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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사내연애 -3화 (3/32)

Chapter. 3

다정과 세아는 대학 선후배 사이로, 졸업 후 공교롭게도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친분이 있었던 둘은 바쁜 일과를 마친 후, 종종 저녁도 먹고 함께 쇼핑도 하며 급속도로 친해졌다. 늘 같이 붙어있다 보니, 다정이 현우를 좋아하는 사실은 세아가 먼저 눈치챘다.

어느 날, 세아가 물었다.

“선배. 서현우 씨한테 관심 있죠?”

이미 자신의 짝사랑이 들통 난 것 같아, 다정은 홀로 가슴속 깊이 담아두었던 마음을 세아에게 털어놓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선배. 서현우 씨도 꼭 선배를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정말 그럴까?”

“그럼요. 선배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데요.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요!”

그 후로 다정은 현우와의 일을 오직 세아에게만 말했다.

다정은 늘 응원의 말을 내뱉고, 자신의 고민에 귀 기울여준 그녀가 고마웠던 순간이 많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현우와 잘되길 바라겠다며 해맑게 웃어주던 그녀였는데…….

그런 그녀가 어째서…….

다정은 눈앞에 마주한 참혹한 현실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사랑을 응원해주었던 후배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순간, 그의 품에 안겨있던 세아가 고개를 들면서 정면에 있는 다정과 눈이 마주쳤다.

다정을 본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다정에게 등을 돌린 채 서있는 현우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세아가 그대로 굳어있는 사이, 다정은 몸을 홱 돌려 비품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비품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세아를 품에 안고 있던 현우가 깜짝 놀라며 속삭였다.

“누가 들어온 건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현우의 턱선을 세아가 어루만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턱을 타고 올라가 그의 도톰한 입술을 쓸었다.

“아니야. 아무도 없어, 현우 씨.”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에 현우의 두 뺨이 타올랐다. 세아는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가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

다정이 비품실에서 돌아왔을 땐, 사무실 안은 오전에 있을 회의 준비로 다들 바빴다.

무채색 정장차림에 뾰족한 안경을 쓴 윤 주임이 그녀의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다정 씨. 파일 챙겨서 회의실 들어와요.”

“아, 네.”

다정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회의 자료를 챙겨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기획팀 사무실 바로 옆에 마련된 회의실은 오전 회의를 위해 모인 팀원들로 자리가 하나둘씩 채워졌다.

회의실 문을 마지막으로 닫고 들어온 사원은 바로 현우와 세아.

둘은 긴 테이블을 마주 보고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았다.

팀원이 모이자, 맨 앞에 앉은 도훈이 말했다.

“모두 온 것 같으니, 회의 시작하죠.”

그가 굵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내용은 홍콩에 건설 예정 중인 리조트 사업이 중점이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다정의 머릿속은 현우와 세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품실 안에서 보았던 둘의 다정한 모습이 도저히 지워지질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올해부터? 아니면 작년부터?

몇 개월이든 몇 년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둘이 뜨거운 사이라는 것이었고, 그것도 모른 채 자신은 현우에게 고백할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민세아.

다정은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차오르는 배신감과 비참함에 다정의 눈가가 떨려올 때였다.

“한다정 씨.”

다정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들었다.

“네?”

고개를 들자, 도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의 시선이 다정에게 향해있었다.

분위기로 짐작건대, 도훈은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모양이었다.

살짝 당황한 다정에게 도훈은 무뚝뚝하게 물었다.

“자재팀에 납품일은 확인했습니까?”

“네. 4월 10일 중국 공장에서 납품됩니다.”

“너무 늦습니다. 다음 달까지 납품 기일을 맞춰주세요.”

“네. 최대한 맞춰보겠습니다.”

“그리고,”

도훈의 날렵한 눈매가 그녀에게 향했다.

“회의 중엔 회의에만 집중해주세요.”

그는 그대로였다.

당당하게 편 어깨도, 무뚝뚝한 눈빛도, 높낮음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도…….

모두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오늘 아침 자신에게 연애하자고 했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왠지 자신만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어젯밤 일 때문에 한숨도 못 자고, 오늘 그의 고백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네. 죄송합니다.”

다정은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회의는 다시 진행되었다.

회의 중간중간 세아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눈빛.

그 시선이 불편하고, 숨이 막혀왔다.

당장에라도 회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회의가 끝날 즈음, 다정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세아의 문자였다.

[선배. 회의 끝나고 잠시 시간 좀 내줘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

회의가 끝나고, 다정과 세아는 아무도 없는 비상계단에서 마주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세아가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선배.”

“…….”

“처음부터…… 선배를 속이려 했던 건 아니에요.”

다정은 말이 없었고, 세아는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정말 선배와 현우 씨가 잘되길 바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현우 씨가 저에게 고백을 했고, 저는 당연히 거절했어요. 하지만 그 뒤로도 현우 씨는 계속 애정 공세를 펼쳤고, 포기할 줄을 몰랐어요.”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도 현우 씨에게 끌리기 시작했어요. 선배 때문에라도 절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진심 어린 현우 씨의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만…….”

“언제부터였어?”

다정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 사귄 거냐고?”

“…….”

그녀의 싸늘한 음색에 세아가 주춤했다. 세아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천천히 대답했다.

“재작년…… 겨울부터요.”

재작년 겨울이면 벌써 사귄 지 1년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다정은 배신감에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2년 가까이 그를 좋아한다고 고민을 털어놓는 동안, 그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비참하고 비참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여기서 울면 정말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다정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바라보던 세아가 눈매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선배……. 미안해요.”

“현우 씨가 널 좋아하고, 너 역시 현우 씨를 좋아한 게 된 것에 내가 뭐라 할 자격은 없어.”

다정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사귀기로 했으면, 그때는 내게 말했어야지.”

“…….”

“그동안 네가 현우 씨 애인인지도 모르고 연애상담을 한 나는 뭐가 돼? 고백도 못 하고 쩔쩔매는 내 모습이 재밌었니?”

세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안해요, 선배. 언젠가 말하려고 했는데, 선배가 현우 씨를 너무 좋아하는 걸 보면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의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정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왜 울어?

지금 정말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데…….

다정은 흐느끼는 세아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네가 하는 말들 모두 나한테는 변명으로밖에 안 들려.”

“…….”

“네가 정말 진심으로 날 생각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날 속이진 말았어야 해.”

그녀를 믿고 의지한 만큼 배신감이 컸다.

다정은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나 예전처럼 너 대하긴 힘들 것 같아. 앞으로 업무 외엔 말 섞는 일 없었으면 해.”

“……선배.”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홱 떼어냈다.

다정은 차갑게 돌아서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도 말고.”

***

“다정 씨. 점심 안 먹어요?”

점심시간.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서던 여사원이 홀로 남아있는 다정에게 물었다.

다정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다이어트 중이에요.”

“다정 씨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잘 가려서 그렇지, 구석구석 숨은 살이 많아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여사원이 사무실을 나가자, 다정의 입가에 맺혀있던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책상 위로 고개를 묻었다.

오전 내내 무슨 생각으로 일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아와 현우의 일로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 끝은 팀장실로 향해있었다. 이런 상태로 회사에 남아있을 바엔, 차라리 조퇴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몸이 안 좋다고 말하고 반차 쓸까.”

주인 없는 팀장실을 바라보던 다정은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처 목록에서 팀장님이라는 이름을 찾자, 화면에 그의 이름이 채워졌다.

[지도훈 팀장님]

그의 이름을 바라보는 다정의 눈매가 가늘게 흔들렸다.

손가락이 주춤했다. 손쉽게 찾은 연락처였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기는 쉽지가 않았다.

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몰라도, 그를 마주하기가 어렵고 어색해졌다.

당분간 그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

그렇게 판단한 다정은 핸드폰을 다시 재킷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정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문득 상처받은 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처롭게 떨리던 눈망울과 하염없이 흘러대던 눈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금 처지에 그녀가 마음에 걸리다니, 정말 미친 것이 틀림없다.

다정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

난 괜찮으니까 울지 말라고 다독여줘야 했을까?

쿨하게 웃으며 둘 사이를 축복해줘야 했을까?’

회사를 관두지 않는 이상, 둘은 앞으로 계속 마주해야 한다. 원활한 회사생활을 위해서는, 거짓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정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현우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세아에 대한 믿음도 진심이었기에.

두 사람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도 컸고, 거짓으로라도 두 사람을 축복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떠올리다 보니, 가슴이 또 한 번 콱 막혀왔다.

“후우…….”

목이 말랐다. 맘 같아선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다정은 갈증을 식히려고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

시원한 음료를 마시기 위해 휴게실로 향하던 다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휴게실 안쪽으로 향했다.

사원 모두 식당에 가서 비어 있을 줄 알았던 휴게실엔 세아와 윤 주임이 앉아있었다. 둘은 다정이 가까이 왔는지 모르고 이야기 중이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이자,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는 다정.

그녀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근데 다정 씨도 좀 너무하다. 세아 씨가 그렇게 사과를 했는데 받아주지도 않고 말이야.”

높은 억양으로 툴툴거리는 윤 주임의 목소리가 다정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다정은 이어진 그녀의 말 또한 듣고 말았다.

“솔직히 다정 씨가 먼저 좋아했다고, 무조건 현우 씨와 잘돼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서로 마음이 가는 상대끼리 만나야지. 안 그래?”

다정은 떨려오는 손을 꽈악 쥐었다.

오늘 아침 비품실에서 보았던 장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제게 생길 줄은 몰랐다.

오직 세아에게만 말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친하지도 않은 다른 사원의 입에서 듣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가슴속에 묻어왔던 2년간의 짝사랑이 남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는 한낱 이야깃거리로 전락하는 순간, 다정은 더는 뵈는 게 없었다.

“민세아!”

다정의 목소리에 세아와 윤 주임이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다정을 발견한 세아는 얼굴이 새파래져 어쩔 줄을 몰랐다. 다정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서…… 선배. 오해예요.”

세아가 고개를 저어댔지만, 다정의 매서운 눈빛은 더욱 서늘해졌다.

“넌 나 등신 취급하는 게 재밌니?”

“……등신 취급이라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제가 어떻게 선배를…….”

“등신처럼 본 게 아니면 2년 가까이 날 속인 것도 모자라, 아무에게나 내 이야길 함부로 할 수 있어?!”

참아왔던 감정이 와르르 쏟아졌다.

“얼마나 더 날 바보로 만들 생각이었어?! 얼마나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할 건데?!”

그녀의 외침에 세아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옆에 있던 윤 주임이 끼어들었다.

“다정 씨. 그만해.”

그녀는 끝이 뾰족한 안경테를 한번 들어 보인 후, 다정에게 말했다.

“세아 씨는 잘못 없어. 세아 씨가 종일 너무 괴로워 보이길래, 내가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본 거야.”

“윤 주임님.”

“들어보니까 세아 씨도 다정 씨 못지않게 그동안 마음고생 많이 했어. 죄책감 때문에 헤어질 생각도 하고 있었대.”

둘의 싸움에 눈치 없이 끼어든 윤 주임의 행동은 다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다정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불난 집에 제대로 부채질을 할 생각인지, 윤 주임은 다정을 폭발시킬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속이 상한 건 알겠지만…… 고작 남자 한 명 때문에 이러는 거 너무하지 않아?”

서러움과 분노가 충돌하며 다정의 눈동자가 크게 떨려왔다.

“윤 주임님!”

그때, 세아가 다정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가 싫다면…… 저 현우 씨 그만 만날게요. 전 남자 때문에 선배랑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세아의 까만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악어의 눈물.

그저 상황을 모면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눈물.

그녀의 눈물이 가증스럽고, 그런 그녀를 여태껏 믿은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띠링. 15층입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원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팀장님. 따뜻한 커피 한잔 뽑아드릴까요?”

“괜찮아요.”

귀에 익은 음성에는 분명 도훈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정은 떨구었던 고개를 다시 올렸다.

꽉 깨문 입술이 벌어지며,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헤어지긴 왜 헤어져.”

다정은 눈을 또렷이 뜨고 세아를 응시했다.

“그동안 나 몰래 만나느라 고생했을 텐데, 천년만년 오래오래 사귀어야지.”

“…….”

“나 이제 너랑 서현우가 사귀든 말든 관심 없어. 더는 나랑 너희 커플이랑 지저분하게 엮이는 일 없게 해줄래?”

다정은 떨리지 않도록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나도 만나는 남자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세아의 미간이 크게 솟구쳤다.

“……?!”

잠시 말을 잃었던 세아가 살짝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 돼요? 선배 최근까지만 해도 현우 씨가 좋다고 했잖아요?”

“…….”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떻게 선배한테 갑자기 애인이 생길 수가 있어요?”

그녀의 한껏 내려다보는 시선이 다정의 가슴을 더욱 울컥하게 만들었다.

다정에게 가까이 다가온 세아가 나직이 말했다.

“선배.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입가에 맺힌 조소를 다정은 똑똑히 보았다.

세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못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그녀에게 바보 취급당하며 지낼 수 없었다.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이 시간부로 끝을 내야 했다.

다정의 다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을 내며 그녀를 응시했다.

“나도 이 남자한테 이렇게 빨리 빠지게 될 줄은 몰랐어.”

다정은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서현우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진 남자거든.”

그녀의 말에 세아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남자가 어딨…….”

“믿지 못하겠으면 보여줄게.”

다정은 그녀를 뒤로한 채,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복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정을 뒤따라 휴게실을 나온 세아. 그녀의 시선이 긴 복도로 향했다.

다정의 앞에는 이제 막 사무실로 들어서려는 팀원들이 있었다.

세아가 눈을 부릅뜨고 팀원들을 살폈다.

‘저 무리 중에 애인이 있다고? 저기서 솔로인 데다가, 서현우보다 나은 사람은…….’

세아의 시선이 어느 사람들 틈에 있어도 눈에 띄는 한 남자에게 꽂혔다.

‘딱 한 명뿐인데…….’

세아가 미간을 깊게 찌푸리는 동안, 어느새 다정은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걸음은 세아가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한 사람 앞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바로 그는 사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이지만, 여직원들이 차마 엄두도 못 내는 팀장 지도훈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세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사이, 도훈 앞에 멈춰 선 다정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자존심은 이미 바닥을 쳤고, 더는 내려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만약 이 남자에게도 내쳐진다면 회사를 관둬야 할지도 모른다.

다정은 부디 오늘 아침 이 남자가 했던 제안이 아직도 유효하기를 기원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녀의 부름에 사원들과 이야기 중이던 도훈이 고개를 돌려 다정을 응시했다.

겨울 바다처럼 고요하고 짙은 검은색 눈동자와 그대로 마주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다정이 말했다.

“저 오늘 저녁에 시간 될 것 같아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사원들이 모두 다정을 바라보았다.

무덤덤하게 서 있던 도훈이 입을 떼었다.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뭡니까?”

“약속이…… 취소됐거든요.”

어깨를 쫙 편 다정이 도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힘 있는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러니까 우리, 데이트해요.”

도훈의 시선이 다정의 떨리는 눈망울로 향했다. 의연한 척 잔뜩 힘을 준 눈망울은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훈이 나긋하게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잘됐네요. 이따 끝나고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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