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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38)화 (38/75)

38화

숨까지 참아가며 대답을 기다리는 저와 달리 현태의 대답은 곧장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수정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뭐야? 지금 망설이는 거? 설마 희우 씨가 친구 생일 챙겨 주는 것도 이해 못 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수정이 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현태가 와이프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는 말투였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한턱 쏴. 나 한국에 아무도 없는 거 알지?”

불쌍한 표정으로 마무리하는 건 수정의 가장 큰 특기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까지 촉촉하게 글썽이면 제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 * *

“와, 웬 떡이에요?”

모이라는 메신저를 받고 하나둘 교사 연구실로 모여들었다. 문을 여는 사람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떡을 보며 반가워했다.

“아, 3학년 부장님 따님, 지난주 결혼식이었잖아요. 축의금 보낸 거 고맙다고 학년에 다 돌리신 거래요.”

“오오! 따뜻하다!”

오후 3시. 허겁지겁 먹었던 급식이 소화되어 출출해질 시간이었다.

하나씩 개별 포장된 백설기를 하나씩 들고 의자에 앉았다.

뽀시락 뽀시락 비닐 포장 벗기는 소리와 전기 포트에 물 끓는 소리만 보글보글 들렸다.

“일이 잘 해결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백설기를 한 입 베어 문 이슬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희우가 교장실로 불려 갈 때마다 저가 불려가는 것처럼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으니까. 으음! 떡 맛있다! 어디 떡집이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희우가 백설기를 한입 베어 물고 눈을 크게 뜨며 떡이 담겨 있던 박스를 뒤적거렸다.

“학교 앞 달나라 떡집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맘이 바뀐 거래요?”

“다음에 또 사 먹어야겠네. 생각해 보니 진상 짓이라는 걸 알았나 보지, 뭐.”

뜨끔했지만, 희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긴 했어요.”

누가 들어도 어색하게 말을 돌렸지만, 둔한 이슬은 눈치채지 못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혜정만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운도 좋아.”

혼잣말처럼 한 말이었지만 희우에게 들릴 만큼은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혜정의 말을 듣고 몸을 움찔 떨었지만 희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떡이 이렇게 맛있는데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말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이제 겨우 장거리 부부 면했는데 다시 헤어져서 어떡해요?”

학년실에 둘이 남게 되자 이슬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눈만 끔뻑이고 있던 희우가 손뼉을 짝 쳤다.

“아참, 수련회였지!”

“설마 말씀 안 드렸어요? 아직?”

“어. 깜빡했어. 다른 일들이 많았거든.”

“내일 바로 출발인데 남편분 황당하시겠어요.”

마치 남편이라도 된 듯 저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 이슬을 본 희우가 깔깔 웃었다.

“누가 보면 이슬 샘이 내 남편인 줄 알겠어. 괜찮아. 오늘 말하면 되지.”

희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 * *

퇴근 후 한참 지났지만 현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늦는다는 문자 한 통 없었다.

“오늘 늦나?”

됐어, 언제부터 그 사람 퇴근 시간 신경 썼다고.

희우는 김치찌개를 데우고 밥을 펐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걸.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대충 밥을 다 먹고 가방을 챙기는 동안에도 현태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 이슬 샘 말대로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말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것보단 문자로 먼저 알려주는 게 낫겠지.”

희우는 짐을 싸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작성했다. 희우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톡톡 가벼운 기계음 소리와 함께 글자 수가 늘어났다.

-내일 아이들과 수련회 갑니다. 정신없어서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어요. 늦는 것 같아 문자 남겨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인사 못 하고 갈 수도 있어요.

* * *

수정은 소원대로 현태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 지난번 희우와 함께 만났던 레스토랑이었다. 현태와 약속이 정해지기도 전에 수정은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대놓고 귀찮아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현태는 군말 없이 따라왔다. 저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띠링-

현태가 화장실에 간 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현태의 휴대폰에 짧은 알람음이 울렸다. 수정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현태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희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수정은 화장실 쪽을 한 번 살핀 후 현태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 패턴이 있었지만 수정은 어렵지 않게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그 여자는 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우월감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네까짓 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다. 주제도 모르고 대단한 사람인 척하지 마.

수정은 더러운 오물을 보듯 문자를 확인한 후 거리낌 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현태의 휴대폰에 그 여자의 흔적 같은 건 남겨 놓고 싶지 않았다.

더러운 건 닦아내야지.

목적을 달성한 수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휴대폰을 올렸다. 현태가 놓고 간 방향 그대로 세심하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억지로 묶어 놓은 줄 알겠어.”

식사 내내 과묵한 현태를 보며 수정이 새초롬하게 말했다. 현태가 식사 중에 거의 말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괜히 떠보고 싶었다.

그 여자랑 밥 먹을 때도 이렇게 조용하니? 그 여자하고 같이 밥은 먹니?

치밀고 올라오는 질문을 가볍게 누르고 수정은 온순하게 웃었다.

“선물은 없어?”

“깜빡했어.”

“와아, 기현태 결혼하더니 완전 변했어. 서운해지려고 그러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로 무척 서운했다. 미국에 있는 내내 현태는 자신의 생일 선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늦게 주는 한이 있더라도 당일을 넘기지는 않았다.

“미안.”

“오늘이 다 지나간 건 아니니까 기회는 있어.”

수정이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팔짱을 꼈다. 단추가 서너 개 풀어진 셔츠웨이스트 안으로 깊고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현태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수정은 몸을 앞으로 더 숙이고 눈썹을 구기며 물었다.

“입 닦을 거야?”

현태는 잠시 고민이 됐다. 희우에게 많이 늦을 거라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태가 아무 말이 없자 수정은 부아가 치밀었다.

“와이프 눈치 보여서 그래? 베스트 프렌드 생일인데 그것도 안 봐줘?”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됐네. 난 오늘 너한테 선물을 받아야겠어. 진짜 너무해. 난 네 생일 때마다 꼬박꼬박 다 챙겨줬는데.”

수정이 정말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은 물건을 고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은 편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밥 먹고 백화점 가.”

“오케이! 나 진짜 비싼 거 골라야지.”

현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수정이 신나게 칼질을 시작했다. 오늘따라 스테이크가 더 맛있었다.

* * *

“늦나 보네.”

보낸 문자에는 답이 없고, 가방을 다 쌌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더 전화해 볼까 하다가 그냥 뒀다. 부재중 전화를 봤으면 전화하겠지. 전화를 못 할 만큼 바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파티장에서 수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 내 생일이에요.’

아. 혹시 그 여자하고 같이 있는 건가?

희우는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머뭇댔다.

여자 사람 친구 생일이라고 해서 늦게 오는 남편이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록 허울뿐인 부부라 할지라도 말이다. 왠지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 여자도 알고 있으니 저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거겠지.

“하아…….”

갑자기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알아서 들어오겠지.

혼자 대뇌이면서도 자꾸만 현관 쪽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몸살이 나려나? 일찍 자야겠다.”

며칠 동안 신경을 바싹 곧추세우고 있다가 긴장을 풀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다. 자기엔 좀 이른 감이 있었지만 희우는 망설임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큰일 났네. 내일 수련회 가야 하는데.

희우는 약을 먹고 자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이 너무 무거웠다.

* * *

수정은 다른 날보다 선물을 고르는 데 신중했다.

“이거 어때?”

“괜찮네.”

“아니다, 이게 더 잘 어울리겠다.”

수정은 고른 가방 몇 개를 두고 거울 앞에서 메어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지막 두 개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두 개 다 같은 디자인이었는데 가죽 색깔만 달랐다.

“카멜 컬러도 괜찮은 것 같고, 이상하게 버건디 컬러도 끌린단 말이야.”

거울이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수정을 보며 현태는 괜히 초조해졌다.

기다리고 있으려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다람쥐처럼 쪼르르 마중 나오던 모습이 생각났다. 흡족한 장면이라 자꾸 떠올리게 됐다.

현태의 시선이 다시 수정에게로 옮겨갔다.

두 개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카드만 쥐여주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수정이 굉장히 서운해할 게 뻔했다.

이런 일로 수정을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은 현태에게 남자 여자를 떠나서 무척 각별한 친구였다.

하는 수 없이 현태가 카드를 점원에게 내밀며 말했다.

“두 개 다 계산해 주세요.”

블랙 카드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직원이 화사하고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오늘 아내분 생일이신가 봐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런 거 아닙…….”

“그렇죠? 정말 우리 잘 어울리죠?”

현태의 말을 싹둑 자르며 수정이 팔짱을 꼈다.

“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가방을 보고 한 말이었지만 직원은 뛰어난 대처 능력으로 아무렇지 않게 응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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