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6화>
아연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옮겨 어린 아연에게 뽀뽀를 당하고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질색하는 표정이 어찌나 깜찍한지, 거짓말로라도 귀엽지 않다는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귀엽긴 하네, 이때는.”
아연은 뒤늦게 한정하는 말을 덧붙였다. 성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지금은 귀엽지 않다는 말로 들리네.”
“귀엽다고 보긴 어렵지. 덩치는 지나치게 커다래서, 맨날 입만 열면 야한 말만 해 대는데 귀여울 리가.”
그 순간 성현이 아연의 어깨를 잡고 빙글 돌렸다.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묘하게 빛나는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가득 들어찼다. 입술을 붙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성현이 느른하게 속삭였다.
“이래도?”
이래도 권성현이 안 귀여워?
장난기가 스민 낮은 속삭임에 가슴 언저리부터 산들바람이 살랑거렸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아연이 입술 끝을 깨물었다. 성현은 고개를 아래에서 위로 당겨 올리며 아연의 입술을 머금었다.
맞붙는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이 귀여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빠듯하게 차오르는 마음에 가슴이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쪼는 듯한 키스를 쏟아붓던 성현이 콧등을 맞댄 채로 나직하게 물었다.
“아연아. 우리 나쁜 짓 할래?”
간접 조명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빛나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소년 같은 장난기가 일렁였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입술을 쪽쪽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자, 성현이 아연의 팔을 당겨 테라스로 이끌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니 정원에 켜진 주황색 조명이 발아래까지 길게 새어 들어왔다. 테라스 한편에 놓인 둥근 테이블 위에는 나무로 된 시가 박스가 놓여 있었다.
아연은 손가락을 들어 시가 박스를 가리키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저거 하자고……?”
“아니. 그거 말고.”
그거보다 더 재미있는 나쁜 짓이 있어. 야릇한 음성에 귓등이 화끈거렸다.
어깨가 붙잡혀 돌려세워지는 것과 동시에 단단한 테라스의 난간이 등에 툭 하고 닿는 게 느껴졌다. 성현은 아연을 가두듯이 양옆의 난간을 잡고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들었다.
태송현의 푸른 나뭇잎을 스치고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콧등을 스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냄새, 온기, 숨소리가 아연을 흠뻑 적셨다.
숨을 크게 들이쉬다 멈추는 순간, 입술이 빠듯하게 겹쳐졌다.
아아.
고작 키스만으로, 어쩌면 매번 이렇게 정신이 아득해질 수 있는 건지.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 발끝을 간질였다. 아연은 어느새 발꿈치를 들어 올려 성현의 목을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지분거리는 것처럼 시작된 키스가 깊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입술을 뭉그러뜨리고 비비며 짓이기는 마찰에 불꽃 같은 열기가 어른어른 퍼졌다. 녹신하게 녹아 버린 몸을 능숙하게 받친 성현이 커다란 손으로 아연의 등허리를 훑어 내렸다. 아랫배가 뭉근하게 뭉치며 저절로 허벅지가 오므라들었다.
아연은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녀가 도망가는 대로 성현이 쫓아와 입술을 기울였다. 몇 번이고 쫓고 쫓기는 키스가 반복되고, 끝내 아연이 성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여기서는…….”
아연의 정수리에 입술을 붙인 채 성현이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귓등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도 그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는 듯했다.
성현은 한 치의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아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고백을 왈칵 쏟아 냈다.
“아연아. 결혼하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연은 깜짝 놀라 그의 단단한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집에 가면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밤에 헤어지는 것도 싫고, 네가 아침에 눈뜰 때 가장 처음 보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밤새 널 끌어안고 자는 밤이 평생이었으면 좋겠어.”
어스름한 달빛이 스며든 아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성현은 아연의 말간 뺨을 엄지로 덧그리듯 천천히 쓸었다. 애끓는 손끝이 뺨을, 여린 눈매를, 관자놀이를 정신없이 더듬었다.
“내가 욕심이 끝이 없는 놈이라 그래. 너랑 같이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너의 더 많은 것이 되길 원해.”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는 눈을 빤히 응시하며 그가 말했다.
“내 모든 걸 네가 남김없이 가졌으면 좋겠어.”
성현은 슈트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아연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주머니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 두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정원에서 흘러 들어온 연한 불빛만으로도 투명한 광채가 반지 주변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결혼하자. 결혼해 줘, 아연아.”
아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차가운 난간에 가로막혀 꼼짝할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염없이 떨리는 눈을 들었다. 입술이 풀이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아연의 주저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성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물려주신 거야. 할머니가 직접 스위스로 가서 꽤 어렵게 구하셨던 거라,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대대로 물려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어. 아까 어머니한테 내놓으라고 해서 받아 온 건데…….”
어머니한테서 반지를 강탈해 왔다는 말을 뻔뻔스럽게도 지껄이는 주제에, 아연의 낯빛을 살피는 눈은 퍽 조심스러웠다.
“마음에 안 들면 새걸로 사줄게. 아무리 좋은 다이아몬드라도 어쨌든 쓰던 거니까, 새것만 못하긴 하지.”
아연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반지가 싫은 게 아니라…….”
“반지가 싫은 게 아니면.”
설마 내가 싫다는 거야? 차마 그 말만큼은 묻지 못하겠는지 그가 말끝을 흐렸다.
아연을 내려다보는 눈에 순식간에 엄청난 원한이 들어찼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안에 서운함과 애틋함, 긴장과 기대, 설렘 같은 서로 섞일 것 같지 않은 정반대의 감정들이 격정적으로 뒤엉켰다.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 늘 이렇게 온몸으로 부딪혀 오는 네가.
성현은 자신을 든든하게 감싸는 커다란 산 같았다.
언제나 산들산들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는. 생채기가 난 마음에 건강한 햇빛을 쬐어 주고, 따뜻하게 품었던 온기를 나누어 주는 산.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웃을 수 있었다.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연은 울 듯한 얼굴로 웃으며 제게 빛이 되어 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힌트라도 주지 그랬어. 난 아무것도……,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너한테 무슨 준비가 필요해. 그런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싫다는 소리만 하지 마. 심장 떨어질 것 같으니까.”
고작 그런 걸로 망설였냐는 듯 잘생긴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서렸다.
성현은 아연의 왼손을 가만히 끌어당겨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새벽녘 깊은 산골짜기의 맑은 시냇물처럼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가 아연의 손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반지가 손가락에서 빙글 돌아갔다.
“아무래도 새거 사야겠다. 넌 손가락이 너무 얇으니까, 아기처럼 연약해서 쳐다만 봐도 부러져 버릴까 봐 겁나.”
아무렴 다이아몬드의 무게 때문에 손가락이 부러질까.
아무리 과보호를 밥 먹듯 일삼는 성현이라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인 것처럼.
“미쳤나 봐, 정말…….”
“네 남편, 너한테 돌아 버린 지 오래라고 몇 번을 말해. 이제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어?”
“누가 벌써 내 남편이야.”
아연이 어이없다는 듯이 새침하게 그의 어깨를 때렸다. 성현이 키득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간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 지금 섰는데.”
아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얼른 가라앉혀!”
지금껏 저와 입술을 붙이고 잘만 쪽쪽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뻔뻔한 데다 요망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성현은 그런 아연이 도망가지 못하게 더 꽉 끌어안고 말했다.
“내가 네 남편이라잖아. 그 소리를 듣고도 발기 안 하고 버티면, 그게 사람이야? 고자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세우는 것도 사람 아니야. 짐승이지.”
“그래. 넌 지금 그 짐승이랑 결혼하겠다고 했고.”
성현은 뿌듯한 얼굴로 아연의 손가락에 족쇄처럼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아연의 예쁜 발목에 진짜 족쇄를 채워서 저와 연결해 놓고 한 발자국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쳐 돌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 가늘고 흰 발목에는 진짜 족쇄도 꽤 잘 어울렸을 테지만…….
“이제 못 물러. 담보도 이미 네 손에 끼워져 있으니까.”
태송현의 건물 한 채 값에 버금가는 1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한낱 담보로 치부해 버린 성현은 애끓는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되어 줄 여자의 손에 숭배하듯 입을 맞추었다.
아연은 평생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술을 부딪치는 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결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붉은 입술과 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 놓은 듯한 높은 콧대, 남자답게 뻗은 모양 좋은 눈썹과 매끄러운 이마까지.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물러 줄 생각 없는데 어떡하지.”
아연의 말에 성현이 서늘한 눈을 치켜떴다. 오묘하게 빛나는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꽉 조여드는 아찔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숨이 멈추었다.
덤벼드는 맹수처럼 그가 입술을 겹쳤다. 아연은 기꺼이 자신을 내주며 성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빈틈없이 섞이는 숨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지는 순간.
기울어진 새하얀 달빛이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굶주린 짐승을 건드리지 말 것>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