽이면 에드윈은 시체로도 깨어나지 않을 테니까.
“난 죽인다고 한 적 없는데.”
죽일까 고민은 했었던 모양이군. 벨데메르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대의 뜻을 따라 주지 못해 안타깝지만, 죽일 생각은 없어.”
“나도 그런 뜻이 없었다니까요?”
“난 그저 결투를 하려 했을 뿐이다.”
결투? 내가 아는 그 결투? 세사르가 신청했던 그 칼부림을 뜻하는 건가? 르니예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윈이랑 결투를 하겠다고요?”
“그래.”
이건 또 무슨 전개야. 르니예는 입술이 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핥았다.
“벨데메르,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이건 다 벨데메르를 걱정해서,”
“내가 질까 봐 걱정하는군.”
벨데메르가 르니예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다.”
“하지만 에드윈은, 기사 서품까지 받았어요.”
“그러나 검을 놓은 지 꽤 된 것 같던데.”
미행도 어설펐다. 훈련을 받지 않은 르니예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벨데메르는 금방 알아차렸다.
검술의 경지가 제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이다. 검도, 검을 잡는 손도.
“그런 점에서 벨데메르도…….”
그렇게 따지면 벨데메르가 더 오래되지 않았나. 조각상에 봉인된 동안 검을 잡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조각상에 봉인되기 전까지 검을 놓은 적 없다.”
검에 흥미를 잃고 마법으로 전향하기는 했으나, 검을 놓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명성이 높으면 적이 많은 법이었고, 벨데메르는 늘 검을 지척에 놓고 잠들었다.
“혹시나 해서 검을 잡아 보았는데 그때 그 감이 살아나더군.”
오랜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벨데메르는 금방 감을 찾았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검술도 수련했으니 승산은 충분했다.
“혹여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지더라도 난 잃을 게 없지 않나.”
지금도 어차피 정부였다. 잃을 게 많은 쪽은 오히려 에드윈이었다.
“에드윈과 이혼을 하지 않고 싶은 거라면 지금 말해.”
그래도 이혼은 반드시 시킬 거지만, 벨데메르는 마치 자비를 베푼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동의하는 거지?”
이게 어떻게 동의하는 게 되는 거지? 그러나 르니예는 완전히 벨데메르에게 말렸다.
“그렇다면 내가 에드윈을 만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해 주었으면 하는데.”
벨데메르는 르니예가 콜론의 비상금을 털러 가는 날을 물었다.
“내일쯤 가려고 했어요.”
“그걸 그자가 알게 할 수 있겠나?”
“그건 어렵지 않죠.”
그야말로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쉬웠다.
“에드윈이 날 미행하는 거, 벨데메르도 알고 있었어요?”
“지난번 그대를 데리러 간 날 알았지. 그대도 알고 있었군?”
“당연하죠. 나도 바보는 아니라구요.”
일부러 두고 보는 중이었다. 에드윈의 목적, 카밀의 목적, 영주의 목적. 아무래도 그 목적이 하나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버지를 감옥에 가게 했다면, 그게 저에게서 상단을 빼앗는 일이라면, 막아야 했다. 반드시 막을 것이다.
“알겠지, 프리야?”
“정말 별걸 다 시키시네요.”
다음 날 아침. 상단에 도착한 르니예는 프리야를 불렀다. 그러고는 프리야에게 에니가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르니예의 방에 들어가더라, 하는 이야기를 에드윈에게 흘리라고 시켰다.
아쉬운 쪽은 프리야였기에, 프리야는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고, 에드윈은 그 작당에 넘어간 줄도 모르고 넘어갔다.
하여 지금, 르니예를 미행하던 에드윈은 제 뒤를 밟은 벨데메르와 마주하고 있었다.
“에드윈 라포어 경.”
에드윈은 자리에 우뚝 서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벨데메르 라인허트 경.”
대체 언제부터 내 뒤를 따라온 거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문 그의 턱에 핏줄이 불거졌다.
“직접 얼굴 보고 주고 싶더군.”
벨데메르가 서신을 내밀었다. 편지 봉투를 본 에드윈의 시선이 불쾌함에서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이게 뭡니까?”
“결투를 청하는 서신이다.”
결투를? 에드윈은 어이가 없어 잠시 말을 잃었다. 무엇을 걸고 하는 결투인지는 물어봐야 입만 아픈 일이었다.
“하인을 보내시지 않고 직접 오셨습니까?”
원래 결투장이랑 종자를 보내 전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종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직접 오다니, 관례에 관해 모르는 건가?
“기회를 주려고.”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겁니까?”
“검을 섞지 않고 이혼할 기회.”
에드윈은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기회를 준다면 제 쪽에서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럼 받아들이는 걸로 알지.”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에드윈은 서신을 품 안에 넣었다.
“르니예 뒤를 밟는 일은 그만둬. 할 거면 완벽하게 하든지.”
벨데메르는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드윈은 검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나를 일부러 불러낸 거로군.”
기가 찼다. 목덜미로 뻐근하게 분노가 차올랐다. 그리고 의문이 하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프리야는 미끼였나.”
아니면, 첩자였나?
* * *
결투의 날이 밝았다. 르니예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벨데메르를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르니예 님.”
르니예의 불안은 샤피로에게까지 전염되었다.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어! 넌 이런 것 좀 말리고 하지.”
“불똥이 왜 제게 튑니까?”
샤피로는 억울했다. 사역마는 주인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주인의 뜻을 꺾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그대가 걱정하니, 나도 걱정이 되는군.”
“미안해요, 벨데메르. 나는 벨데메르가 질까 봐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모르겠다. 그냥 괜히 불안했다. 이긴다고 해도 크게 다치면? 봉인이 온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다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만에 하나, 만약에, 진다면? 그러면 어쩌지?
“그자가 기사도를 완전히 버린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벨데메르는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면 어쩌나. 그땐 정말이지 그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는데.
“저기, 벨데메르.”
르니예가 손을 뒤로하고 꼼지락거리며 다가왔다.
“이거 받아요.”
손수건이었다. 직접 수를 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미는 전달이 될 터였다.
“꼭 이기고 돌아와요, 벨데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