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체육 수업에 아이들보다 흥분해서 설쳤더니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김은석이 아니라 강윤석인 연주자는 바이올린 실력이 무척 뛰어났다. 불우한 환경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 멋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은 희우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 빼고는 모두 감명 깊게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현태의 자리에서 두 칸 떨어진 곳에 앉은 수정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물론 희우도 눈물을 글썽였다. 하품을 하느라 나온 눈물이긴 했지만 눈물은 눈물이었다. 희우는 손끝으로 맺힌 눈물을 꼭꼭 찍어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이 넓은 무대와 객석 무대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무대가 끝이 나고 희우는 해방을 맞이한 심정으로 열렬히 박수를 쳤다. 여전히 잠이 쏟아지긴 했지만 얼마든지 감명받은 척할 수 있었다.
“앙코르! 앙코르!”
사람들의 입에서 앙코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앙코르 무대는 연달아 두 곡이 이어졌다. 희우는 또다시 쏟아져 내리는 눈꺼풀을 들어 보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때론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툭-
살짝은 무료한 기분으로 연주회를 보던 현태는 어깨에 툭 떨어지는 가벼운 무게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희우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나마 표시 나지 않게 졸기에 그냥 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자신의 어깨에 기대기까지 했다.
희우의 팔을 살짝 건드려서 깨우려던 현태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바로 옆에서 새근새근 들리는 고른 숨소리가 바이올린 소리보다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보던 수정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당장 일어나 현태의 어깨에 기댄 희우의 머리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무대에서는 애달픈 바이올린의 연주가 이어졌다.
연주회가 끝나고 후원의 밤 행사가 이어졌다.
지난번 창립 기념 파티에 이어 공식적인 행사에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기현태 본부장의 와이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저분이 기 본부장 와이프인가 봐요.”
“소문보다는 괜찮은데요?”
“소문이 어떻게 났는데요?”
“집안만 보고 결혼한 거라 변변치 않아서 회장님도 공식적인 자리엔 내놓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음악회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나중에는 본부장 어깨에 기대서 자던데. 음악을 잘 모르나 봐요.”
숙덕이는 소리가 수정에게까지 들렸다.
“어머, 저기 저 여자!”
“헉! 기 본부장 애인 아니에요?”
“친구라던데?”
“친구는 무슨.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그럼 결혼을 하지 왜…….”
“그거야, 그 여자 집안이 빵빵하니까요.”
“저런! 그럼 저 여자는 버림받은 거네요. 가엽게도.”
“가엽긴 뭘. 지금도 기 본부장이 밖에서 몰래몰래 만난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듣고 있는 수정의 입술 한쪽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당황하는 건 오히려 수정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말없이 시선만 빠르게 오고 갔다.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저런 말 하도 들어서.”
정말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제발 저들이 지껄이는 말들이 그 여자의 귀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현태에게 소문의 진실에 대해 추궁하고, 따지고 들었으면 했다. 현태가 조금이라도 그 여자에게 질릴 수만 있다면 호사가들의 안줏거리가 되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다들 남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니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정에게 젊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수정도 아는 얼굴이었다. 대학 동문회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누구였더라? 수정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선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짧은 생각 끝에 여자의 존재가 또렷해졌다. 대학 동기 문동수의 와이프였다.
우락부락한 동수와 상반되는 이미지라 기억에 남았었지.
“전 정말 괜찮아요. 동수는 왜 안 왔어요?”
수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수정의 질문에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절 기억하시네요?”
“당연하죠. 쉽게 잊힐 만한 미모가 아니신데요.”
“진짜 미인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부끄럽네요. 동수 씨는 오늘 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
“아쉽네요. 얼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하수정입니다.”
수정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김정은이에요. 네, 그분과 이름이 똑같죠.”
정은이 뒤이어 올 말을 안다는 듯 미리 덧붙이며 웃었다.
음악회는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바이올린 연주도 무척 훌륭했고. 문제는 오늘 희우가 무척 피곤했다는 데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것도 창피해서 숨고 싶었는데 박수 소리에 눈을 떴을 땐 현태의 어깨에 기댄 채였다.
생각만 해도 망신스러워 희우는 얼굴에 오르는 열을 손부채질로 열심히 몰아냈다.
“더워?”
얼굴까지 벌게진 희우를 보며 현태가 물었다.
저 인간이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건가. 희우는 연주회가 끝나고 싸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을 때 저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현태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피곤해서 그랬어요. 오늘 일이 좀 많아서.”
희우가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시선에 닿은 곳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수정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의 진정한 주인공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다.
“예쁘네요.”
희우가 수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툭 뱉었다. 현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수정을 발견했다.
저런 여자를 10년 동안 봐 왔으니 나 같은 건 눈에 차지도 않겠지.
저도 모르게 불쑥 솟은 생각에 희우는 깜짝 놀랐다.
이 남자 눈에 들어서 뭐 하게? 설마 기현태한테 관심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난 남은 1년 동안 무사히 결혼생활을 잘 끝내고 수연제만 가지면 돼. 이 남자가 저 여자와 무엇을 하든 아무 상관 없어.
기현태와 하수정. 두 사람은 그린 듯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희우는 새삼스럽게 수정을 바라보았다. 환하고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여자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옥반지쯤 되려나.
옥반지면 수연제와 꽤 잘 어울리긴 하네.
옥반지를 끼고 수연제 마루에 서 있는 제 모습이 떠올라 희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기현태 씨는 좋겠네요. 저렇게 예쁜 친구가 있어서.”
나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현태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왜요?”
“하수정이 예쁜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거야…… 예쁜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쪽인데.”
“쯧! 미안하네요. 그만큼 예쁘지 않아서.”
희우가 심통 맞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쑥 내밀었다.
현태의 시선이 립글로스를 발라 반들반들 윤이 나는 희우의 입술에서 볼록 올라온 이마로 움직였다. 조명을 받은 희우의 이마가 빤들빤들했다.
“빛나.”
“네?”
“독고희우 씨도 빛난다고.”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 참!”
희우는 난데없이 들려온 외모 찬양에 쑥스러워서 광대가 저절로 올라갔다.
“기현태 씨도 그런 말 할 줄 아는지 몰랐네요.”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해서 희우가 현태를 보며 새침하게 웃었다.
“이마가 빛나.”
“……네?”
그제야 현태의 시선이 자신의 이마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챈 희우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가리며 그를 노려봤다. 짱구 이마인 희우는 다른 사람이 이마로 놀리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항상 앞머리를 내리고 다녔는데……. 미용실 갈 타이밍을 놓쳐 긴 앞머리를 귀 옆으로 넘겼더니 이 사달이 났다.
희우는 신경질적으로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빼서 이마를 가렸다. 긴 앞머리 때문에 눈까지 가려졌다.
“왜 그러지?”
현태가 정말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됐어요. 내가 무슨 기대를 한 거야.”
희우가 씩씩대며 현태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희우의 뒷모습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현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수정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계속 현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정은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희우의 뒤를 따랐다. 현태는 이미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희우는 화장실 안에서 거울을 보며 엉망이 된 앞머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수정의 눈이 희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정말 옷 입는 센스가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집안 빼고는 정말 봐줄 게 하나도 없는 여자였다.
“희우 씨,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뵙네요.”
수정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인사했다. 반가운 척 화사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머리를 매만지던 희우는 거울을 통해 수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를 보며 탐탁지 않아 하는 희우를 보며 수정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저와 현태가 보통 친구 사이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주회는 즐거우셨어요?”
수정은 웃음을 꾹 참고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거울에 비쳐 보이는 희우는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이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수정과 한 거울 안에 보이니 더욱 비교되어 보였다.
옷 입는 센스하고는.
전부 중저가 브랜드의 옷이었다. 집안 체면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박한 안목에 수정은 저절로 헛웃음이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