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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8)화 (18/154)

18.

시험 장소는 황제의 성과 꽤 거리가 있었다.

루가르가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을 직접 겪고 난 뒤에야 절실히 통감했다.

‘근처까지만이라도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플로라는 방금 전 정원을 지나치던 고용인에게 길을 물었던 기억을 상기했다.

마구간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했지.

그다음은…… 길이 나뉘어 있는데?

아, 또다시 난관이었다.

플로라가 곤란한 듯 갈림길 앞에 멈춰 서서 뺨을 긁적였다.

“하. 어지러워.”

넓은 외딴섬에서도 지도 없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살아온 플로라였다.

한데 여기서는 고작 기사단 연무장 하나 찾지 못해 이리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

초행길이니 어쩔 수 없지만 한심하다는 자책이 계속됐다. 한가하게 스스로를 위로할 여유 따윈 없었다.

이렇게 계속 길을 헤맨다면 제시간에 연무장에 도착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기사단에 합격하면 이 빌어먹을 길부터 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마침 백색의 단복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는 불필요한 고민을 끝내고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실례합니다. 길을 좀 묻겠습니다.”

기사들은 플로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딜 가십니까?”

“아, 오늘 황실 기사단 입단 테스트가 열리는 연무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길을 모르는 것 보니, 아카데미 생도가 아닌 모양입니다?”

“네.”

이 상황에 아카데미 생도가 아닌 것이 왜 궁금한 거지.

쓸데없는 질문과 노골적인 시선이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플로라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기서 기분이나 상해봤자 이들을 어쩔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곧 기사 중 한 명이 심드렁하게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쭉 가세요.”

태도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그녀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담긴 얼굴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어차피 떨어질 거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라. 혹은, 네까짓 게 왜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 시험을 봐서 기사의 명예를 떨어트리려 하는 거지?

한때 플로라도 저 기사들처럼 우월감에 도취 되었던 적이 있어 그런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돈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는 평민 주제에 얄팍한 검술 하나만 믿고 제국을 수호하는 기사단에 들어가겠다는데, 어느 누가 코웃음 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꿈과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녀가 발붙이고 사는 세계에 계급이 존재하는 한 영영 사라지지 않을 차별과 냉대였다.

기분이 좀 나쁜 것과는 별개로 기사들에게 화를 내거나 지적할 권리는 없었다.

일단 갈 길이 바빴다. 일일이 기분 나쁜 부분을 지적할 시간도 없었고,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을 말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기사들이 성의 없이 가르쳐준 길은 찜찜했지만, 억울하게도 아는 게 없으니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플로라가 왼쪽 길에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거기가 아니잖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플로라는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사르트 경! 안녕하십니까!”

짧게 정돈된 금발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남자가 품고 있는 옅은 녹색 빛의 동공은 이제 막 돋아난 봄의 푸르른 새싹을 연상하게 했지만, 그 속에 서린 기운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되려 꽁꽁 얼어붙은 겨울만큼이나 차가워서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백색 제복과 황금색 견장에 달린 흰 망토, 그리고 장갑까지.

완벽한 정복을 갖춰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정돈된 고귀함이 느껴졌다.

“렐 경. 마젠타 경.”

남자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두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정찰 임무를 맡겨놨더니, 아직 합격도 안 한 생도에게 심술이나 부리고 있나?”

“저, 그…… 죄송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나도 갈 길이 바빠서.”

“…….”

“경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 가.”

두 명의 기사는 사색이 되어 후다닥 자리를 떴다.

플로라는 도망치듯 떠나버린 기사들을 바라보다, 이내 저를 도와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쩐지 찜찜하다 싶더니 역시 길을 잘못 알려준 모양이었다.

차별은 그렇다 쳐도 길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다니.

살짝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래도 운 좋게 이 남자를 만나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저들을 대신해 사과하겠네.”

“……사과는 괜찮습니다.”

“따라와. 이러다 늦겠어.”

기사들이 ‘사르트 경’이라고 불렀던 남자가 앞서 걸었다. 플로라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하늘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나무와 잘 정돈된 수풀들로 촘촘히 꾸며진 정원이 나왔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로 차는 공기가 상쾌해서 마치 산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장 야생동물이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숲이 주는 편안함에 플로라가 마음을 놓았을 때였다.

사삭거리는 기이한 풀 소리가 나더니, 하늘에서 뭐가 뚝 떨어졌다.

“으악!”

묵직하고 괴상한 비명 소리와 함께.

플로라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꽂아둔 단도를 꺼내 괴한의 뒤에 섰다.

위협적인 인물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사르트와 같은 정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뭐야, 이거 칼이야? 미친!”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괴한이었다.

플로라는 시선을 굴려 사르트의 눈치를 봤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게 아닌 모양인지 사르트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이거 망한 것 같은데.’

플로라가 슬그머니 칼을 거두자, 사르트가 설핏 입매를 비틀어 올리는 게 보였다.

“야. 사르트. 이거 뭐야? 너 도대체 뭘 달고 온 거야?”

뒤를 돌아본 남자가 얼굴이 발개진 채 소리쳤다.

“그러게요. 제가 뭘 주워 온 건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거야? 나 방금 죽을 뻔했어.”

“그러니까 그런 장난 그만 치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선배.”

지극히 무의식적인 반사 반응이라, 플로라의 머리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평화를 만끽하던 차에 하늘에서 웬 괴한이 뚝 떨어졌으니,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 따위 있을 리가 만무했다.

플로라는 주춤거리다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습격인 줄 알고…….”

“간 떨어질 뻔했네. 진짜.”

남자가 흐트러진 정복을 추스르며 플로라를 노려봤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 없어요. 이만 가죠.”

다행히 무어라 더 호통치려는 남자를 끌고, 사르트가 앞장서 걸었다.

어쩐지 백기사단엔 합격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플로라도 그 뒤를 따랐다.

* * *

다행히 연무장에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세주처럼 등장했던 사르트와 그의 동료는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빠르기도 하지…….’

그렇게 시험이 시작됐다.

첫 번째 시험은 중급 기사들과의 일대일 대련이었다.

플로라는 큰 연무장을 둘러보다 중앙에 위치한 단상에 시선을 멈췄다.

단상 위에 놓인 의자는 단 세 개였고, 모두 주인이 있었다.

흑색 제복을 입은 남자와 백색 제복을 입은 남자, 그리고…….

‘……에르네?’

적색과 흑색이 절묘하게 섞인 제복을 입은 에르네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입 기사는 두 기사단만 뽑는 것이 아니었나?

눈에 띄는 인재가 있으면 데려갈 생각으로 참석한 걸까.

그가 어떤 이유로 왔건 아무튼 에르네를 본 까닭에 의자에 앉은 이들이 누군지는 쉽게 확신할 수 있게 됐다.

여명기사단, 백기사단, 흑기사단의 단장.

단장들의 뒤에는 기사단 정복을 입은 기사들과 신관들이 미동도 없이 우직하게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 사이에 플로라를 이곳까지 데려와 준 은인들이 섞여 있었다.

아까 자신에게 길을 잘못 알려준 기사들을 혼낼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기사단 내에서 한 자리 두둑하게 차지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한 명씩 곱씹어 살펴보아도 그렇고 개개인에게서 느껴지는 풍채와 위엄이 대단했다.

아마 계속 저리 굳은 모습으로 무슨 범죄자 취조 심문하듯 대련을 노려보고 있으면 웬만한 신입은 제 실력을 십 분의 일도 발휘 못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중급기사를 이기는 생도는 거의 없었다.

실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단상 위에 있는 이들의 위압감에 기가 죽은 탓도 있을 것이다.

기대에 어긋나는 사람뿐인 건지 시험이 진행될수록 단장들의 표정은 점점 더 따분하다는 듯 변했다.

“플로라.”

오랜 기다림 끝에 이윽고 플로라의 이름이 호명됐다.

연무장 중앙으로 향한 플로라는 단상 쪽으로 정중히 인사했다.

고개를 들며 단장들과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심지어 에르네는 여전히 살기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기세에 압도당하기 전에 간신히 몸을 돌려 벗어날 수 있었다.

배정된 중급기사가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플로라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난 뒤 검을 뽑았다.

시작하라는 엄중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플로라는 검을 뻗었다.

챙, 하고 검이 세차게 맞부딪치자 중급기사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시험 응시자가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그를 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맞댈 때마다 상대의 강한 위압감이 느껴져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단 자각이 들 정도였다.

플로라는 상대가 금방 지치도록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도 나름의 반격을 하긴 했지만 플로라의 눈에는 그 수가 뻔했다. 당해줄 생각은 없었으니 가볍게 물러서며 그 공격들을 피했다.

상대는 대체로 약점을 많이 보였다. 에르네에 비하면 긴장감 없이 시시한 대련이었다.

에르네가 자신에게 합을 맞춰주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음껏 휘두르면 상대가 베일 것 같으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반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 대련을 끝낼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슬슬 끝낼까.’

플로라는 상대의 약점을 보고 몸을 날려 찌르듯 기사의 옆구리 사이로 검을 밀어 넣었다.

곧장 베어 버릴 듯 손에 힘을 주자,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당황한 기사가 검을 놓쳤다.

그렇게 대련은 끝이었다.

플로라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검을 거뒀다.

연무장에는 침묵이 일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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