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야기 좀 합시다.”
현태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하자, 희우가 더 눈매를 찌푸렸다.
“기다려요. 곧 나갈게요.”
탁!
단호하게 닫히는 문에는 망설임이나 조심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면전에서 이렇게 문을 닫아 버리다니.
현태는 자존심이 상했다. 남녀를 떠나 이렇게 홀대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무려 아내라는 여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다시 4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할아버지의 명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현태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이 결혼으로 인해 손에 들어올 이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인 기 회장의 유일한 취미는 조선 최고 학자인 독고운 선생의 저서를 모으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가 독고운 선생의 핏줄을 이어받은 손주를 열망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기우돌 회장에겐 그 일을 추진할 만한 힘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한울 전자를 넘겨주마. 그리고…….’
독고운 선생과 관련된 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서 저를 보며 음흉하게 미소 짓던 기 회장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귀국한 것도 할아버지의 최후통첩 때문이었다.
아내가 된 여자도 저에게 그다지 마음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도 들었던 말도 ‘그렇군요.’가 전부였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희우에게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왔었다. 답 메일에 쓸 말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까맣게 잊었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에 희우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친정 어른들이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현태의 귀국을 재촉했다.
하지만 현태는 희우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여자는 결코 아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이쯤은 쉽게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 쪽의 거절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쉽게 생각했나.”
오랜만에 맞보는 패배감에 입 안이 썼다. 현태에게 독고희우라는 여자는 아내이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 같은 존재였다.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일수록 흥미가 돋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몇 분을 앉아 있었을까. 잠시 후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태의 눈, 귀가 자연스레 찡그려졌다. 호승심과는 별개의 감정이었다.
걸음걸이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모양의 슬리퍼는 디자인까지 촌스러웠다.
털썩.
무거운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앉아 있는데 맞은편 소파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들어볼까요?”
희우가 현태를 보며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로운 말투로 물었다.
“…….”
가시덤불처럼 헝클어진 머리와 지워지지 않은 화장을 덕지덕지 얼굴에 묻히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말간 피부에 탐스러운 곱슬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흐르는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여자가 앉아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여자의 당돌한 눈빛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만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강적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쉽지 않은 과제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현태는 타고난 사업가요, 승부사였다. 마음먹은 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속마음을 감추고 상대방을 느긋하게 응시했다.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조하고 냉소적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우리가 부부인 건 알고 있을 테고.”
현태의 차가운 시선 따위, 희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재수가 없을 뿐.
“같은 말 반복은 사절입니다.”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튀어나온 희우의 말에 현태의 눈매가 다시 굳었다.
젠장 맞을 노인네.
현태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좀 전과 달리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까보다는 격식을 차린 자세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오면 불안한데.”
희우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현태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현태는 자꾸만 자신의 무언가를 건드리며 거슬리게 구는 여자를 노려보지 않으려 애썼다.
“당신의 아이가 필요합니다.”
“……네?”
질문과 대답 사이의 짧은 정적이 끝난 후 희우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무슨 뜻이에요? 나한테 아이가 어디 있어요? 있다 해도 당신한테 내 애를 왜 주죠?”
말할수록 기가 막혀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말투는 빨라졌다.
눈앞의 남자에겐 애는커녕 교실에서 키우는 방울토마토 한 알도 주기 싫었다.
희우는 사력을 다해 현태를 쏘아봤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자의 표정이 꽤 볼 만했다. 현태는 희우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걸 보며 점점 더 여유로워졌다. 상대가 예상대로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큼 만족스러운 건 없었다.
“애는 앞으로 만들면 되고, 내가 아이의 아빠니까 준다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뭘 만들어요?”
안 그래도 양껏 올라갔던 희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붉은 입술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지만 현태는 못 본 척했다.
“설마 그 나이에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이런 미친!”
현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야! 사 년 만에 나타나서 뭐? 애를 만들어? 애가 뭐 찰흙 작품이냐? 만들자~ 하면 뚝딱 만들어지게?”
희우는 저가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현태의 모습에서 ‘아들, 아들’ 입에 달고 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최악이야.
현태 역시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부부라면 아이를 갖는 건 자연스러운데, 이렇게 거품을 물고 난리를 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천박하고 격한 반응이라니. 현태의 평정심에 쩍쩍 금이 갔다.
“뭐가 문제입니까? 부부 사이엔 당연한 일인데.”
현태가 차갑게 한 말에 잔뜩 흥분했던 희우가 입을 뚝 다물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지만 너무 기분이 나빴다.
“내가 알 까는 암탉도 아니고 다짜고짜 애 낳자는 소리를 하는데, 누가 화를 안 냅니까?”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희우가 다시 말을 높였다.
“그럼 이혼이라도 할 겁니까?”
“이혼? 까짓거 못할까 봐요? 누가 겁낸다고.”
희우의 턱이 오만하게 위로 치솟았다.
“수연제 명의가 독고희우 씨 앞으로 되는 건 이 결혼을 5년간 유지했을 때입니다.”
그답지 않게 말이 길었지만 현태의 평소 모습을 모르는 희우는 이상함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갑자기 훅 들어온 현태의 공격에 희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놈이 어떻게 알았지? 할아버지가 이런 것까지 말했다고? 왜?
희우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오 센티는 올라갔던 턱이 제자리로 돌아온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그래서 어쩌자고요.”
당황스러워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니 은근히 만족스러웠다.
“아이.”
현태가 정해진 답을 제시했다.
“아이…씨. 진짜.”
말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희우는 눈빛으로 쌍욕을 해 대고 있었다.
“독고운 선생님의 자손으로 보이지 않는 언행이군요.”
“그쪽도 할아버지 손자로는 안 보이거든요.”
희우가 지지 않고 말했다. 열 받았는지 옆구리를 손으로 짚고 서서 눈에 띄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여자에게서 나는 단내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현태가 물었다.
“할아버지? 기우돌 회장님 말입니까?”
어쩐지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할아버지라는 단어가 말랑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내 할아버지겠어요?”
“결혼식 후, 뵌 적 있습니까?”
“당연하죠. 시댁 어른인데.”
희우 입에서 나온 ‘시댁 어른’이라는 단어에 현태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생각보단 수월하게 과제를 해결할 수 있겠단 생각도 슬쩍 들었다.
“낯가림 심해서 힘들었어요. 그나마 할아버지 덕분에 견뎠지.”
희우는 자신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것처럼 굴던 기 회장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수연제와는 다른 분위기로 으리으리하던 집 안에서 기우돌 회장님은 유일하게 온기가 느껴지던 분이었다.
기 회장은 본가에 들어갈 때마다 그녀를 위한 선물을 따로 준비해 놓을 정도로 희우를 끔찍하게 아꼈다. 마치 독고운 선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극진한 대접이었다.
“독고희우 씨는 당장 이혼을 할 수 없고, 난 일 년 내로 회장님께 손주를 대령해야 하죠. 서로 조건은 맞는 것 같군요.”
“일 년 동안 진짜 부부처럼 지내자고요? 잠자리도…… 하고?”
현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라도 보듯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이었다.
희우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남사스러워 이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잘 수는 없어요.”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건 독고희우 씨입니다.”
“그건!”
차마 네놈이 미국에 갈 걸 알고 그랬다고 말할 순 없었다.
희우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현태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저절로 눈길이 갈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지금 희우의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오징어 빨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럼 날 사랑하면 되겠군요.”
잘난 척 오지는 오징어 빨판이 감히 사랑을 논했다.
“그쪽을 사랑하라고요?”
유치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뱉는 현태를 보며 희우는 피식 웃었다.
나름 선심 쓰듯 말했던 현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희우가 저를 허세 부리는 사춘기 남학생처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왜 웃는 겁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날카로워졌지만 현태는 자각하지 못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