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째각, 째각, 째각…….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조용한 사무실 안은 시계 초침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사원들은 미어캣처럼 턱을 들어 팀장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정확히 10분 후면 저곳에서 키 큰 남자가 나와 퇴근을 공포할 예정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칼퇴근을 고대하는 마음에 팀장실을 뚫어져라 볼 그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점심시간에 충격적인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여사원 한 명이 팀장에게 데이트하자고 말했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여태껏 팀장을 노리는 사원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워낙 잘난 남자인 데다가 철벽남 이미지가 강해서 모두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남자에게 지극히 조용하고 평범했던 여사원 한 명이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보다 더 쇼킹한 건 바로 팀장의 대답이었다.
‘잘됐네요. 이따 끝나고 보죠.’
사원들은 그의 대답을 똑똑히 듣고서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다정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 겨를도 없이 오후 일과가 시작되었고, 사원들은 오후 내내 문자로 둘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둘이 정말 사귀는 걸까?]
[데이트하자고 했으니까 당연히 사귀는 사이겠지.]
[그래도 어떻게 팀장님이랑 한다정 씨가 사귈 수가 있어? 난 믿을 수가 없어.]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우리 팀장님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한 명이 독식하는 꼴은 못 봐. 엉엉~!]
[퇴근하고 데이트한다고 했잖아. 둘이 정말 사귀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날 오후, 여사원들끼리 따로 만든 대화방은 쏟아지는 대화로 폭주했다.
다정 역시 점심시간 이후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질 때가 많았다.
업무에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우리, 데이트해요.’
자신이 점심시간에 도훈에게 한 말은 지극히 돌발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이었다.
아침만 해도 강경히 제안을 거부했던 여자가 사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데이트를 신청하다니…….
도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난처하고 당황스러울 수 있었다.
그가 ‘나랑 장난합니까?’ 하고 말하며 자신을 노려봐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잘됐네요. 이따 끝나고 보죠.’
너무도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제 말을 받아쳐 줬다.
다정은 종일 사원들이 자신과 팀장실을 번갈아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은 이미 손쓸 수 없이 크게 벌어졌고, 벌린 일에 대한 책임은 져야 했다.
‘이제 팀장님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다정의 입술 사이로 여린 한숨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시곗바늘이 여섯 시를 가리켰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팀장실 문이 열렸다.
달칵.
열리는 문틈 사이로 도훈의 얼굴이 보이자, 사원들은 맞춘 듯이 모두 고개를 내려 서류를 보는 척했다.
깔끔한 네이비 슈트에 검은색 코트를 걸친 도훈이 사무실 가운데에 섰다.
“퇴근 시간이네요.”
그의 굵은 음성이 사무실 천장을 울렸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뵙죠.”
퇴근하라는 말이 떨어졌지만, 쏜살같이 빠져나가던 평소와 달리 사원들은 어정쩡한 포즈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으면서 무언가를 챙기는 척하며 꾸물거렸다.
굼뜬 동작으로 퇴근을 준비하는 그들의 시선은 흘깃 도훈에게 향해 있었다.
점심시간에 이어 그가 어떻게 나올지가 사원들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사원들의 자리를 지나쳤다.
그의 발걸음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다정의 책상 앞에서 멈추었다.
서류파일을 주섬주섬 챙기던 다정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도훈이 말했다.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조금 당황한 다정이 대답했다.
“……이건 자료실에 두고 갈 거예요.”
순간, 도훈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파일 더미를 가져갔다. 다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제가 들게요.”
“얼른 나가죠.”
도훈은 파일 더미를 한 손에 꽉 움켜 들고 말했다.
“점심도 안 먹어서 배고플 거 아니에요.”
“…….”
내가 점심 안 먹은 건 어떻게 알았지?
다정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었다.
아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정은 자신에게 쏠려있는 사원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녀는 재빨리 외투를 입고, 도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도훈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 직전, 다정은 사원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그럼…….”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무실 문을 닫고 떠난 후…….
1,
2,
3.
정확히 3초 후, 사무실 안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들로 가득 찼다.
“꺄악!! 대박!!”
“진짜 사귀나 봐!!”
“애인이 점심 안 먹었다고 걱정하는 거 봤어?”
“나 귀를 의심했어! 팀장님이 저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있다니!!”
사원들은 흥분한 얼굴로 특급 소식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덕분에 사무실은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한다정 씨는 저 냉미남을 어떻게 꼬신 거래?”
“그러게 말이야! 한다정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능력 있네.”
모두가 둘의 이야기로 정신이 없는 가운데, 딱 한 명만이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사원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세아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짓눌러 깨물었다. 앵두처럼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일그러졌다.
세아는 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
도훈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다정.
그는 짙은 회색 차 앞으로 다가섰다. 차는 주인처럼 세련되면서도, 듬직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다정이 눈을 껌뻑였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평생 회사를 다녀도 살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차였다.
다정이 차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차가…… 매우 좋아 보여요.”
“회사에서 준 겁니다.”
“회사에서 줬다고요?”
다정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왜요?”
그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냐는 듯이 도훈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계약 조건에 차와 오피스텔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뭣? 오피스텔까지?
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잘난 사람이었으면, 이 좋은 차를 주면서 스카우트했을까?
새삼 그의 능력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안정적인 회사와 높은 연봉. 자신의 명의로 된 집과 차.
평범한 직장인들은 평생 일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들을 그는 서른한 살이란 젊은 나이에 갖추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이럴 때 보면 딴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그가 대단하기도 하면서, 부럽게도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도훈이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요.”
그의 말에 다정은 주춤했다.
“우리…… 진짜로 같이 저녁 먹어요?”
“그럼 가짜인 줄 알았습니까?”
도훈은 픽, 웃으며 조수석을 향해 고갯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다정은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그와는 제대로 마쳐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그 많은 사원 앞에서 연애를 공개했으니, 논의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와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다정이 조수석에 앉았다. 조수석은 넓고 안락했다.
운전석에 오른 도훈은 시동을 걸었고, 차는 회사에서 점점 멀어졌다.
다정은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늘 팀장실에 앉아있는 모습만 보았지, 운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선은 날렵했고, 차창 밖 야경과 어우러져 더욱 근사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각이 진 넓은 어깨는 조금만 머리를 기울여도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렇게 바로 옆에 앉은 적이 있었나…….
그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몸을 자극했다.
그때, 굵고 낮은 음성이 차 안에 울렸다.
“뭐 좋아해요?”
도훈의 옆모습을 감상하던 다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
“네? 뭘요?”
“음식 말입니다.”
“아, 음식이요. 음……. 저는 딱히 가리는 거 없는데요.”
“스시도 좋아해요?”
“네. 없어서 못 먹죠.”
너무 없어 보이게 말했나?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던 참에 도훈이 픽, 하고 입매를 올렸다.
“다행이네요.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으니, 거기로 가죠.”
왜 저렇게 웃는 걸까.
저 남자가 원래 저렇게 미소를 잘 짓는 사람이었던가.
다정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물었다.
“혹시 그 식당이 송학이라는 곳이에요?”
“맞아요. 알고 있군요.”
그 식당이라면 며칠 전 여사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송학이라는 곳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초밥집이 아니라,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노른자 땅에 들어선 고급 일식집이었다. 연예인들이 자주 가서 매스컴에도 많이 소개된 곳이라고도 했다.
인테리어 비용만 몇 억을 들여 지었다는 곳.
제대로 먹으려면 1인당 20만 원은 깨진다는 곳…….
즉, 그 식당은 다정이 사든, 그가 사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아무리 스시를 좋아한다지만, 20만 원이나 주면서 먹을 만큼 입이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마트에서 파는 개당 천 원짜리 초밥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했던 입이었다.
그리고 돈을 떠나 다정은 지금 밥이 아닌, 다른 게 먹고 싶었다.
그녀는 도훈에게 말했다.
“팀장님. 스시는 다음에 먹기로 하고요. 오늘은 제가 아는 단골집으로 가면 안 될까요?”
“……단골집이 어딘데요?”
“저희 동네에서는 꽤 유명한 가게예요. 아늑하면서도, 음식 종류도 많고 무엇보다 음식이 다 맛있어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도훈은 핸들을 움직여, 차선을 바꿨다.
***
단골 가게 앞에 선 다정은 출입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도훈은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 가게 간판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순자네 주막]
가게는 주택가로 들어가는 골목에 있었다. 색이 바래고 허름해진 인테리어를 보아, 가게를 지은 지 꽤 오래돼 보였다.
‘분명 유명한 가게라고 했는데…….’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도훈을 다정이 불렀다.
“팀장님. 어서 들어오세요.”
다정의 안내에 따라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베이지색 꽃무늬 벽지로 통일된 실내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테이블이 열 개 정도 놓여있었다.
이런 곳에 누가 올까 싶었던 도훈의 예상과 달리, 꽤 많은 손님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풍성한 안주와 술을 함께하며, 대화를 즐겼다. 테이블 사이로 칸막이가 세워져 있어 나름 아늑해 보이기도 했다.
다정은 구석 자리에 제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녀를 따라온 도훈이 말했다.
“여기가 한다정 씨 단골집입니까?”
“네. 가족들이랑 자주 와요. 여기 안주가 정말 맛있거든요. 음식 종류도 많고요.”
다정은 벽에 붙은 파란색 메뉴판을 가리켰다. 메뉴판에는 하얀색 글씨로 큼지막하게 안주 메뉴들이 적혀있었다. 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뉴판을 살폈다.
닭똥집, 꼬막, 꼼장어, 닭도리탕, 김치찌개, 닭발, 제육볶음…….
메뉴는 통일성이 없었고, 다정의 말대로 없는 게 없었다.
“메뉴가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먹어봤는데, 전부 맛있어요. 팀장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글쎄요. 난…….”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도훈은 생소한 메뉴에 인생 최대의 난관에 빠졌다. 특히 닭똥집과 닭발은 정말 먹어도 안전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메뉴 보고 계세요. 전 물 좀 가져올게요.”
다정은 마치 식당 직원처럼 자연스럽게 주방 근처로 걸어갔다. 주방 근처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는 순간, 주방에서 나온 이모와 마주쳤다.
한눈에 봐도 듬직한 풍채를 가진 그녀는 바로 <순자네 주막>의 오너 순자였다.
다정을 본 순자는 살갑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다정이 왔구나. 언니들이랑 같이 왔어?”
“아니요.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어머머!!”
순자는 한쪽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도훈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어디서 저렇게 근사한 애인을 물어왔어?!!”
그녀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도훈과 다정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다정이가 드디어 엄마 소원을 풀게 해주겠네! 장해 죽겠어!! 뭐 하는 남자야? 날은 언제 잡을 건데?”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호들갑을 떠는 그녀 덕분에 다정은 한참 후에야 해명할 수 있었다.
“애인 아니에요.”
“뭐?”
“저희 회사 팀장님이세요.”
그녀의 말에 아쉽다는 듯이 순자가 도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인물이 훤칠하니, 아주 남자답게 잘생겼네.”
도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음흉한 미소로 다정에게 속삭였다.
“다정아. 오늘 이모가 술이 땡길 수밖에 없는 안주로 계속 퍼다 줄 테니까, 너는 저 팀장님이란 남자랑 술 마시는 데 집중해.”
“네?”
순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술잔 오가다 보면 팀장님에서 오빠가 되는 거고, 그러다 보면 여보가 될지 누가 알아~! 오호호호홍.”
그녀의 말에 다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이모도 참.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그런 사이로 만들면 되지!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게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구먼!”
“이모! 다 들리겠어요.”
다정이 당황하며 도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맞은편 가게에도 들릴 만한 저 우렁찬 목소리를 그가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다정은 괜스레 얼굴이 후끈거렸다.
뒤늦게서야 이곳에 그를 데려온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
“크~~!”
다정이 오만상을 지으며,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입 안으로 한 번에 털어 넣은 소주잔은 술 한 방울 남지 않고 깨끗했다.
그녀는 벌써 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다. 그것도 삼십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쉴 틈 없이 소주를 들이켠 덕에 다정의 얼굴은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도훈이 말했다.
“여기 있는 술 다 마실 생각입니까?”
그는 다정이 잡고 있는 세 번째 소주병을 붙잡았다.
“이제 그만 마셔요.”
그의 만류에 다정이 고개를 올려 도훈을 마주보았다.
“오늘만요.”
술에 취한 그녀의 어투는 느릿느릿했고, 눈은 충혈되어 촉촉이 젖어있었다.
“오늘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마실게요.”
“…….”
애틋한 그녀의 눈빛에 도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정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럼 천천히 마셔요.”
“네네……. 그럴게요.”
다정은 그가 따라준 술을 또 한 번 원샷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미간을 좁혔다.
“천천히 마시라니까……. 말 되게 안 듣네.”
“헤헤…….”
다정이 실없이 웃어 보였다. 기가 찬 도훈이 물었다.
“뭐가 재밌어서 웃어요?”
“그냥……. 팀장님이 혼내는 게 웃겨서요.”
“그게 웃기는 일입니까?”
“헤헤. 그러게요.”
다정이 입을 헤, 벌리며 웃었다.
“…….”
그 모습에 도훈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가 난감한 듯 제 턱을 문질렀다. 뺨 언저리엔 붉은 기가 옅게 맴돌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정말 오늘만입니다.”
“……?”
“다른 사람 앞에선 이렇게 많이 마시지 마요.”
단호한 그의 말에 다정이 손을 이마에 가져가, 경례를 해 보였다.
“넵. 알겠슴니다! 팀장님.”
“나참…….”
그녀의 행동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밌는지 도훈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시간이 흘러, 세 번째 소주병이 비었다.
실없이 웃던 다정은 언제부턴가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꺼풀은 느릿느릿 끔뻑였고, 붉게 물든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팀장님.”
다정은 멍하니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도훈을 응시했다.
“왜 안 물어보세요?”
“뭘 말입니까?”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 말이에요.”
그건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급격히 노선을 바꾼 다정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상사인 그로서는 다정의 태도가 충분히 기분 나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살짝 촉촉해진 눈망울을 바라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나에게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결과죠.”
“…….”
자신이 한 말이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덧붙여 말했다.
“보아하니 딱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 않은데,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은 굳이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참 그다운 대답이었다.
무뚝뚝한 건지, 친절한 건지 알 수 없는 대답.
하지만 되레 이것저것 캐묻지 않은 그의 모습이 다정에겐 작은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도훈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떠벌릴 남자는 아니라는 것 또한 느껴졌다.
다정은 소주로 채워진 술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말했다.
“마음을 바꾼 이유는 딱 하나예요.”
술잔을 기울이자, 알코올 향이 입 안에 확 퍼졌다.
쓰디쓴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켠 다정이 입을 열었다.
“분해서요.”
그녀는 빨개질 정도로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꽉 쥔 주먹 위로는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그동안 등신 취급당한 게…… 너무 분해서요.”
다정의 부릅뜬 눈망울이 서러움과 갈망으로 타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격양되었다.
“나도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나도 괜찮은 남자랑 연애할 수 있다는 걸 회사 사람들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현우와 세아. 그 둘 앞에서…….
“아주 보란 듯이 멋지게 연애하고 싶어요.”
도훈은 열기로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빚어진 참담한 열기였다.
다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 상대역을 팀장님이 맡아주셨으면 해요.”
“…….”
“어차피 팀장님도 애인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팀장님한테 애인이 필요한 상황에선 저 역시 최대한 열심히 연기할게요. 오전에 제게 했던 제안이 아직 유효하다면…….”
다정은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실었다.
“우리 오늘부터 연애해봐요.”
도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짙은 눈빛이 오고 갔다.
그때였다.
다정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아……. 이런…….”
그건 바로 눈물이었다.
당황한 다정이 급히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았다.
“죄송해요.”
그녀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젠 정말 별짓을 다 하네요.”
“…….”
“술 먹고 우는 여자 진짜 추하죠? 저도 그런 여자 딱 질색인데…… 그 짓을 내가 하고 있네. 젠장.”
다정은 연신 눈물을 닦았고, 도훈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흑……. 금방 그칠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눈물을 닦고 또 닦았지만,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은 감출 수가 없었다.
다정은 일그러진 눈망울로 도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실은 아까부터…….”
“…….”
“아니 오늘 아침부터 계속 나오려는 걸 참았거든요.”
너무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이었다.
비품실에서 현우와 세아를 목격한 순간부터…….
온종일 아슬아슬하게 고여있었던 눈물.
더는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계속 참아왔던 눈물.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더는 감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다정은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흐흑…….”
지난 2년간…….
현우를 많이 좋아했다.
또한, 세아를 많이 아끼고, 의지했다.
자신이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돌아섰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사실은…… 저 그 사람 정말 많이 좋아했거든요…….”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가 있을까.
늘 나에겐 반짝반짝 빛이 나던 사람이었는데.
바라만 봐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었는데.
이로써 길고 긴 짝사랑은 끝이 났다.
너무도 무참하고 비참하게.
“흑…….”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때 눈앞에 커다란 손이 스윽 나타났다.
남자답게 듬직하고, 마디가 굵은 손.
그 손 위에는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안으로 손수건 무늬가 어렴풋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음성이 귓가를 나지막이 울렸다.
“술 먹고 우는 여자 추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
“그러니 맘껏 울어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말이 가슴을 찌리리 울렸다. 눈물샘이 또 한 번 크게 터졌다.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다정은 그의 앞에서 정말 마음껏 울었다.
***
어둑해진 골목길을 다정과 도훈이 걷고 있다.
서늘한 밤공기가 살짝 떨어져 걷는 둘 사이를 메웠다. 은은한 빛을 뿜는 가로등 아래에서 다정의 걸음이 멈추었다.
“다 왔어요.”
도훈은 그녀의 뒤편으로 보이는 주택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지붕에 외관을 따라 촘촘히 쌓인 적갈색 벽돌이 돋보이는 복층 주택이었다.
도훈이 건물을 살피며 물었다.
“여기가 한다정 씨 집입니까?”
“네. 저희 할아버지가 설계한 집이에요.”
“경량목구조에 외부 마감재로 치장 벽돌을 쓴 형태군요. 따뜻해 보이고 좋네요.”
“네. 외관은 넓어 보여도, 안은 식구가 많아 늘 북적북적해요.”
“심심하지 않아 좋겠어요.”
“어휴. 언니들이랑 만날 싸우는걸요. 식구들 모두 얼른 누구 한 명 빨리 집에서 나가길 원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이 재밌다는 듯이 도훈이 입매를 올렸다.
또다. 또 저렇게…….
시답잖은 말에도 근사하게 지어주는 그의 미소가 다정은 낯설고 불편했다.
그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괜스레 몸 구석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어색한 느낌이 싫어, 다정은 서둘러 그와 떨어졌다.
“집까지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현관 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간 다정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제가 오늘 팀장님께 흉한 꼴이란 꼴은 다 보인 것 같아요. 죄송해요.”
살면서 오늘처럼 잔뜩 취해본 적도 없었고, 오늘처럼 펑펑 울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그간 대화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던 상사 앞에서 모두 보여주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술이 모두 깨고 난 지금,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온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가게에서…… 울었던 모습은 잊어주세요.”
“한 시간 넘게 울어놓고, 어떻게 잊으란 말을 합니까?”
“…….”
“난 성인 여자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봅니다.”
맘껏 울라고 말했던 그도 설마 다정이 한 시간 동안 울 줄은 예상 못 했을 것이다.
부끄러움은 다정의 몫이었다. 그녀의 두 뺨이 다시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내일 출근하려면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럼 전 이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민망한 다정은 급히 인사를 한 후,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였다.
“한다정 씨.”
굵직한 음성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다정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도훈 역시 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난 무슨 일이든 얼렁뚱땅 대충 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 네.”
“한다정 씨와의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 시작한 연애,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 한다정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맞춰줄 거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연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도훈의 진중한 눈빛과 목소리에,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다정도 함께 진지해졌다.
“네. 저도 팀장님에게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할게요.”
도훈이 말했다.
“한다정 씨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됩니까?”
“뭔데요?”
“앞서 말했듯이 연애 기간은 8개월을 지켜줬으면 합니다. 그 이전에 끝을 내는 건 서로에게 불편한 상황을 남길 겁니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감해요. 어차피 8개월 후면 팀장님은 호주로 떠나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헤어졌다고 팀원들에게 말하기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 가지 더.”
“……?”
가로등 아래, 그의 날렵한 얼굴선이 빛을 냈다.
그윽한 눈동자는 달의 조각처럼 찬란하고 눈부셨다.
그의 나직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앞으로 나와 연애하는 동안은…….”
그녀를 응시하는 도훈의 눈빛이 짙어졌다.
“울지 말아요.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