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올해도 인재는 없나 봐. 재미없어. 지겨워.”
흑기사단 단장 하키라가 무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상 아래, 엉망진창인 대련을 바라보고 있는 카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말이지 인내심의 한계였다.
이 경연대회 같은 대련을 계속 보고 있느니, 마수의 사체와 하루 동안 한 방에 갇혀 있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았다.
“합격자를 골라내는 것도 민망하군, 그래.”
“신입인 걸 감안해서라도. 확실히 민망해.”
썩을 대로 썩은 기사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부터 이딴 것들을 인재라고, 입단 시험에 내보내는 꼴만 봐도 그랬다.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적어도 카신과 하키라, 그리고 에르네가 단장직에 오르면서부터는 돈과 혈연, 학벌만으로는 기사단에 입단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실력’을 가장 우선시하는 깐깐한 성미 탓에 매해 신입을 뽑는 인원보다 잃는 인원이 더 많았다.
훈련이 힘들어서 그만두거나, 출전을 앞두고 두려움에 그만두거나. 혹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전에서 목숨을 잃는 용맹한 기사들은 제외하고 나머지는 어차피 못 쓸 인간을 거르는 것이니 다행이긴 하다만.
쓸 인간은 한정적이고, 그들의 체력엔 한계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플로라.”
기사단의 막막한 앞날에 대한 사색을 하던 중, 어느새 다음 순서가 됐다. 카신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단상 아래를 보았다.
눈이 부신 은발 머리를 높이 묶은, 왜소한 몸집의 여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오고 있었다.
별을 수놓은 듯 반짝거리는 은발의 머리칼과 고요한 검은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카신은 무심결에 오래된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 적 생각을 하는 거야. 드디어 미쳤군.’
그러나 금세 저 자신을 어이없어하며 픽, 웃음을 흘렸다.
“우와아. 저렇게 완벽한 은발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예쁘다.”
누가 별명이 까마귀 아니랄까 봐 하키라는 눈을 빛냈고, 에르네는 늘 그렇듯 상대를 그저 죽일 듯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카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에서 그를 부를 만한 자는 명예 기사나 부단장뿐이었다.
카신이 살짝 등받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부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저 애, 재미있어요. 단장님.”
재미있다는 건 무슨 소리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애매한 말에 카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지겨운데 너까지 장난질이냐, 한 소리를 하려 했지만 그 전에 대련이 시작되었다. 카신은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사르트를 구박하지 않길 잘했다 싶어졌다. 중급 기사와 대련하는 여자를 보니 부하의 말뜻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야, 저거 마력 있는데.”
외모 칭찬이나 늘어놓던 하키라도 거의 눕다시피 하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마력이 불안정한데…… 무의식중에 쓰는 건가?”
“체내에 마력이 저리 많은데 아직 각성을 못 한 건가?”
마법사나 궁금해할 질문을 하키라와 주고받았으나, 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오랜만의 수재라는 것.
그리고 에르네를 제외한 두 기사 단장은 갑자기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자신을 괴물 보듯 하는 상대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플로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연무장 중앙에서 벗어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시험이 진행되었다.
그 이후 한동안 이어진 시험이 모두 끝났을 때는 배가 심하게 고파 기력이 떨어져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으나 체감상 오찬 시간은 훌쩍 넘긴 것이 분명했다.
짧은 회의 끝에 첫 번째 시험 합격자를 발표했다. 못해도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응시자 중 합격자는 고작 열다섯 명이었다.
플로라도 다행히 그 안에 속했다. 루가르가 했던 말 때문에 긴장은 놓지 않고 있었으나, 다행히 걱정한 만큼 융통성이 없는 집단은 아닌 모양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의 합격자는 나눠드리는 식사를 드시고, 한 시간 후에 연무장 뒤편에 있는 마법 게이트로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기사의 말을 끝으로 뻣뻣하게 굳어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지만 더러는 자신의 탈락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항의 또는 타인을 향한 분노로 표출하기도 했다.
“이봐. 너.”
그 분노가 하필이면 뱃가죽이 등에 붙어 버릴 것 같은 플로라에게 향한 것이 문제였다.
“무슨 일이시죠?”
식사를 받으러 가던 플로라를 불러 세운 남자는 척 보기에도 ‘나 귀족 가문이에요.’ 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알리고 있었다.
아카데미 단복에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남자가 보석을 치장한 게 아니라, 보석이 남자를 치장한 수준이었다.
“너 평민이라며?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고, 달랑 추천장 하나만 들고 왔다며.”
응시자의 신원은 보장되는 게 아니었나.
하기야 돈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니, 그새 어디서 정보를 물어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플로라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얼굴로 빤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듯,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던 남자가 돌연 얼굴을 붉혔다.
“흠흠. 내, 내게 다음 시험 자격을 넘겨! 돈은 원하는 만큼 주겠다. 나는 라벨리우 가문의 차남으로서…… 우리 형님은 흑기사단의…….”
“싫습니다.”
“응?”
더 들어볼 것도 없어서 플로라는 남자의 말을 자르고 거절했다.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왜 싫어? 어차피 너 같은 평민은 금화나 작위를 얻자고 기사단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닌가? 내가 평생 먹고살 만큼의 보수를 약속하겠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저는 금화나 작위를 얻자고 기사단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서요.”
플로라의 대답에 남자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이쯤 하면 대화는 끝난 건가 싶어 플로라가 등을 돌렸다.
남자가 손목을 붙잡아 오기 전까지는 이제 진짜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잠깐의 해프닝 정도는 너그럽게 잊어줄 수 있었다.
“그럼?”
……하. 이런 기생충 같은.
“손 놔주시죠.”
남자는 겁도 없이 플로라의 손목을 잡았다. 끝끝내 그녀의 행복한 식사 시간을 방해하려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얼른 얘기해. 금화나 작위 말고 원하는 게 뭐지?”
“제가 그런 것까지 말씀드려야 합니까? 손 놔주시죠. 저, 배고파서요.”
플로라의 성의 없는 대답에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뭐? 이 상황에 배가 고프다고?!”
“이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네 앞에 일확천금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 네 인생이 뒤바뀔 거라고.”
내가 보기엔 네 목이 날아가기 30초 전쯤으로 보이는데.
“그런 것에 관심 없습니다. 안 팔아요.”
플로라가 불시에 살기를 내뿜었다.
아무리 멍청해도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상대의 살기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 싶었는데, 이거 멍청해도 보통 멍청한 게 아닌 모양인지 꿋꿋하게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럼 뭘 위해……!”
“저는 약한 자들을 수호하고, 정의를 위해 살 겁니다.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려는 거고요. 그러니 제게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영식께 자격을 넘기진 않을 겁니다.”
플로라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남자가 붙든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자격을 넘기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참 뻔뻔하게도 하니 뒤늦게 황당함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니 쓸데없이 너무 착했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자 했지, 이리 아무 때나 물러 터진 인간이 되려는 건 아니었는데.
다시 가서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운이 좋아서 붙은 주제에! 네까짓 게!”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먼저 덤벼주면 이쪽은 그저 고마웠다.
플로라가 공격의 흐름을 읽고 몸을 틀었을 때였다.
“그만.”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플로라에게 미처 닿지 못한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플로라가 멀거니 선 채 눈을 깜빡였다.
백색 정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남자가 플로라의 앞을 막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큰 키 때문에 플로라의 시야는 완전히 가려진 채였다.
남자가 입은 정복은 사르트가 입고 있던 제복과는 좀 달랐는데, 상의가 긴 코트 형식이었고 어깨에 달린 견장의 문양이 좀 더 세밀하고 화려했다.
“괜찮나?”
플로라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남자가 반쯤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네.”
그 대답에 안심했는지 남자가 살짝 몸을 틀어 영식과 플로라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잿빛 머리칼에 벽안을 가진 매력적인 남자였다.
플로라는 이 남자를 본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연무장 단상에 앉아 몹시 따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란이었지? 시험도 끝났는데 검을 든 이유를 설명하게.”
백기사단의 기사단장……?
믿고 싶진 않지만, 그랬다.
플로라는 남자에게서 휘몰아치는 위압감에 압도당했다. 멀리서 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서 있으니 몸이 멋대로 경직되었다.
거대한 뱀이 플로라 주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에르네에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위협이었다.
“아, 카, 카신 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벨리우 가문의…….”
중재자가 기사단장임을 알아본 귀족 가문의 영식도 더듬더듬 제 소개를 했다.
‘잠깐. 카신이라고 했나?’
플로라의 눈이 잠시 경이로움을 품고 백기사단의 단장을 향했다.
‘설마 진짜 그 카신인가?’
카신 르벨로티아.
그에 대해서는 센칸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었다.
중앙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부터 혼자 5급 마수는 거뜬히 상대할 정도의 수재였고, 졸업할 때쯤엔 마력을 각성해 마스터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일을 해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다 나진 않았지만, 하나 확실히 그의 존재를 인식한 계기는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굴로 인해 벌어진 전쟁. 카신은 홀로 3마리 정도의 4급 마수를 처치했고, 마굴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2급 마수 또한 그의 지휘 아래 기사들과 함께 격퇴했다고 한다.
그러니 기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었다.
2급 마수는 거의 드래곤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4급 마수와 한참 싸우고도 2급 마수까지-물론 기사단과 함께했지만-처치했다는 소문을 들은 플로라는 카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괴물이 어느새 단장을 맡고 있었고, 플로라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