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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9)화 (39/75)

49화

헉.

그동안 기현태에 대해 세워 놓았던 여러 가지 가설 중 한 가지는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와~ 인성!

“생각은 속으로 하라니까.”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으며 현태가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헙!”

희우가 입을 다급하게 손으로 틀어막으며 현태를 곁눈질로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굴을 봐도 그의 기분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회색 현관문 앞에 놓인 상자는 시리도록 새파랬다.

소매가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옆을 보니 희우가 자신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있어.”

현태는 얼어붙은 희우를 잠시 세워두고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새파랗게 포장된 박스에는 네모반듯한 글씨체로 ‘말랑이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보낸 사람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희우는 박스 가까이에 차마 다가오지도 못하고 포장지만큼이나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지이이이이익-

포장을 벗겨 내는 현태의 손길이 거칠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쓰레기통으로 처박아 버리고 싶었지만 상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안을 뒤져 봐야 했다.

상자 안에서 나온 건 분홍색 캔버스화였다. 희우가 경주에서 신던 것과 무척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시발.”

희우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남자의 존재에 현태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지난번처럼 작은 엽서가 담긴 봉투도 함께였다. 현태는 신경질적으로 봉투 안에서 엽서를 꺼내 읽었다.

-네가 즐겨 신던 캔버스화랑 비슷한 디자인을 발견했어. 원래는 더 일찍 주려고 했는데 귀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늦게 주게 됐네. 너에게 잘 어울릴 거야. 네가 이 신발을 신고 나에게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서 잠이 안 와.

희우야. 비록 지금은 잘못된 선택으로 그곳에 있지만 곧 네가 나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너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우리 너무 좋았잖아. 응? 사랑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현태의 눈매가 사납게 구겨졌다. 오래전에 끝난 사이라고 해도 아내의 전 남친에게서 온 편지가 달가울 리가 없었다.

내가 가져 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꼴이었다. 현태는 망가뜨리는 한이 있어도 억지로 빼앗겨 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들어가지.”

현태가 쥐고 있던 편지를 구긴 채 현관문을 열었다.

희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얼른 열린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현태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육중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복도 끝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그림자가 닫힌 현관문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걸 왜 가지고 들어와요?”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던 희우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현태의 손엔 조금 전 그 상자와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증거니까.”

희우는 그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 상자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현태는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변호사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건…….”

희우는 귀를 쫑긋 세웠지만 현태가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발 벗고 나서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남후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러니까 네가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여자가 오죽 흘리고 다녔으면 그런 꼴을 당해!

“크림수프 어때.”

지나간 기억에 치를 떨고 있는데 현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희우가 소화를 잘 못 시킬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아니요. 기운을 내야 해서 고기를 먹어야겠어요. 냉장고에 소고기 사 놓은 거 있는데 그거 먹으려고요. 혹시 같이 먹을래요? 아, 회사 들어가야 해서 안 되는구나.”

희우가 씩씩하게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며 말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지?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에 불쾌해져야 정상이었다. 원래는 희우만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가 업무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태는 희우에게서 고기를 받아 들었다.

“내가 굽지.”

왜 이걸 받고 있지?

“고기 먹고 갈래요?”

번뇌로 가득한 현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희우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심 현태가 집에 있어 주길 바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날처럼 당장에라도 현관문을 열고 그가 들어올 것 같았다. 다시는 그날과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성의 없는 자신의 대답에 방긋 웃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생각했다.

다른 새끼와 공유하고 싶지 않다고.

치이이이익-

프라이팬 위에서 고기가 맛있게 익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현태는 말없이 식사 준비를 도왔다.

현태가 고기를 굽는 동안 희우는 샐러드를 준비했다.

저녁상은 금세 차려졌다. 그럴듯한 접시에 담으니 일류 레스토랑 못지않았다.

희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을 때였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고 있어.”

현태가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나 때문에요?”

“여기는 위험하니까. 내가 늦는 날도 많을 거고.”

“고마워요.”

희우가 진심으로 말했다.

꽃바구니를 집으로 보낸 사람이 김남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집이 예전처럼 편하지 않았다. 문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됐고, 집에 들어온 사람이 현태가 아닐까 봐 벌떡벌떡 일어나 문고리를 잡아야 했다.

현태는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칼질을 하는 희우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붕대를 친친 감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리 줘.”

현태가 희우 앞에 놓인 접시를 가지고 갔다.

“내가 할 수 있어요.”

“알아.”

현태는 다른 말 없이 고기를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맞은편에 앉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희우의 시선을 느끼면서 고기를 자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착한 일을 하는 어린이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문득 저 여자에게서 나오는 칭찬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고마워요.”

희우가 다시 저에게 돌아온 접시를 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당분간 학교를 쉬는 건 어때?”

“곧 방학이기도 하고, 지금 쉬면 기간제 교사 구하는 것도 힘들어요. 방학이 일주일도 안 남아서요. 이렇게 짧은 기간은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나 때문에 학교랑 우리 반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데.”

희우 대신 일할 기간제 교사를 구하는 것쯤은 현태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희우가 좋아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일을 나가게 하는 것도 불안했다. 집과 직장을 잘 알고 있는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을 붙일게.”

“사람이요?”

“경호원.”

“무슨 경호원까지 붙여요. 괜찮아요.”

희우가 손을 저었다.

“학교 건물 안에는 안 들어가.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게 붙어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 주변에도 있을 거야. 한울 그룹 소속이라 믿을 만해.”

희우는 더 이상 거절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현태가 썰어준 고기를 입에 꾸역꾸역 넣을 뿐이었다.

“비밀번호 대신 지문인식으로만 열리게 했어. 이사 전까지 이 집 써야 하니까 독고희우 씨 지문도 등록해.”

“언제 등록했어요?”

“어젯밤에.”

생각보다 치밀한 사람이었다. 알게 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자신을 위해 온갖 일을 해 주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든든한 자신만의 편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접시가 반쯤 비워졌을 때 희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때까지 현태는 사 분의 일도 채 먹지 않은 상태였다. 급박한 상황이건 아니건 희우의 먹는 속도는 여전히 빨랐다.

“안 가도 돼.”

사실 아까부터 계속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비서에게서 온 전화도 있었고 수정에게서 오는 전화도 있었다. 지금은 받기가 귀찮을 뿐이었다. 절대 희우가 미안해할까 봐 신경 쓰여서가 아니었다.

“내일 데이트하는 날이에요.”

희우가 한 말에 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 씨가 장소 정하는 날이고요.”

그사이 희우가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에 한 번 다녀왔기에 이번엔 현태가 데이트 장소를 지목할 차례였다.

“음악회가 있어.”

“설마 클래식 음악회인가요?”

“기업 재단에서 후원하는 음악가가 있어서. 거기 가 봐야 해.”

“무슨 악기인데요?”

“몰라.”

“후원한다면서 악기 이름도 몰라요?”

희우의 핀잔에 현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 바 아니라는 제스처에 희우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게 뭐예요. 후원한다면서 악기도 모르고. 설마 후원하는 사람 이름도 모르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알아. 김은석.”

“오오오오!”

희우가 입술 양 끝을 아래로 주욱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뭐라고.”

무심하게 대답하는 현태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다.

희우는 그래도 현태가 사람한텐 무심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다음 날 연주회 팸플릿에서 연주자 이름을 본 순간 산뜻하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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