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집 살림을 하는 중입니다만-49화 (49/120)

49화. 거래

“이혼 신청에 대한 답신 맞죠?”

“맞아.”

르니예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앞에 거의 두 문단이 넘는 안부 인사를 지나니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뭐래요, 작은 마님?”

“조용히 처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대.”

조금 나쁘고, 대체로 좋은 소식이었다. 시간이 걸리니 느긋하게 기다려 달라, 이 말은 곧 처리를 해 주겠다는 뜻이니까.

“아무튼 되긴 된 거네요?”

“응, 됐나 봐. 뇌물 준 보람이 있네.”

보람이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다. 벨데메르와 헤어질 시간이 코앞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될까요?”

“글쎄, 길어도 석 달 아니겠어?”

이제 정 뗄 때가 왔다. 소원이 이뤄지고 나면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일 것이다.

가끔 그런 어이없는 소원도 있었지, 하고 떠올려 주기는 하겠지. 그러나 벨데메르는 그뿐일 거다.

벨데메르의 기억에 잠 못 드는 사람은 오로지 르니예 하나일 테니.

“그래도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잘됐지.”

르니예는 씁쓸한 마음을 꾹 누르며 시원한 척, 후련한 척을 했다.

“정말 그럴까요?”

“뭐가 정말 그……, 프리야?”

무심코 대답하던 르니예는 어느새 가까이 와 있는 프리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발소리도 못 들었는데?

“뭐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에니도 놀란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서신을 전달한 건데.

“방금 왔어요.”

프리야는 싱긋 웃었다.

일부러 인기척을 지운 건 아니었는데, 그걸 못 듣나?

하긴, 르니예와 에니 같은 일반인에게 들키면 그것 또한 도둑의 수치였다.

도둑 길드에서는 발소리를 죽이는 법부터 가르친다. 조금이라도 발소리가 들리면 당장 회초리가 날아들었다.

그러다 보면 화장실 갈 때도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걷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정말 잘된 게 맞냐고 물어본 거예요.”

“우리가 무슨 얘기하고 있었는지 들었어?”

대답 대신, 프리야는 손가락으로 편지 봉투를 가리켰다.

“작은 주인님 몰래 이혼 서류 내셨다면서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음, 어쩌다가?”

*

진짜로 ‘어쩌다가’ 알게 되었다. 삼 일 전쯤인가, 에드윈의 시중을 드는 하인 하나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요즘 작은 주인님께서 잉크랑 종이를 엄청 많이 쓰신다니까. 뭘 하시는지 모르겠어. 누구한테 연애편지라도 쓰시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

타박하는 소리 뒤로 숨죽여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애편지는 아닐 텐데.’

벽 뒤에서 우연히 듣고 있던 프리야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림이라도 그리나?’

갑자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이상한데? 바짝 세워진 감이 프리야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에드윈에게 뭔가가 있다고.

‘요즘 작은 주인님 바쁘셔? 매일 서재에 틀어박혀서 뭘 쓰기만 하시느라 얼굴 보기가 힘드네.’

에드윈에 대해 무언가 알아내야 할 때, 프리야는 바딜을 제일 먼저 찾아갔다. 눈꼬리를 툭 내려뜨리고 시무룩하게 물어보면, 그걸로 게임 끝이니까.

‘피터는 연애편지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이 헛소리하는 거야.’

그렇지, 이렇게 나와야지. 프리야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딜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말해, 뭐 하는지 어서 말하라고.

‘요즘 글씨 연습을 하시느라 그래.’

‘글씨? 글씨 연습을 왜? 너 거짓말하는 거지?’

‘아니야, 정말이야.’

상황은 이러했다. 르니예는 에드윈 몰래 이혼 서류를 판사에게 보냈고, 판사는 그 답신을 에드윈에게 직접 보냈다.

‘도련님께서 판사 글씨체로 작은 마님한테 편지를 보낼 거야. 그 판사인 척하면서.’

‘작은 마님을 속이겠다는 거네.’

‘그래, 판사 쪽에는 승인을 미뤄 달라고 이미 서신을 보낸 상태야.’

그러면 르니예는 자기 계획이 실패한 줄도 모르고 마냥 승인 날 때까지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은 이혼하자고 조르지 않을 테니, 에드윈의 입장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혼도 미루면서 르니예의 이혼 재촉도 막는, 아주 좋은 작전이었다.

‘그래서 요즘 편지 관리를 에니가 하는 거였어.’

왜 저러나 했는데, 이런 깜찍한 작전을 짜고 있었을 줄이야.

‘프리야.’

바딜이 프리야의 어깨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자꾸만 프리야에게 향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목숨을 살려 준 사람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는데.

‘이번 일은 도련님께 정말 중요한 일이야.’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아직도 몰라?’

‘정말 몰라. 나한테도 말씀을 안 하신다니까.’

바딜에게도 아직까지 비밀을 지키고 있다면, 엄청 중요한 일인가 본데. 프리야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중요하고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반드시 상단에서 해야 한다, 이거잖아.

그래서 어떻게든 이혼을 미루려고 하는 것이다. 상단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르니예와 이혼을 하고 나면 상단에서 살 명분이 사라지니까.

‘음?’

이상하네, 이유가 나랑 똑같잖아? 프리야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프리야가 어떻게든 에드윈에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이유도 그거였다.

프리야가 맡은 ‘중요하고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도둑질’ 역시 상단 안에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까.

‘아니겠지.’

설마 똑같은 걸 노리고 있겠어? 설마, 에드윈이 기사의 자존심도 다 버리고 도둑질을 하겠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걸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시켰다면? 그러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사람이었다.

판사의 글씨체를 흉내 내 서신을 위조해서라도.

‘으.’

만약 에드윈도 그 보물을 노린다면, 골치 아픈 일이다. 프리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 아파?’

‘어.’

너희 도련님 때문에 내가 머리가 아주 지끈지끈하다. 프리야는 바딜의 걱정을 물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계획이 하나 떠올랐는데, 조금 위험했다.

‘어차피 시간은 없어.’

마코야데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다시 길드로 돌아오란 연락이 오면, 끝장이다.

‘그러면 정면 돌파로 가자.’

르니예와 거래를 하는 것이다. 재료는 충분하다. 프리야는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르니예가 에드윈이 보낸 가짜 서신을 받는 때가 적절하겠지.

* * *

“그 서신에 관한 정보를 드릴 수 있어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르니예가 물었다.

“대가는?”

“대가는…….”

무심코 말하려던 프리야는 에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리 좀 비켜 줘, 에니.”

“네, 작은 마님.”

에니는 프리야를 흘긋 쏘아보고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 떨어졌다. 그래도 내내 프리야를 노려보는 건 잊지 않았다.

“자, 이제 말해 봐.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정보요.”

“정보?”

가는 것이 정보이니, 오는 것도 정보여야겠지. 프리야는 늘 궁금했다.

르니예는 소원을 빌었는지, 아니면 르니예가 갔을 때도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은 없었는지.

만약에 르니예도 허탕을 친 거라면, 그 지도는 가짜다. 아니 애초에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프리야는 르니예의 서랍에서 도로 훔친 보석을 마코야데스에게 넘기고 손을 털어 버릴 작정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조각상에 대한 정보를 원해요.”

하지만 만약에 그 조각상이 실제로 있고, 르니예가 그 위치를 알고 있다면, 프리야는 르니예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조각상에 대한 정보라니?”

“조각상이 실제로 있는지 알고 싶어요.”

르니예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이걸 어쩐다.

“일단 네가 가진 정보부터 들어 볼게.”

“그럼 공정한 거래가 아닌데요, 작은 마님.”

“원래 더 아쉬운 쪽이 비싼 값을 치르는 법이야.”

프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순순히 알려 줄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그 서신 가짜예요. 헉슬리 판사가 보낸 게 아니고 작은 주인님이 보내신 거예요. 그 판사 글씨체 따라 해서.”

“……에드윈이?”

에드윈이 전부 다 안다는 뜻인가? 르니예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자, 이제 알려 주세요. 조각상이 진짜 있어요?”

“에드윈이 우리 상단에 남아서 한다는 그 중요한 일이 뭔지도 알려 줘야지.”

프리야는 기가 찼다. 주기로 한 정보는 이미 줬는데, 또 다른 정보를 내놓으라고?

“약속이 다르잖아요, 작은 마님.”

“내가 말했잖아. 더 아쉬운 쪽이 비싼 값을 치르는 거라고. 방금 네가 준 정보는 시간이 흐르면 네가 알려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았을 거야.”

물론 그 ‘시간’이 중요하긴 하지만.

“에드윈이 하는 일이 뭔지 알아 와.”

“바딜한테도 말을 안 한다는데 그걸 제가 무슨 수로 알아 와요?”

“무슨 수를 써서든.”

르니예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수를 써야 하는지까지 제가 알려 줘야 하나.

“칼만 안 드셨지 거의 강도나 마찬가지시네요.”

눈은 부글부글 끓으면서 입가를 끌어 올린 프리야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사근사근하지 않은 내용을 말했다.

“그건 우리 아버지 별명이었는데 이제 내가 물려받아도 되겠다, 그치?”

르니예는 눈매까지 반으로 접어가며 웃었다. 프리야를 이용하려고 상단에 두기는 했지만,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그 정보 알아 오면, 정말 알려 주시는 거죠?”

“그래.”

어쩐지 밑지는 기분이었지만, 아쉬운 쪽이 참아야지 어쩌겠나. 어차피 에드윈의 맡은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아볼 계획이었으니 겸사겸사라고 생각하자.

“약속 꼭 지키세요.”

“아, 프리야.”

돌아서는 프리야를 르니예가 불렀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에드윈을 진짜 좋아하기는 해?”

“조각상이 진짜 있는지 알려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어떤 정보도 공짜로 주지 않겠다, 이거지. 르니예는 픽 웃었다.

“그냥 가라.”

프리야는 금방 입술을 삐죽이면서 자리를 떴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에니가 다가왔다.

대충 이야기를 들은 에니는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정말로 알려 주실 거예요?”

“당연히,”

르니예의 입술 끝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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