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놓고 사내연애 -2화 (2/32)
  • Chapter. 2

    “!”

    몽롱했던 기분이 확 가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백 상대가 서현우가 아닌 지도훈이라는 것만으로도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는데…….

    뭐?

    대놓고 연애하자고?

    다정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고백 상대를 착각한 자신도 문제였지만, 그 고백을 덥석 오케이한 도훈은 더더욱 문제였다.

    ‘혹시 팀장님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건 아닐까?’

    술에 너무 취해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선뜻 대답했다면 그나마 납득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술에 취한 모습이라기엔 너무 멀쩡해 보였다.

    짙은 검은색 눈동자는 또렷했으며, 멀끔한 낯빛엔 취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 저, 저랑 저, 정말 연애를 하시겠다고요?”

    ‘저’를 몇 번이나 이야기한 것인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다정은 이제 막 두 살이 된 사촌 조카보다 말을 더듬었다.

    도훈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 한다정 씨가 방금 나에게 사귀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뭐가 잘못됐나요?”

    다정은 잘못돼도 아주 많이 잘못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팀장님이 대체 왜 저렇게 나오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고백이 실수였다는 걸 제대로 말해야 해.’

    하지만 막상 그의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니,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기……. 팀장님.”

    말이 또 제멋대로 더듬거려졌다.

    학창시절 호랑이처럼 무서웠던 선생님에게 혼날 때도 이렇게 벌벌 떨진 않았다.

    도훈은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고하고 차가워 보이면서도, 또 동시에 한없이 뜨거워 보이기도 하는 이지적인 눈빛.

    아마도 저 눈빛 때문인 것 같다.

    이 추운 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호랑이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상사여도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방금 팀장님께 한 고백은…….”

    그녀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Rrrrr, Rrrrrrr, Rrrrrrrr-”

    숨 막히는 고요함을 뚫고 어디선가 대단히 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정과 도훈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벨소리는 공원 안에 설치된 작은 놀이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다정의 시야 안으로 놀이터 미끄럼틀에 가려져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남자는 갑자기 울린 핸드폰 벨소리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부랴부랴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에게 들킨 것을 눈치 챈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미끄럼틀에서 걸음을 돌려 다정과 도훈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정의 가슴 한편에서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설마…….’

    어둠 속에 있던 그가 빛이 가득한 다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 다정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오늘 진짜로 고백해야 할 사람이었던 서현우였다.

    ‘말도 안 돼…….’

    현우를 본 순간 다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참혹한 현실을 실제로 마주하고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 벨소리 때문에 들켜버렸네요.”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현우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대화를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이곳에 있다가 대화를 듣고 말았습니다.”

    그의 등장에 다정은 좌절했고, 도훈은 딱히 놀란 기색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현우는 더욱 해맑게 웃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사내에 또 한 커플이 생겼네요. 하하하.”

    “…….”

    “두 분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의 진심 어린 축하에 다정의 눈망울이 일그러졌다.

    안 돼…….

    당신한테만큼은 축하받고 싶지 않다고.

    고백할 대상을 착각한 것도 모자라, 착각한 대상은 한술 더 떠 대놓고 연애하자고 했다.

    거기에 서현우는 해맑게 웃으며 축하를 하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고백이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린 것에 다정이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눈치를 밥 말아먹은 현우가 그녀에 손에 쥐어져 있는 초콜릿 상자를 발견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오호. 다정 씨, 팀장님 주려고 초콜릿까지 만들었나 보네요.”

    아니야. 당신을 위해서였다고.

    ……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현우는 이어 말했다.

    “팀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정성스러운 초콜릿도 받으시고. 예쁘게 사귀시고, 결혼까지 골인하면 더욱 좋겠네요. 하하하.”

    현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못이 되어 다정의 가슴에 박혔다.

    실제로 고백은 못 했지만 이미 차인 기분이었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가슴이 너무 미어져서,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내뱉기 어려웠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 분은 좀 더 이야기 나누고 들어오세요.”

    현우는 마지막까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그렇게 퇴장했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맥없이 바라보는 다정.

    이렇게 끝나버린 고백이라니.

    자신의 결심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지금, 그녀에겐 허탈감밖에 남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쫙 풀리며,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다정이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는 그때 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줄 겁니까?”

    “……?”

    뭘요?

    다정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도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도훈이 고개를 까닥하며 눈짓으로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따라 다정도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리킨 것은 바로 초콜릿 상자였다.

    “아……. 이건…….”

    그녀가 머뭇거리는 순간, 도훈이 손을 스윽 내밀었다.

    다가온 그의 손은 다정이 손에 쥔 초콜릿 상자를 살며시 움켜쥐었다. 초콜릿을 가져가면서 그의 손끝이 자연스레 다정의 손바닥과 마주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주 닿은 살결에 다정은 움찔했다.

    얼음장같이 냉철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손은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도훈은 상자를 손에 든 채 입매를 옅게 올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

    생애 최악의 밸런타인데이를 보내고, 다음 날이 왔다.

    그사이 주말이 꼈다면 마음을 안정시킬 시간이라도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회식 다음 날은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하는 목요일이었다.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한 다정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다.

    사원들이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다정은 고개를 돌려 사무실 한편에 자리 잡은 팀장실을 응시했다.

    ‘팀장님은…… 도착해있겠지?’

    팀장인 도훈은 늘 제일 먼저 출근하곤 했다.

    다정도 부지런한 성격 덕에 회사생활 2년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일찍 왔다고 생각한 날에도 그보다 빠르진 못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진이 오나 늘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다.

    도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무덤덤한 어투와 표정 때문에 차갑다는 소리를 듣긴 하지만, 성실하고 자신이 맡은 일에 관해서는 늘 완벽함을 추구했다. 자기관리가 철저했고, 흠 잡힐 일은 절대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남에게도 기준이 꽤 엄격했다.

    업무에 관해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고, 설렁설렁 대충 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한번은 동기 사원이 미완성된 보고서를 들고 그의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눈물범벅이 되어서 나온 적도 있었다.

    냉철한 상사의 모습이 함께 일하는 사원들에게는 인정이 없고 빡빡하게 느껴졌다.

    사원들은 그를 선망하면서도, 동시에 많이 어려워했다. 다정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가 하는 말은 늘 옳았고,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언행일치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며 사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도저히 까려야 깔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어제 자신에게 연애하자고 했다.

    회사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그에게 여자가 없는 건, 너무도 완벽한 그의 눈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라고.

    그 말에 동감했던 다정이었다.

    완벽만을 추구하는 그가 연애하고 싶다고 느낄 여자라면…….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성품이면 성품,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외모든 능력이든 뭐든지 너무 평범해서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 팀원을 제외한 나머지 회사 사람들은 자신이 이 회사에 다니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내 고백에 응한 걸까?’

    다정은 어제 밤새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오늘 아침 그와 제대로 다시 대면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단단히 꼬여버린 매듭을 다시 풀어야 했다.

    어제는 두 남자가 연달아 준 충격 때문에 경황이 없어 그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만 했다. 더 늦기 전에.

    마음을 다잡은 다정이 결연한 표정으로 팀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팀장실 문 앞에 다가간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문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

    다정은 노크하기 위해 문으로 내민 손을 도로 가져왔다. 막상 그의 얼굴을 마주하려니 내심 두렵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다정은 두 손을 꽉 오므리며 중얼거렸다.

    “어휴. 떨려서 안 되겠어. 그냥 퇴근하고 나서 말할까?”

    결국, 팀장실 문 하나 제대로 두드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때였다.

    “여기서 뭐 합니까?”

    “악!”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중저음에 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뒤에는 이제 막 출근한 것처럼 보이는 도훈이 서있었다. 그는 얼굴이 하얘진 다정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저승사자라도 됩니까?”

    그는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승사자보다 더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게다가 지금 둘 사이는 너무도 가까웠다. 어제보다 더 말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서니, 그와 자신은 키 차이가 제법 났다.

    도훈은 고개를 살짝 낮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매가 가늘어지며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래서인지 더욱 위압감이 느껴졌다.

    사자 밥상 위에 놓인 토끼처럼 다정이 숨을 죽이고 있는 동안, 그가 입을 열었다.

    “일찍 왔네요.”

    “아, 네. 팀장님도 일찍 오셨네요.”

    다정은 그제야 상사인 그에게 고개를 숙여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도훈은 팀장실 문을 열며 말했다.

    “할 얘기가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사무실로 들어와요.”

    덤덤하게 말한 후,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도훈.

    다정은 긴장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팀장실 안은 무채색 계열의 가구들과 꼭 필요한 집기들만 갖추어져 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인테리어가 사무실 주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팀장실 안으로 들어온 도훈은 검은색 싱글 코트를 벗어 길쭉한 스탠드 옷걸이에 걸쳤다.

    코트를 벗자, 슬림하게 빠진 검은색 슈트가 드러나며 다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스타일이 아닌데도, 왠지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팀장님은 슈트가 정말 잘 어울리네…….’

    따지고 보면 수많은 샐러리맨과 별다를 게 없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가 입은 슈트는 패션 잡지의 한 페이지를 차지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모델 일을 한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만큼 그는 남다른 비율을 자랑하는 남자였다.

    ‘생각해보니 팀장님도 늘 짙은 색상의 옷을 입었던 것 같아.’

    내내 현우의 모습만 바라보느라, 도훈이 어떤 옷차림을 즐겨 입고 어떤 습관이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도 현우처럼 롱코트와 짙은 톤의 외투를 즐겨 입었던 것 같다.

    잡티 하나 없이 곱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도훈은 검은색 옷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 하긴, 저 체격에 저 얼굴은 뭘 입어도 멋지겠지만.

    도훈은 사무실 책상으로 가 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은은하게 그를 비추었다.

    마치 그를 비추기 위해 해가 뜨는 것처럼,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햇살과 어우러져 더욱 빛이 났다.

    빛을 머금은 검은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뚝한 콧날과 턱선 아래로 음영이 지며, 날렵한 얼굴선이 돋보였다. 마치 장인이 수십 년간 혼을 담아 만든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예술 영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햇빛보다 더 찬란한 그의 외모를 보며 다정은 생각했다.

    ‘내가 저런 남자한테 고백했구나…….’

    저런 남자에게 고백하려면 맨정신으로는 불가했다.

    모든 걸 다 갖추었고, 한없이 도도해 보일 것 같은 저 남자에게 나와 사귀자고 고백할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다정은 새삼 자신이 어젯밤 얼마나 굉장한 일을 벌였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차, 어느새 책상 위에 서류를 펼쳐놓은 도훈이 입을 열었다.

    “홍콩 리조트 사업 관련 자료 조사는 다 끝났습니까?”

    “아니요. 아직 준비 중입니다.”

    그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럼 보고서는 언제까지 제출할 수 있죠?”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제출하겠습니다.”

    “그래요. 작년 상하이에서 완공된 리조트의 사업기획서와 예산내역을 참조해서 작성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잠시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아. 그리고.”

    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다정의 심장이 쪼그라든다.

    도훈은 서류에서 눈을 떼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저녁에 약속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같이 저녁 먹읍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식사 제안이었다.

    다정이 눈을 한번 껌뻑인 후,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랑 저랑요?”

    “누가 더 끼어야 합니까?”

    “왜 단둘이서 저녁을…….”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

    “데이트하려고요.”

    ‘데이트’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를 보며 다정은 당혹스러웠다.

    데이트라니.

    그건 그와 자신 사이에선 존재할 수 없는 단어였다.

    회의할 때나 보고서를 제출할 때를 빼면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던 그와 어떻게 하루아침에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겠는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다정과 달리 도훈은 차분했다.

    “오늘 다행히 일이 많지 않으니, 퇴근 후에 바로 같이 가죠.”

    그의 말에 다정은 대답을 못 했다. 아니, 안 했다.

    그녀는 말없이 도훈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다정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묵직해졌다.

    “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하라는 듯이 도훈이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왜 저 남자의 눈을 보고 있으면, 이렇게 몸이 굳어버리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주홍빛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어제 회식 때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셨으면 해요.”

    드디어 가슴속의 말을 꺼낸 다정이 숨을 후, 내쉬었다. 도훈이 바로 물었다.

    “이유는?”

    날카로운 그의 눈매에 다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사가 무섭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다정은 반듯한 자세로 그를 마주 본 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어제 팀장님께 한 고백은 실수였습니다.”

    “실수라…….”

    순간 그의 음성이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았다. 다정은 움찔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도훈이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겁니까?”

    “아, 아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팀장님께 그런 장난을 치겠어요.”

    도훈의 표정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좋지 않자, 다정은 다급해졌다.

    자신이 실수할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야 했다.

    “어제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공원 안이 너무 어두웠고, 설마 팀장님이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

    “게다가 제가 요즘 야맹증이 심해져서요. 팀장님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도훈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다정의 둥그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야맹증이 뭔지 아시죠? 어두운 곳에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증상인데, 비타민 A가 부족하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팀장님도 비타민 A가 풍부한 채소랑 과일을 평소에 잘 챙겨 드세요.”

    다급해진 다정의 입에선 저도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를 말들이 흘러나왔다.

    말은 얼마나 빠른지, 쇼미더머니 참가자로 나가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당황스러움에 두 볼이 빨개진 채 열변을 토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도훈.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다정이 말을 멈추었다. 저에게로 향해있는 눈빛은 여름 햇볕처럼 뜨거웠다.

    도훈의 입술에서 나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어쩌죠. 난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 않은데.”

    다정의 몸이 뻣뻣해졌다.

    사뭇 달라진 도훈의 눈동자에서 그가 지금 진지하다는 것을 읽었다.

    “…….”

    그녀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 저와 정말 연애라도 하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대답도 빠르다.

    생각하고 대답을 하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정은 어제부터 제 물음마다 오케이를 외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다정이 재차 물었다.

    “왜 저와 연애를 하고 싶은 건데요?”

    혹시 절…… 좋아하세요?

    한마디 더 붙이려다가, 그 말은 너무 오버인 것 같아서 뒷말은 꾹 삼켰다.

    조금은 저돌적일 수도 있는 질문인데도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정이 말했다.

    “사실 팀장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도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팀장님이 무슨 생각으로 제 고백을 받아들였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

    “저야 착각으로 빚어진 실수였지만, 팀장님은 야맹증도 없으시고, 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지도 않으셨잖아요. 팀장님은 왜 제 고백을 받아들인 건가요?”

    그의 짙은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에게로 향해있었다. 한없이 깊고,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다정이 숨을 죽였다.

    잠깐 정적이 흐른 후, 마침내 묵묵히 닫혀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살짝 시선을 내린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부문장님께서 자꾸 부문장님 딸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어요. 괜찮다고 몇 번을 거절했지만, 부문장님은 제 말에 개의치 않고 딱 한 번만 만나보라고 계속 고집을 부리셨죠.”

    “…….”

    “사실 상사의 가족을 소개받는 건 내키지 않아서, 그런 제안이 있을 때마다 계속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난처한 상황이었어요.”

    도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정은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문장은 부담 없이 만나보라고 조르지만, 그에게는 상사의 딸을 소개받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곤혹이었을 것이다. 부문장의 뜻대로 만남을 가졌다가,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욱 난처해질 테고 말이다.

    그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부문장님은 애인을 데려와 눈앞에 바로 보여주지 않는 이상, 절대 포기하실 분이 아닙니다. 점입가경으로 최근에는 전무님도 사촌 조카와 맞선을 보라고 제안하셨고요.”

    전무님까지?

    얼굴에 깊은 그늘이 진 도훈을 바라보며 다정은 처음으로 그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잘난 것도 좋지만은 않구나…….

    “없는 애인을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애인을 어디서 갑자기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던 참이었죠.”

    그는 살짝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다정을 직시했다.

    “그러던 중, 한다정 씨가 내게 고백을 한 겁니다.”

    “…….”

    다정의 눈꺼풀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게 흔들렸다.

    “아……. 그래서 제 고백을…….”

    그녀는 뒷말을 삼키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팀장님은 단지 애인이 필요했던 거구나.

    맞선 제안을 거절할 방어막이자,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애인.

    그렇다는 말은…….

    어젯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고백했어도 그는 수락했을 거라는 뜻과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다정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사정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팀장님과 연애를 할 수는 없어요.”

    “…….”

    “역시 어젯밤 일은 없었던 거로…….”

    “서현우 씨 때문입니까?”

    서현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야기하던 다정의 입술이 즉각 멈췄다.

    그녀는 크게 동그래진 눈으로 도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다정의 눈빛을 읽은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날 다른 사람과 착각해서 고백했다고 말했잖아요.”

    “…….”

    “우리 팀 안에서 착각할 사람이라면 나와 나이와 체격이 비슷하고, 마침 어제 비슷한 옷차림을 했던 서현우 씨밖에 없지 않습니까?”

    똑똑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눈치까지 이렇게 빠른 사람인지는 몰랐다.

    명탐정 코난 뺨치는 그의 추리에 다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2년간 비밀스럽게 숨겨왔던 내 짝사랑이 이렇게 쉽게 탄로 날 줄이야.

    그의 날렵한 눈매가 다정에게 향했다.

    “내가 보기에 어젯밤 서현우 씨는 우리의 연애를 진심으로 축복해주는 걸로 보이던데…….”

    “…….”

    “그런데도 서현우 씨한테 미련이 남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지적은 다정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지만,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정은 어젯밤 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립니다.’

    ‘예쁘게 사귀시고, 결혼까지 골인하면 더욱 좋겠네요. 하하하.’

    그렇게 심한 말을……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내뱉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관심이 1프로도 없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제삼자의 입으로 똑똑히 듣게 되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다정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훈은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한다정 씨.”

    사무실 안을 울리는 굵은 음성에 다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층 더 깊어진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8개월 후에 다시 호주로 돌아갈 겁니다.”

    뜻밖의 소식에 다정의 둥그런 눈썹이 쓱 올라갔다.

    “……왜요?”

    “이전에 근무했던 회사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라, 고심 끝에 가기로 결정 내렸어요.”

    “아……. 그렇군요.”

    그가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서 내겐 이곳에서의 시간이 8개월밖에 남지 않았고.”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읊조리는 음성.

    그 순간만큼은 그의 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 다정은 자신도 모르게 처연해졌다.

    도훈이 고개를 올려 그녀를 응시했다.

    “어차피 서현우 씨와도 잘될 확률이 낮고, 특별히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

    “나랑 연애해봅시다. 한다정 씨.”

    그의 눈빛은 뜨거웠고,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밤하늘처럼 짙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다정의 눈망울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약간의 망설임을 느낀 도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8개월이라 부담스러운 기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다른 이성에게 마음이 생긴다거나, 더는 애인 노릇이 하기 싫어지면 언제든 관두어도 좋습니다.”

    “…….”

    “하지만 웬만하면 8개월은 채워줬으면 좋겠군요. 너무 빨리 헤어져도 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을 테고, 8개월 후 사원들에게 내가 외국에 가면서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고 이유를 대기도 좋을 테니까요.”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와 설득력 있는 어투.

    그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도 한다정 씨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죠.”

    “…….”

    “내 능력에 한해서 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뜨거운 눈빛은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정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새삼 그는 남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젊은 나이에 성공할 수 있었겠지. 회사생활은 결국 사람과 사람을 대하는 일이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은 충분히 줄게요.”

    다정은 잠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의 뛰어난 언술과 호소력 짙은 눈빛에 다정은 저가 마음이 조금만 약했어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자신은 마음이 여리지만, 물러터진 사람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박쥐처럼 쉽게 마음을 돌리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상사의 말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넙죽이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니요. 생각할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그녀의 올곧은 눈빛이 도훈에게 향했다.

    “대답은 지금 바로 할게요.”

    그녀는 최대한 정중하면서도 강한 어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 팀장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다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 차분한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첫째로 서현우 씨와 잘될 확률이 적다고 해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진 않습니다. 설사 서현우 씨가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그 사람을 좋아했던 마음까지 없었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서현우 씨 마음에 제가 찰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꽤 오랫동안 지켜본 남자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겁니다.”

    “…….”

    “둘째로 저는 팀장님께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서현우 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해도 이 거래는 성립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담담하게 내뱉는 다정의 말은 뭐 하나 틀린 이야기가 없었기에, 도훈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끝까지 담담했고, 확고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진짜 연애가 아닌 보여주기식일지라도요.”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연애할 수 없다.

    너무도 확고한 마지막 이유는 도훈의 당당하게 뻗은 고개를 힘없이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도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한다정 씨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도훈은 말했다.

    “한다정 씨 뜻대로 어제 일은 없었던 거로 하죠.”

    그의 대답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너무도 깔끔해서 다정이 살짝 얼떨떨해질 만큼.

    그래도 자신의 실수를 별 탈 없이 눈감아주고, 자신의 생각을 흔쾌히 이해해준 그에게 다정은 감사함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어제 같은 실수는 다시는 없을 겁니다.”

    다정의 말에 그가 피식, 옅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입술 끝은 올라갔는데, 왜 가라앉은 눈매는 저토록 씁쓸해 보이는 걸까.

    다정은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

    “팀장님 정도면 제가 아니어도 제안을 받아줄 여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문장님 일은 모쪼록 잘 해결하시길 바랄게요.”

    “…….”

    기운 내라고 한 말인데 왜 그의 눈가가 더욱 내려앉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상황상 긴말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을 눈치챈 다정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늘 팀장님께 들은 이야기는 저 혼자만 알고 있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꾸벅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다정은 빠르게 걸음을 돌렸다.

    팀장실 문까지 가는 거리가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팀장실을 나온 다정.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긴 숨이 쏟아졌다.

    “하……!”

    드디어 해냈다.

    저 냉철하고 무시무시한 상사를 상대로 어제의 실수를 말끔하게 해결했다.

    다정은 떨지 않고 똑 부러지게 생각을 전한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너무 순조롭게 일이 해결된 것에 떨떠름하기도 했다.

    ‘한다정 씨 뜻대로 어제 일은 없었던 거로 하죠.’

    아니, 말은 그렇게 해놓고 후폭풍이 닥칠까 봐 내심 두렵기도 했다.

    나 이번 일로 완전히 찍혔을지도 몰라.

    다정은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누굴 탓하리오.

    상사에게 느닷없이 고백한 사람도 자신이고, 사건의 시작을 벌인 사람도 결국 자신인 것을.

    “이 정도로 끝난 것에 만족하자. 팀장님 성격상 뒤끝 있을 것 같진 않아.”

    원래 일하는 스타일도 깔끔하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사람이니까.

    더는 이 일로 왈가왈부하지는 않을 거야.

    다정은 문득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8개월 후에 다시 호주로 돌아갈 겁니다.’

    8개월 후면…… 떠나는구나.

    차라리 잘됐지.

    팀장님과는 이번 일로 조금 어색해질지도 모르는데, 최대한 빨리 떨어지는 게 낫잖아.

    다정은 닫힌 팀장실 문을 한번 바라본 뒤,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

    사무실 안은 어느새 출근한 사원들로 북적였다. 이제 막 도착한 듯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고, 아직 주인이 없는 빈자리도 있었다.

    다정은 흘깃 사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평소와 같았다.

    그 누구도 다정에게 도훈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건 현우가 어제의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뜻과 같았다.

    다정의 눈길이 재빠르게 현우의 자리로 갔다. 현우의 의자에는 그가 즐겨 입는 진회색 코트만이 걸쳐져있었다.

    그녀는 현우의 옆자리에 앉은 사원에게 물었다.

    “혹시 서현우 씨 어디 갔는지 아세요?”

    “아까 비품실에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정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긴 복도 끝에 있는 비품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간에, 어제의 일을 그대로 오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 해명하고, 자신의 마음을 뒤늦게라도 고백하고 싶었다.

    물론 어제의 모습을 보아선 그가 받아줄 확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을까.

    아주 조금은 날 여자로 보고 있지 않을까.

    대화를 좀 더 나누다 보면 마음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다정은 비품실 문 앞에 섰다.

    가슴이 고장 난 것처럼 진동했다.

    비로소 제대로 된 고백을 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다정은 떨리는 마음으로 비품실 문을 열었다.

    크고 복잡한 창고 안으로 들어간 다정은 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창고 맨 구석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난 그쪽으로 다정이 천천히 다가갔다.

    두근두근…….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뗄 때마다 심장이 요동쳤다.

    창고 구석 코너를 돌자, 그녀의 시야에 현우의 뒷모습이 서서히 들어왔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

    햇빛을 받으면 밝은 갈색처럼 보여 그의 인상을 더욱 따스하게 했다.

    그 아래, 넓고 남자다운 어깨.

    그 강인해 보이는 어깨는 다정이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아래…….

    “……!”

    코너를 돌아 그에게 다가가려던 다정이 우뚝 멈춰 섰다.

    다정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현우의 넓은 등과 허리에는 가녀린 여자의 손이 둘려있었다.

    그를 어루만지는 여자의 손길은 매우 다정다감했고, 끈적끈적하기까지 했다.

    그의 어깨에 묻혀있던 여자의 얼굴이 들리며, 다정의 시야에 들어왔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릿결에 뽀얀 얼굴.

    새까맣고 긴 속눈썹과 오뚝하게 솟은 콧날.

    그리고 립스틱이 번진 붉은 입술…….

    다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현우에게 안겨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민세아.

    그녀는 다정의 대학 후배이자 입사 동기였고,

    다정이 현우를 좋아하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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