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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51화 (51/120)

51화. 왜 안 돼?

“하르딘 아저씨는 이제 망했네요, 작은 마님.”

작은 마님.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공간에서 벨데메르의 귀에 오로지 그 단어만이 들렸다.

작은 마님이란 그 짧은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르니예가 여전히 에드윈의 여자라는 것, 자신은 아직도 그녀의 정부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르니예를 보며 웃고 있었다는 것.

“계약서에 서명할 때는 항상 잘 읽어 봐야 하는 법이거늘.”

르니예가 혀를 쯧 차며 비웃었다. 비웃음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하르딘이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말도 안 돼, 이 사기꾼 놈들!”

분노한 하르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분명 좋은 패를 받았다. 게임을 100번 해도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패였다. 그런데 그보다 좋은 패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어!”

하르딘의 주장처럼 이렇게 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짜고 치는 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하르딘이 짜고 치는 판인 걸 증명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손님.”

“이거 놔, 이거 안 놔? 이 사기꾼 놈들아, 너네, 너희 다 한패지?”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르딘이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딜러와 패거리들이 그를 천막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만 가지.”

벨데메르가 먼저 일어섰다. 소란스러웠다. 진짜 소란스러운 것은 주변이 아니라 그의 정신이었다.

“저 안이 너무 시끄러웠죠?”

많이 시끄러웠나? 벨데메르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도박장 같은 곳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사람을 괜히 데리고 온 건가 싶었다.

“얼른 조용한 곳으로 가요.”

“그래.”

르니예는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정작 시끄럽다고 한 벨데메르는 르니예의 뒤를 따라왔다.

“얼른 타요, 벨데메르.”

먼저 마차 안으로 들어간 르니예가 손짓했다. 벨데메르는 그런 르니예를 가만히 보다가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겠습니다, 주인님.”

문이 닫혔다. 아주 조용해진 건 아니지만, 고함과 욕설, 취기 섞인 목소리는 그 형체를 잃고 참아 줄 만한 소음으로 바뀌었다.

“이제 좀 조용하죠?”

“글쎄.”

벨데메르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음이었다.

“아직도 시끄러워요?”

“그래, 르니예. 아직도 시끄러워.”

르니예는 자기가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아, 그럼 조용히 하고 있을게요.”

“그래도 소용없다. 그대 존재 자체가 시끄러우니까.”

다른 마차를 타고 갔어야 했나? 그렇다고 해도 내 존재 자체가 시끄러울 건 또 뭐야?

“그대는 여전히 다른 남자의 아내지.”

“그, 그렇긴 한데 나도 노력하고 있어요. 이혼 서류도 위조해서 보내 보려고 했고, 또…….”

“하지만 실패했고.”

그래, 내가 죄인이지. 르니예는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그대의 정부지.”

한데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이 드는 게 이상했다.

“그럼에도 그대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

“……네?”

그는 르니예를 원했다. 르니예를 손에 넣고 싶었다. 마음껏 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 입을 맞추면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녀를 끌어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싫은가?”

그럴 이유는 없었다. 르니예가 저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그러나 르니예가 저를 거부할 리가 있을까.

“저기, 벨데메르…….”

당황한 르니예가 말끝을 흐렸다.

“싫으면 지금 밀어내.”

르니예의 턱을 쥔 그의 손가락이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둑한 마차 안에서도 그의 눈동자에 서린 어둠이 끓는 게 보였다.

“아니면 눈 감고.”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르니예는 이미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르니예는 홀린 듯 눈을 감았고, 순식간에 벨데메르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으응.”

그의 혀가 작고 앙증맞은 입술을 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뱉어내는 숨이 고스란히 르니예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감정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 욕망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어떤 욕망이든 그 대상을 손에 넣으면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무엇이든 그랬다. 부와 명예가 그랬으며, 사람과 물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르니예라고 다를까. 르니예를 손에 넣으면 결국 사라질 욕망이겠지.

벨데메르는 그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르니예를 안아 볼 셈이었다. 욕망의 끝이 보이면 이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겠지.

“저, 그, 나는 상단에 할 일이 남아서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르니예는 벨데메르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너무 바쁘게 움직이는 거 아닌가? 좀 쉬었다가 가지?”

“아니에요, 이 정도는 거뜬해요.”

르니예는 도리질을 치면서 벨데메르와 샤피로에게 어서 들어가라 손짓했다.

“그럼 이따 저녁에나 보는 건가?”

“늦을지도 몰라요.”

“기다리지.”

여유 있게 웃으며 들어간 벨데메르와 달리 르니예는 생각으로 빡빡해진 머릿속이 무거울 지경이었다.

“상단으로 가실 거예요?”

“아니, 메리 아주머니한테.”

“잠시만요, 작은 마님. 나가기 전에 모자 좀 잘해 드릴게요.”

에니가 흐트러진 로브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마차 안에서 대체 뭘 하셨기에 옷이 다 구겨졌어요?”

“어? 아, 그, 깜빡 졸았어.”

졸기는. 졸 시간도 없었다. 마차에서 오는 내내, 덜컹거리는 길에서도 벨데메르는 르니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르니예가 저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허리를 감던 그 단단한 팔뚝은…….

생각하니 또 아찔했다. 그동안 벨데메르와 입을 몇 번이나 맞췄지만, 오늘은 달랐다.

“많이 피곤하세요? 하긴, 요즘 일이 많긴 했죠. 이럴 때 작은 주인님이 빨리 이혼이라도 해 주시면 좋겠는데.”

이혼, 그래, 그것 때문이다. 벨데메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혼 이야기를 하고서 키스를 한 건, 그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진한 입맞춤이라니…….

르니예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럼에도 그대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이혼이 미뤄지고 있는 이 상황이 불쾌한데, 그런데도 입을 맞추고 싶다니.

그게 좋아한다는 말로 들리면 내 머리가 이상한 건가?

“작은 마님?”

“응?”

“왜 그렇게 넋을 놓고 계세요. 다 왔어요, 메리 아주머니 집.”

“아기씨, 정말 감사해요.”

메리는 르니예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에 이제야 생기가 돌았다.

“아니에요, 괜히 나 때문에 마음고생만 더 했잖아요.”

“그게 왜 아기씨 때문이에요. 그 인간 때문이지.”

하르딘 이야기가 나오자 메리는 이를 갈았다. 그가 곧 망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간 느낀 배신감을 다 상쇄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 인간 실체를 알아서 다행이지 뭐예요.”

그러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소원이 아니었다면 하르딘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영영 모르고 살 뻔하지 않았나.

“그런 인간이랑 계속 한 이불 덮고 살 생각을 하면 그냥 치가 떨립니다. 그러니 제가 아기씨에게 감사해야죠.”

메리가 르니예의 손등을 살며시 쓸었다. 험한 일을 많이 해 거칠어진 손바닥에 비해 르니예의 손은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아기씨, 근데 정말 이러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상단주께서 돌아오시면 가만히 안 계실 텐데.”

“괜찮아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다 쓰고 난 다음에는, 아버지라도 어쩌겠어.

“아기씨.”

이 말을 할까 말까 메리는 수백 번 고민했다. 고민만 하다가 삼 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아기씨께서 작은 주인님에게 그런 대접 받을 이유가 난 없다고 봐요.”

괜히 간섭했다가 불똥이 튈까 무서웠다. 그래도 진작 말해 줄 것을, 메리는 후회했다.

“이제라도 아기씨가 현명한 결정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르니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다들 쉬쉬했지만 르니예와 에드윈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혼은 했지만, 일방적인 짝사랑, 냉대, 잦은 다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겠지. 메리의 눈에 그 모습이 딱하게 보였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르니예가 본인을 봤다면 한심하다고 했을 테니까.

“아기씨는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나는 늦었지만.”

“안 늦었어요, 아주머니도.”

무거워진 분위기를 르니예가 농담으로 풀었다. 그렇게 하하 호호 웃고 나왔는데 르니예의 마음은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작은 마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한 발에 한 번씩 쉬는 한숨을 에니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말해보세요. 저한테 말 못 하실 게 뭐가 있어요.”

그래, 두 집 살림하는 것도 말했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할까.

“벨데메르가 나를 좋아하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에니는 정말 의문이었다. 좋아하면 뭐?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아, 작은 마님은 벨데메르 님을 좋아하지 않는데 벨데메르 님이 작은 마님을 좋아해서요?”

묻고 나니 또 의문이었다.

“좋아하지 않는데 매번 입술이 부을 정도로 키스를, 읍!”

르니예는 에니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 그건, 어른들 사정이야.”

“저도 어른인데요.”

르니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벨데메르와의 키스는 쓸데없이 달콤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벨데메르는 나를 좋아하나? 그러면 나는? 난 벨데메르를,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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