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서명은 신중히
“당연히, 아니지.”
프리야에게 벨데메르에 관한 정보를 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근데 나 착하게 살기로 했는데.”
그러나 문득 착하게 살겠다는 맹세가 떠올랐다. 약속을 어기면 착한 사람이 아닌데.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는데 프리야 때문에 맹세를 어길 수는 없지.
그렇다고 프리야에게 모든 정보를 다 알려 줄 수도 없어 르니예는 고민에 빠졌다.
“적당히 보상해 주지, 뭐.”
“뭘로요?”
“뭐긴, 당연히 돈이지. 내가 가진 게 돈밖에 더 있겠어?”
농담 아닌 농담에 에니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단주께서 돈 펑펑 쓴 거 아시면 난리가 날 텐데.
“에니, 나갈 준비 해. 갈 데가 있어.”
“어디요?”
“손님 유치하러.”
* * *
“이혼 서류에 서명은 받아왔나?”
“예.”
“받았다고?”
하르딘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이내 휘어졌다.
“죽어도 안 해 줄 줄 알았더니.”
“그, 아드님께서 그냥 해 주라고 소리를 지르셔서….”
“루이가?”
하르딘이 쯧, 혀를 찼다.
“고얀 놈, 제가 누구 덕에 그 좋은 약이랑 비싼 의사 쓰는 줄도 모르고.”
루이는 저를 버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르딘은 아비 역할은 했다. 생활비며 약값에 쓰라고 돈도 넉넉히 보냈다.
간병을 도와줄 사람도 보내 준다고 했지만 싫다고 한 건 메리였다.
“자네 눈에 내가 매정해 보이겠지만, 나도 메리에게 아예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메리가 5만 골드를 손에 넣고 영지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더라면, 그녀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솔직히 메리와 그는,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산 세월이 길었다. 이제 보니 아주 얄팍한 의리였지만.
“판사한테 뇌물을 좀 주면 이혼을 빨리 처리해 준다던데, 맞나?”
“예, 주인님.”
주인님 소리는 언제 들어도 짜릿했다. 매일 주인님, 주인님 굽신거리다가 허리를 쫙 펴니 내내 그를 괴롭히던 요통도 싹 가셨다.
“그런데 귀족들만 편의를 봐준다고 합니다.”
“더럽고 치사하구만.”
콜론이 기를 쓰고 자기 딸을 귀족에게 시집 보낸 이유를, 하르딘은 이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괜히 뇌물을 보냈다가 역효과만 날 겁니다. 굳이 이혼을 서두르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새장가를 들고 싶어서 그러지.”
돈이 생겼다. 정원이 딸린 으리으리한 저택을 사고도 남아서 저택 안을 채울 가구도 샀다. 그것도 아주 고급으로.
저택을 관리할 사용인도 스무 명 넘게 고용했고, 주방장에 정원사까지 고용했다.
옷도 귀족들이 입는 원단으로 맞추고, 말과 마차도 샀다. 막상 사고 보니 별 쓸 일은 없었지만, 아무튼 하르딘은 돈을 펑펑 썼다.
“내가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나?”
“뭡니까?”
“새장가를 드는 거야.”
농담처럼 말하고 껄껄 웃었지만 진심이었다.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이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절대, 자기 눈에 흙이 들어와도 이혼해 주지 않겠다고 버텼다. 가서 패악질이라도 부린 다음, 억지로 서명을 시킬까 고민도 했지만 메리 뒤에는 르니예가 있었다.
“그 아비에 그 딸이니,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아.”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르니예의 눈빛이 생각나면 하르딘은 경호를 한 명씩 더 늘렸다.
광장에 있는 조각상이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이라는 비밀을 알고 있으니 르니예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불안했다.
“콜론 상단에는 5만 골드도 넘는 돈이 있을 테지.”
여러모로 하르딘이 불리한 싸움이었다.
“새장가를 빨리 가기는 글렀고, 경매장이나 갈까?”
하르딘은 최근에 경매에 재미를 붙였다. 처음에 갔을 때는 경매장 물건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했다.
흔해 빠진 돌멩이 하나 진열대에 올려놓고 백 골드씩 받아 가는 게 날강도가 아니고 뭔가, 싶었다.
그러나 남들보다 비싼 금액에 그 돌멩이를 구매할 때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경매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저, 주인님.”
“왜?”
“저번에 구매한 물건의 잔금을 치르고 났더니 금고가 반이나 비었습니다. 거기에 사용인들 봉급도 줘야 하고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하르딘이 턱을 매만졌다. 2만 골드만 남아 있어도 큰돈이었다. 하지만 5만 골드를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2만 골드는 매우 적어 보이기 마련이었다.
“어디 돈 불릴 데 없나?”
“주인님, 그 천막은 어떠십니까?”
“천막? 아, 그 천막?”
천막이라 함은 도박장을 은근히 돌려 말하는 단어였다.
“이번에 새로 생긴 데를 말하는 건가?”
“예, 주인님. 거기가 판돈이 아주 크다던데요.”
“그래?”
하르딘은 혹했다. 안 그래도 도박 생각이 나 손이 간질거리던 차였다.
“재미 삼아 딱 한 번만 가볼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또 5만 골드를 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메리가 대신 소원을 빌러 가라고 했을 때부터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으니.
게다가 이번에 따면 영지가 아니라 왕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번 딱 한 번만.”
영지의 북쪽, 암시장. 각종 불법 상점이 판치는 그곳에서 가장 불법적인 곳, 도박장으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넷이 나란히 들어왔다.
그들은 특별 회원이라도 되는지 들어오자마자 따로 마련된 자리를 안내받았다. 치렁치렁 구슬이 잔뜩 달린 발로 사방이 막힌 자리 안으로 딜러가 들어가는 것을 보며 하르딘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뭐요?”
“뭐겠소, 귀족이지.”
“귀족도 이런 도박장에 오는구만.”
하르딘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카드를 살펴보며 말했다.
“여기는 판돈이 크니까 귀족도 오는 거요. 그나저나 그쪽이 어제 그 판돈을 다 쓸어 갔다던데.”
남자가 술잔을 양옆으로 찰랑찰랑 흔들며 떠보듯 물었다.
“운이 좋았지.”
어젯밤, 하르딘은 꽤 많은 돈을 땄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오늘 또 도박장에 들렀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큰 판돈을 들고서.
“오늘은 감이 어떤 거 같습니까?”
“좋으면 어쩌고 나쁘면 어쩌시게.”
“좋은 거 같다고 하면 옆 테이블로 가야지, 나는.”
넉살 좋은 농담에 하르딘이 허허 웃는 소리가, 발 너머로 들렸다.
“어떻게 다시 도박장으로 불러들인 겁니까, 르니예 님?”
후드를 벗으며 샤피로가 물었다. 르니예는 하르딘을 등지고 앉아, 주의 깊게 소리를 들으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하인을 하나 매수했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원래 도박이란 게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는 거거든. 특히나 5만 골드나 딴 사람은 말이야.”
“인간들이란, 정말 욕망 덩어리로군요.”
르니예 옆에 앉아 있던 에니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걸 왜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하지?”
“그런 적 없습니다. 일개 하녀께서 피해망상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래, 나 피해망상 있으니까 눈을 좀 똑바로 떠 주기를 바라. 나한테 피해 입기 싫으면.”
에니와 샤피로가 나란히 한마디씩 주고받는 동안, 하르딘의 테이블에서는 또 한 게임이 끝났다.
“이번 판은 졌나 보네.”
발 너머에서 분해하는 하르딘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 있어 보이는군.”
“지금까지는 쭉 이겼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게임은 시작도 안 했어요.”
르니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쪽에서 술잔을 쏟는 소리가 들렸다.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는 신호였다.
“오늘은 내 운이 트이나 본데, 어?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얼른 달라고.”
“자자, 여기 주잖아. 거, 빨리 정리하고 패 돌려.”
연속으로 진 하르딘의 바짝 약 오른 목소리에도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이와 침대를 같이 쓰는 건 불편했지만, 르니예가 없는 침대는 허전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 르니예가 무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굳이 도박장까지 따라왔다. 꿀벌을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기는 하지만, 같이 오고 싶었다.
“아이고, 오늘은 내가 되는 날인가 보네.”
칩끼리 짤랑짤랑 부딪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르니예는 에니와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 욕망을 다른 감정으로 합리화하며 외면할 이유가 있는가?
“벨데메르,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르니예는 저에게로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에, 작전 테이블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입을 맞추고 싶어서’라고 말하려다가 벨데메르는 옅게 웃었다. 여기에서 하기에 적절치 않은 말이지.
“좋은 작전이다, 르니예.”
“고마워요, 벨데메르.”
르니예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었다. 그걸로 이 어둑어둑한 공간이 환해지는 것 같은 기분은 벨데메르에게 색다른 것이었다.
“아이, 잠깐만.”
의자가 뒤로 드르륵 끌리는 소리에 르니예는 다시 하르딘의 테이블로 귀를 기울였다.
“저 형씨는 판돈이 없잖아!”
“그러네. 판돈도 없는 사람한테 패를 왜 돌려?”
딜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만, 카드를 돌려주시겠습니까?”
“잠깐, 잠깐.”
판돈도 없는데 패를 받은 사람은 바로 하르딘이었다. 연속되는 게임에서 그는 마지막 칩 하나까지 싹 잃었다.
“진정해 봐요, 좀. 지금 판돈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하라고 하며 하인을 불렀다.
“그럼 판돈 오면 다음 판부터 끼쇼.”
“금방 다녀온다니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어요. 나중에 가져오겠다고 하고 도망간 놈이 한둘인 줄 알아요? 돈 있으면 다음 판부터 하면 되는 거 아뇨.”
그럴 수가 없었다. 방금 받은 패가 너무 좋았다. 이번엔 무조건이었다. 이번 게임으로 이제까지 잃은 것을 전부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면 돈 좀 빌려주시오.”
“돈을 빌리시겠습니까?”
딜러가 하르딘을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그럴 테니까 얼른 진행 좀 합시다.”
어차피 금방 갚는다. 가지고 있는 돈에 비하면 그리 큰돈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하르딘은 차용증에 서명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카드에 눈이 먼 그는, 차용증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다. 하르딘이 서명한 차용증은 딜러의 손에서, 웨이터에게로, 그리고 르니예에게로 전해졌다.
그 옆에서 차용증을 흘긋 보던 에니가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하르딘 아저씨는 이제 망했네요, 작은 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