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수연제는 보통 집이 아니었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역사가 오래된 99칸짜리 고택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 분의 일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한 연조 22년, 임금의 스승이자 조선 시대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독고운’ 대감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딸이라는 이유로 새벽부터 부엌에서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해도 제사상 근처에 오지 못하게 막던 게 바로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물려주겠다니, 그것도 이 집의 장손도 아닌 나에게?
희우는 장손인 아버지의 외동딸이었다. 딸인 희우가 남존여비 사상이 골수까지 충만한 할아버지에게 강낭콩만 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래도 그렇지, 삼촌이 저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아니, 감고 있나?
희우는 삼촌의 핏기 없는 얼굴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평소 삼촌 성격이라면 길길이 날뛰고도 남을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수연제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삼촌까지 잠잠했다. 그저 희우를 촉촉한 눈으로 쳐다보다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겨우겨우 뱉은 말이…….
“부탁한다. 희우야.”
였다.
“뭘요?”
희우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느낌이 싸한데. 물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미끼가 너무 황홀했다.
“결혼하자.”
“삼촌이랑요?”
희우가 멍하게 물어보자 삼촌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기현태랑.”
“아니, 그러니까 그 기현태가 도대체 누구냐고요!”
* * *
그 기현태가 지금 거실에 있었다.
“하아, 갑갑하구만.”
희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깊게 뱉었다.
그래, 지난 4년 동안 너무 평화로웠어.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했지.
수연제는 희우 앞으로 넘어오기 직전이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치른 결혼식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했다. 얼마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드레스는 아직도 침대 밑에 곱게 보관되어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 상자를 한 번도 열어본 적 없었다. 중고 시장에 되팔 때나 열어보지 않을까?
게다가 문제의 기현태는 미친놈과 모지리 그 어디쯤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완벽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로 결혼식장에 등장했다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모든 게 완벽했는데.”
달콤했던 지난 4년을 곱씹는 희우의 얼굴에 아쉬움이 절절히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우는 갑자기 몰려든 숙취로 한숨을 몇 번 푸푸 내쉬다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고민과 숙면 사이의 시간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묵직한 바위가 이마를 꾹 누르는 것 같았다. 희우는 눈을 겨우 떴다. 모래가 낀 것처럼 눈꺼풀 안이 뻑뻑했다. 초점이 맞지 않던 시야에 차츰 천장 무늬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냄새.
아, 다행이다. 집으로 잘 들어왔구나.
천장을 응시해도 사면의 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좁은 공간에 희우는 마음이 편해졌다.
희우는 눈을 몇 번 끔뻑인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입고 잠들었던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좀 불편하더라니.
“다 구겨졌네.”
희우가 인상을 쓰며 재킷을 벗어 한쪽에 던졌다. 고기 냄새가 배서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 같았다.
“으으, 목말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가며 목을 벅벅 긁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묶었다. 온몸에서 술 냄새, 고기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상관없었다. 볼 사람도 없으니까.
볼 사람? 맞다! 기현태!
어젯밤 기억이 떠오른 희우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부산스레 살폈다. 하지만 썰렁한 거실엔 누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없었다.
희우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안방 문을 열었다. 자는 사람을 깨울까 봐 최대한 조심했다. 문은 미는 대로 부드럽게 열렸다.
도둑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없네?”
빈방을 텅 빈 눈으로 몇 초간 바라보던 희우가 현관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거실도 넓고, 복도도 길어 한참 가야 했다.
“없다!”
신발도 없었다. 희우는 다시 안방으로 후다다닥 뛰어갔다.
“없어!”
희우의 목소리가 기쁨으로 차츰 커졌다.
침대 위에는 이불조차 없었고, 현태의 짐 비슷해 보이는 것도 없었다.
“꿈이었나?”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이 순식간에 반달 모양이 됐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꿈을 꿨나 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꿈을 꾸냐. 와~씨, 진짜 생생했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부엌으로 걸어가는데.
“뭐가 말입니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남자 목소리에 희우가 꽥 소리를 질렀다.
“우왁! 놀라라!”
눈앞엔 현태가 오만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재수 없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걸 보니 현실이 분명했다.
희우는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현태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쳤다. 차마 믿기지 않아서였다. 손끝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실낱같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
“딱딱하네. 꿈이 아니었어.”
망연자실한 희우를 보며 현태는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지금 상황이 무척 짜증 났다.
“꽤 실망한 눈치군요.”
정곡을 찌른 현태의 말에 희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없었고,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눈만 부릅뜬 선 희우를 흘끔 쳐다본 현태가 짧게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스치듯 지나간 시선이었지만 희우는 매우 기분이 언짢아졌다.
현태는 냉장고 문을 열고 작은 생수통 하나를 꺼냈다.
까득.
다시 돌아온 현태가 물병 뚜껑을 따 희우 앞으로 내밀었다. 희우의 고개가 현태의 움직임을 따라다녔다. 초점 없이 텅 빈 눈빛에 쳐다본다고 말하기도 뭣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마셔요.”
물병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던 희우의 시선이 다시 현태의 얼굴에 와 닿았다.
“목말라서 나온 거 아닙니까?”
“아…… 예. 그렇죠.”
희우는 생수병을 입에 갖다 대고 쉬지 않고 들이켰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고 보자 싶었다.
밤새 냉장고 안에 있던 차가운 물에 이가 시렸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꿀꺽, 꿀꺽, 꿀꺽.
두 사람 사이엔 물 넘기는 소리만 요란했다.
순식간에 생수 한 병을 거의 다 비운 희우가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으으으, 으윽! 머리야!”
현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희우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차가운 물을 갑자기 많이 마셔서 그래요. 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아찔한 두통이 사라지고 희우가 눈을 떴을 땐 현태는 거실에 앉아 태블릿을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친 기분이었다.
괜히 뻘쭘해진 희우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일어섰다. 동시에 냉장고에 흐릿하게 비친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난 가?
냉장고에 흐리게 비친 거라 저럴 거라며 복도에 걸린 거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야말로 미친년 그 자체였다.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 때문에 눈두덩은 판다 같았고 술만 취하면 아랫입술을 빨아대는 습관 때문에 흐릿한 립스틱마저 반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질끈 묶은 뻣뻣한 천연 곱슬 머리카락은 먹다 남은 빵처럼 정수리 옆에서 볼품없이 덜렁댔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화악 몰려왔다. 현태는 이른 아침임에도 흠잡을 곳 없이 멀끔한 모습이었는데.
방으로 들어가서 머리라도 빗고 올까 생각했던 희우는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와 예쁘게 보일 필요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딱히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술 냄새가 폴폴 나는 건 좀 신경이 쓰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참에 넌덜머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면 에헤라디야였다.
희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거실로 당당하게 걸어가 현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우의 기척을 느꼈는지 태블릿 화면에 머물러 있던 현태의 고개가 움직였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느긋한 그의 표정에 괜히 승부욕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은 눈앞의 남자와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만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오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태어나서 누구한테 져 본 기억이 없어.
희우도 여유롭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꼈다. 내리깐 시선과 엣지 있게 들어 올려진 턱은 덤이었다.
“오면 온다고 미리 연락을 했어야죠.”
지나치게 뻔뻔하게 나가나?
잠깐 고민했지만 이왕 말아먹은 이미지 그냥 이대로 밀고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메일 확인 안 했습니까? 열흘 전, 그리고 어제, 오늘 귀국할 거라고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현태가 지나치게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매가 살짝 구겨진 것 말고는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
예상치 못했던 그의 대답에 희우의 얼굴에 민망함 한 방울이 떨어졌다. 엣지를 분실한 턱이 급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아?”
현태의 반응에 희우는 슬쩍 눈길을 피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리 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제가 업무 메일 외에는 잘 안 써서. 또 대부분 광고나 스팸메일이기도 하고요.”
“수신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희우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 현태가 대꾸했다.
그의 눈빛을 보며 희우는 오래전 아파트 전세를 대출을 위해 방문했던 은행 직원을 떠올렸다.
딱 저런 표정이었어. 괜히 상대방 기죽게 만드는 재수 없는 표정.
하지만 오늘은 움츠러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마 한꺼번에 읽음 처리해서 휴지통에 버렸을 거예요.”
희우는 손톱 끝을 살피는 척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휴지통?”
현태는 메일을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다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단번에 나온 대답에 현태의 미간이 조금 더 찡그려졌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하고 노골적인 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술 냄새를 풍기며 엉망인 몰골로 앉아 있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여자는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원래 이런 성격입니까.”
“글쎄요.”
이번엔 희우가 빙긋 웃었다.
“근데 말이에요.”
희우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수리 옆에서 덜렁대던 머리카락 뭉치가 앞으로 툭 떨어졌다.
현태가 움찔하는 걸 봤지만 희우는 모르는 척 머리 뭉텅이를 옆으로 치우고 시야를 확보했다.
머리에서 왜 된장찌개 냄새가 나지? 아, 어제 뚝배기에 들어갔었지.
잠시 떠오른 어제의 기억에 희우는 코를 몇 번 훌쩍였다. 아무래도 씻긴 해야 할 것 같았다.
“4년 동안 남남처럼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딴소리하는 이유가 뭐죠?”
코를 찌르는 된장 냄새를 뒤로하고 희우가 공격성이 짙은 눈빛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