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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화 (4/75)

4화

당돌하고 같잖은 여자였다. 울먹이며 결혼식장에 서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현태는 신부가 흘렸던 눈물이 제 것이 될 집문서 때문에 감격해서라곤 짐작도 하지 못한 채 희우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이유가 궁금해졌다.

현태 또한 귀국하자마자 평범한 부부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반응도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퍽 난감했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현태는 저릿해진 손끝을 팔짱 아래로 감췄다.

게다가 현태는 희우에게서 반드시 얻어 내야 할 게 있으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4년 동안 남남처럼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딴소리하는 이유가 뭐죠?”

숨은 사정을 알 리 없는 희우는 꽤 진지한 태도였다. 그래봤자 노숙자 같은 몰골 때문에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았지만.

“이러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까.”

복잡한 속내와 달리 현태의 대답은 단순했다.

“결혼과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에게서 나온 말답게 무책임하고 무례하네요.”

희우를 바라보는 현태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조용히 있을 여자라 짐작했다. 삶에 대한 주체성도, 의지도 없이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한 여자니 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깍지까지 낀 채 따지는 모습은 예상보다 훨씬 반항적이었다.

무책임하고 무례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현태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눈앞에 형편없는 몰골로 앉아 있는 여자가 아내라는 사실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누가 더 무례한지 모르겠군요.”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현태의 시선에 희우는 뜨끔했지만 딴청을 피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현태는 최근 들어 가장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이렇게 성가신 일이 될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기에 짜증이 솟았다.

현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희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여하튼, 대화가 필요한 상황인 것 같네요. 이렇게 합시다.”

시사 프로그램 사회자처럼 목소리를 낮게 까는 희우를 현태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예상을 벗어난 여자의 행동에 성질이 났지만 애써 참았다.

결혼식 내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이긴 하지만 진짜 부부는 아니잖아요?”

“진짜 부부가 아니면 뭡니까?”

희우를 보는 현태의 눈빛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는 여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현태는 말 많은 여자를 싫어했다.

어쩌자고 이런 여자하고 결혼했을까.

후회가 몰려왔지만 걸려 있는 게 많은 결혼이었으니, 돌이키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하죠. 우리가 무슨 진짜 부부라고.”

“가족 관계 증명서라도 발급받아야 합니까?”

현태의 눈매가 좀 전보다 더 차갑게 굳었다.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여자도 질색인데.

상대방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지만 기죽을 희우가 아니었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희우는 답답한지 손바닥으로 테이블까지 탁탁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혀를 차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짜증스러운 마음에 혓바닥이 계속 입천장에 들러붙었다.

이 사람 보기보단 멍청할지도 모르겠는걸? 괜찮다. 난 설명하기의 달인이니까.

희우는 심호흡을 한 후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대방 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의 여유까지 생겼다.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는 거 잘 들어보세요. 아셨죠?”

희우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차분해지고 속도는 느려졌다. 학습 부진 학생을 대하는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저에게 참 교사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 감탄하며.

현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인내심이 이 순간을 견뎌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 희우가 최대한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시작했다.

“부부란,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관계 외에도 가족 간의 유대감이라든가, 서로를 향한 책임감이나 배려 같은 게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그런데 보세요.”

희우는 듣는 사람이 벅차지 않도록 중간에 말을 끊고 현태와 시선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빛이 제법 또렷한 것을 보니 다행히 집중을 잘하고 있는 듯했다.

잘하고 있어. 이 정도면 알아듣겠어.

희우는 자신감을 가지고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우리 둘 사이에 이 중 하나라도 있나요? 당연히 없죠. 왜냐! 우리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죠. 가족관계 증명서에 인쇄된 글자가 무슨 힘이 있나요?”

“없다고 생각합니까?”

현태의 입술이 조소로 비틀렸지만 자신의 설명에 고취된 희우는 알아채지 못했다. 질문하는 학생은 예쁜 학생이지.

“완전 없진 않지만 껍질뿐인…….”

“다행이군요.”

눈높이 설명을 착실하게 하며 나름 보람을 느끼는데, 마음에 들지 않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네?”

“껍질이라도 있으니 알맹이는 지금부터 채우면 되는 거고.”

난데없이 훅 들어온 알맹이 이론에 여유롭게 쌓아가던 희우의 설명 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요? 난 껍질만 있어도 괜찮은데? 이 껍질 완전히 사랑하는데?”

희우가 큰 소리로 말하자 술 냄새가 짙어졌다. 현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 사랑이 있으니 더 다행이고.”

“이 사람이! 이 사랑이 그 사랑은 아니잖아요!”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희우를 보니 현태는 마음이 좀 편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이 어느새 앞으로 내려왔다.

상대방이 이성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상대의 모자람을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그래, 이렇게 되어야지.

“그럼 독고희우 씨가 원하는 게 사랑입니까?”

둘 사이에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희우가 입을 꾹 다물자 우위를 점령한 것 같은 기분에 현태는 좀 전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뭐래.”

저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는 희우의 시선에 당황한 건 현태였다.

“와. 항마력 달린다.”

“무슨 뜻이죠?”

처음 듣는 단어에 현태는 평정심을 잃고 손을 말아 쥐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제 말이요. 도대체 기현태 씨는 무슨 소리죠? 제가 왜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하죠?”

희우가 못 볼 꼴이라도 본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상대방에 대한 정보부터 다시 수집해야 할 것 같았다. 현태는 저를 보며 씩씩대는 여자를 바라보며 엉망으로 얽힌 머릿속을 재빠르게 정리했다.

서로에 대한 호감도, 아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시간을 갖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잠깐의 휴전이었다.

“아! 맞다. 그 여자는 어쩌고 왔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맞아. 그거 이혼 사유잖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떠오른 아이디어에 희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최소 5년은 유지해야 수연제가 네 명의로 될 거다.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희우는 할아버지가 오 년이라는 기한을 두면서까지 저를 기현태와 결혼시킨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알아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일 년만 더 있다가 들어오지.”

희우가 탁상 달력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일 년 잘 버텨 보자. 그리고 이혼하면 돼.”

한편, 현태는 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휴대폰 인터넷 검색창에 ‘항마력’을 입력했다. 얼핏 봐도 저보다 절대 지적 능력이 뛰어나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데 항마력, 이라는 단어는 현태에게 무척 생소했다. 어학 사전에는 등록되지 않는 단어의 뜻을 읽어 내려가는 현태의 미간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항마력 :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이나 사진을 보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라는 뜻을 지닌 신조어이다.

휴대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꺼 버린 현태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깟 일로 감정이 흐트러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 말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는 건가?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하아…….”

저절로 한숨이 샜다. 다른 의미에서 벽이 느껴지는 여자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에 주름진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현태는 침대에 걸터앉아 최대한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첫째, 독고희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둘째, 남은 시간은 1년뿐이다.

셋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한울 전자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현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정면승부를 하는 수밖에 없나?

집안의 강요로 결혼식장에 섰던 여자는 결혼식 내내 눈가가 그렁했다. 의지 없이 휘둘리는 여자는 흥미 없었지만 병풍 같은 와이프를 세웠으니, 결혼생활이 편할 거라 애써 위안 삼았다. 하지만 지금 만난 여자는 병풍은커녕 태풍의 눈처럼 불안 불안했다.

결코 현태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후우!”

답답해진 마음을 한숨으로 풀어내며 현태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거실은 삭막하리만큼 깔끔했다. 군데군데 놓인 싱싱한 화초가 없었더라면 모델 하우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지라 마음에 들었지만 어쩐지 독고희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널찍한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가 천천히 희우의 방 앞으로 갔다.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방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질문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왜 제일 작은 게스트 룸에서 지내는 거지?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독고희우는 현태가 예상했던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경박한 말투도 싫었다.

현태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귀국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 달은 지난 것처럼 피곤했다.

똑똑.

마음을 가다듬은 현태가 조용히 노크하자 몇 초 후문이 벌컥 열렸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모습에 현태의 눈매가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구질구질하기는.

싫은 게 하나 더 늘었다.

막 머리를 감았는지 희우는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아 감고 있었다. 막 샤워를 끝낸 희우에게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채 닦아내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물방울과 함께 움직이던 현태의 시선이 오목하게 파인 쇄골에서 멈췄다.

현태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희우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갈무리해 드러난 쇄골을 덮었다.

“뭘 봐요?”

방어적인 희우의 행동에 현태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법적으로 제게 속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좌우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예쁜 쇄골에 입술을 박고 지분거리는 모습이 제멋대로 상상됐다.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아 말갛게 올라오는 체향이 좋았다.

좋다고?

현태는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얼른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대한 방어 본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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