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74/96)

<외전 1화>

“일어났어?”

아침 햇살보다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기지개를 켜며 침실 밖으로 걸어 나오던 아연이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가를 비볐다. 부엌을 가득 메우듯 선 성현이 그녀를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리 와.”

홀짝거리던 커피잔을 달칵 내려놓은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기다란 눈매엔 설렘과 애정, 온기가 꿀처럼 넘실거렸다. 그 달짝지근하고 따스한 미소에 언제나처럼 가슴 언저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함께 아침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아연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지나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난달 아연은 성현으로부터 기겁할 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함께 프러포즈를 받았다. 결혼을 약속한 직후, 성현은 아연에게 제집에 들어와 같이 살자며 갖은 유혹을 부렸다. 태송현 식구들에게 통보하듯 결혼 소식을 알리고 결혼식 날짜를 조율하는 기간마저도 기다리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네가 날 버리고 혼자 집에 가 버리면 밤새 이 침대에서 얼마나 외롭고 서운한지 알아? 네 남편 속상하게 만들지 마, 아연아.’

‘누가 벌써 내 남편이야…….’

‘권성현이가 네 남편이지. 약속했잖아. 나랑 결혼해 주는 걸로.’

그는 의도적으로 눈꼬리를 추욱 내리고 커다란 덩치를 기술 좋게 웅크려서 불쌍한 척을 하며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뿐이랴.

아연에게 자신의 아양이 통하지 않는다 싶을 때는 기가 막히도록 음험한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다가 기절해서 못 일어나게 해 줄까. 그렇게 해야 이 침대에서 자고 가는 거야? 네 취향이 그런 거라면 별로 어렵진 않은데.’

‘하. 어이없어. 내 취향이 언제부터…….’

‘아니면, 집에 다른 남자 새끼라도 숨겨 놓은 거야? 그래서 그래?’

급기야는 있지도 않은 존재를 향한 투기로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희번덕거리기까지.

그러더니 어느샌가 그는 은근슬쩍 작전을 변경했다. 본인이 직접 아연의 집에 둥지를 트는 것으로.

퇴근길에 네 생각이 나서 사 왔다면서,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폴폴 풍기는 쇼핑백을 내밀며 눈부시게 미소 짓는 성현을 그냥 돌려보내기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정한 낯짝 아래 그가 어떤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지나치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 아연은 그저 순순히 현관문을 활짝 열어 주고 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요망하고 교활한 짐승에게 홀딱 홀린 기분이었다.

성현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몹시 자연스럽게 아연의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밤새 만족스러운 낯으로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자는 동안에도 아연과 이어져 있기를 원했다.

아연이 무심결에 몸을 꿈틀거리며 그의 품을 빠져나가려는 기색이라도 느껴질라치면 커다란 손이 줄기처럼 얽혀 들었다. 어림도 없다는 양 아랫배를 바투 당겨 두 사람의 맞물린 하체를 더 깊숙이 결합시켰다.

내벽을 압박하는 묵직한 감각에 아연이 울상을 지으면 따뜻한 입술이 쉴 새 없이 지분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광대에서부터 귓가, 목선으로 이어지는 목덜미까지.

‘아연이 네가 순진해서 잘 모르나 본데, 다른 사람들도 원래 다 이러고 자. 그러니까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연자약한 목소리.

정말 누굴 바보로 아는 건지.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럴듯한 거짓부렁을 속삭일 수 있는지. 아주 대단한 연기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지 않으면 여지없이 휘말리고 말 정도로.

그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겪는 곤란함은 비단 침대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연은 아침부터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어색한 시선을 슬그머니 옮겼다. 그림 같은 자태로 서 있는 성현은, 천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완벽한 나체였다.

제멋대로 남의 집에 똬리를 튼 주제에 그는 제집인 양 옷을 벗어젖히고 자유로이 활보하는 데 어떠한 수줍음도 없었다. 부끄러움은 오로지 아연의 몫일 뿐.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경주마를 연상케 하는 단단한 허벅지와 늘씬한 허리, 단단하게 뻗은 등줄기까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맞닥뜨리기엔 지나치게 유혹적인 광경이었다.

아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작게 헛기침을 뱉었다. 지난밤 연신 신음을 흘리다가 잠드는 바람에 깊게 잠긴 목을 가다듬으려는 시도였다. 그런 그녀의 기척을 읽은 성현이 낮게 키득거렸다.

“더 가까이 와.”

명령조의 말에 아연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아연이 제 사정거리에 들기 무섭게 그가 낚아채듯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제게 끌어당겼다.

“좋은 아침.”

감미로운 속삭임이 귓불을 달구었다. 기분 좋은 살 내음이 콧속으로 훅 끼쳐 들었다. 머리카락에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아연은 그의 단단한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으응.”

어리광부리듯 말꼬리를 길게 늘인 대답에 성현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다는 듯이 아연의 정수리에 짧은 키스를 퍼부은 그가 느긋하게 팔을 뻗었다.

냄비 안을 스윽 휘젓는 손길이 퍽 익숙해 보인다. 아연은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냄비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야?”

“수프.”

“아아, 어제 사 왔다는 거구나.”

어젯밤 퇴근길 성현의 손에는 어김없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쇼핑백 겉면에 그려진 것은 치즈가 쭈욱 늘어나고 있는 단호박 수프. 며칠 전 집에서 함께 뒹굴뒹굴하며 노닥거릴 때, 배경처럼 틀어 놓았던 티브이 화면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바로 그것이었다.

‘맛있겠다…….’

먹음직스러운 수프가 보글보글 끓는 장면에 아연은 저도 모르게 식욕이 동해 흘리듯 중얼거렸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성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깊숙이 처박고 있느라 바빴으니까.

하던 일에 몹시 열중한 탓에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 따윈 듣지 못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성현은 당시 화면 속에 등장했던 바로 그 가게의 단호박 수프를 사 온 것이다.

‘앗. 나 이거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그러게. 어떻게 알았을까.’

아연의 말에 성현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당겨 안고 짧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날 분명 아연의 아래를 헤집어대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서는 혀를 놀리기 바빴던 사람이 대체 어느 틈에 티브이 속 화면을 확인해 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그 가게는 최근 여기저기 전파를 타면서 인기가 높아진 것으로 유명했다. 예약도 받지 않고 몇 시간씩 기다려서야 겨우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아연도 직접 사 먹으려던 걸 깔끔하게 포기한 참이었다.

돈만 낸다고 해서 곧바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그것을 어떻게 구해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불쑥 치솟았다. 그가 직접 가게에 줄을 서서 기다렸을 리는 만무하고.

아연은 문득 김 실장의 피로에 젖은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작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서 부쩍 낯빛이 어두워지신 것 같던데…….

하여간 성현은 그녀가 무심코 뱉는 그 어떤 시답잖은 말도 허투루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세심하고 섬세한 배려에서 그가 제게 퍼붓는 마음의 무게가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무게가.

그리고 그 사랑은 늘 그녀를 들뜨게 했다.

아연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한가로이 냄비 안을 휘젓는 성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가슴 언저리까지 더운 숨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아연은 숨을 색색 내쉬며 성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런 그녀를 흘끗 내려다본 성현이 다정하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한 그릇 다 먹어야 놓아줄 거야.”

“뭐야, 엄마도 아니고…….”

성현은 꼭 출근 전 아연에게 따뜻한 음식을 먹여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이 귀찮게 굴었다. 아연이 한 그릇을 든든히 비우면 세상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정작 저는 커피 따위나 홀짝거리는 것으로 대충 때우면서.

저 커다란 덩치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할 사람이 대체 누군데.

아연은 눈을 들어 성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헐벗은 몸으로 느른하게 서서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수프만큼이나 배 속이 와르르 끓어올랐다. 그의 넓디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두꺼운 몸통을 으스러지도록 부둥켜안고 싶었다.

왈칵 치솟는 충동을 간신히 내리누른 아연은 손을 뻗어 선반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부엌에서는 뭐라도 좀 걸치라니까 계속……. 불 앞에 이러고 서 있다가 뜨거운 거 튀면 어떡하려고.”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내긴 했지만, 그녀의 입술 끝에 짓궂은 장난기가 스쳤다. 아연은 성현의 벌거벗은 몸 위에 앞치마를 걸쳐 주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가 훤히 보인다는 듯 성현은 잠자코 제 몸을 내주었다. 아연이 그의 목에 앞치마를 걸어 주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여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뒤꿈치를 살짝 들어 성현의 목에 앞치마를 건 아연은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레이스로 장식된 앞치마 끈을 리본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묶었다.

끈을 묶는 동안에도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에서 도무지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연의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그 탓에 성현의 얼굴에 피어오른 질 나쁜 미소를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다.

“어디 봐 봐.”

균형 잡힌 리본을 완성한 아연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성현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입매를 꾹 내리눌러 웃음을 겨우 참으며 성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성난 근육이 잔뜩 붙은 조각 같은 몸 위에 앞치마만 덜렁 걸친 권성현의 모습이란.

아연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처럼 씰룩거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양 볼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우스꽝스러우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야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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