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막연히 상상하기에 카신은 거인족처럼 키와 몸이 거대하고, 철퇴 같은 걸 들고 다니는 무식한 사람일 것 같았는데, 조금 차가워 보이긴 해도 귀공자처럼 생겨서 의외였다.
오른쪽 벽안 아래에 찍힌 진한 눈물 점과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더 날카롭게 보일 인상을 그나마 부드럽게 보일 수 있게 큰 역할을 했다.
“인사치레는 됐으니 묻는 말에나 대답하도록.”
“그, 벼, 별일 아니었습니다.”
“별일이 아니었다고?”
“……네.”
카신을 신전에 세워진 석상을 보듯 구경하고 있던 것도 잠시였다. 플로라는 귀족 영식의 대답에 발끈해 정신을 차렸다.
‘별일이 아니었다고……?’
카신과 같은 물음이 머릿속에 이어졌다.
남의 식사 시간을 방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검으로 야비하게 사람을 뒤에서 찌르려 해놓고 별일이 아니야?
생각하다 보니 점점 눈이 돌았다.
단장만 없었어도 아마 속이 풀릴 정도로 영식을 두들겨 패고 있었을 것이었다.
매가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이런 안하무인에게는 그 방법이 특효였다.
“영식은 별일이 아니어도 검으로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모양이군.”
“…….”
“요즘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교육을 하던가.”
불시에 뻗어 나온 그녀의 살기를 느낀 것인지, 말을 끝낸 카신의 시선이 플로라에게 닿았다.
차가운 한기가 어린 시선에 플로라도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카신이 옅게 웃음을 흘렸다.
‘……응? 웃는다고?’
‘나 쟤 죽이고 싶어요.’ 아니면 ‘한 대 치고 싶어요.’ 하는 기운을 폴폴 뿜어냈는데 그걸 고스란히 눈치챘을 카신이 웃고 있다.
근데 저 웃음. 어딘지 익숙했다.
‘귀엽다.’ 혹은…… ‘우쭈쭈.’
그런 취급을 익숙해하는 스스로도 어이없지만, 카신은 대체 어느 시점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어 황당했다.
덕분에 살기는 제힘을 잃고 완전히 꺾였다.
“이게 무슨…… 키에로!”
차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 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이번엔 흑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왜 이렇게 일이 커진 거야.’
플로라는 분노고 뭐고,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그냥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한 명씩 새로운 인물이 끼어드는 이 상황이 퍽 난감했다.
더 이상 문제아라고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열을 냈더니 더 급격하게 당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카신 단장님.”
“아. 키엔 경.”
흑기사는 먼저 카신을 발견하곤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어 영식과 플로라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번갈아 보다 설핏 미간을 구겼다.
그나마 형은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모양인지, 자신의 동생을 먼저 노려봤다.
“이쪽은 제 동생 키에로 라벨리우입니다. 혹시 방금 소란이 제 동생과 관련된…….”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경이 직접 데려가서 물어보게. 영식의 체면도 있으니.”
“…….”
“라벨리우 가문을 위해서라도 영식은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더군.”
카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영식을 차갑게 내려다보다 등을 돌렸다.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더니, 돌연 멈춰선 그가 플로라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따라와.”
플로라는 이 소란에서 가급적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사냥꾼을 피하자고 호랑이 굴에 기어들어 가는 꼴이었지만, 결국 카신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고귀한 영식과 한바탕했다고 혼이 나려나. 플로라는 앞서 걷는 카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묵직한 걸음걸이만큼이나 무거운 입을 끝내 지켰다.
그리고…….
꼬르륵.
“아.”
재수도 참 없지.
하필이면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급하게 배를 움켜쥐어 봤지만, 카신과 눈이 마주친 것으로 보아 소릴 들은 듯했다.
“대단해.”
그가 건넨 첫마디였다. 대단해. 이어 위에서 아래로 샅샅이 자신을 훑는 시린 눈빛에 플로라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 아침을 적게 먹어서요…….”
“그래. 배가 고플 만도 하겠어.”
믿지 않는 눈치라 더 창피했다. 플로라는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해버린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자.”
카신은 합격자에게 나눠주는 식사를 직접 받아와 플로라에게 건넸다.
접시 안에는 구운 고기와 빵, 그리고 샐러드까지 알차게 담겨 있었다.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았다.
“나와 함께 식사하겠나?”
“……네?”
식사를 할 생각에 반짝이던 그녀의 눈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그게 무슨 망언이신가요.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차라리 지금 혼내십시오.”
“……뭘?”
플로라가 살짝 눈을 내리며 반성하는 얼굴을 했다.
“라벨리우 가문의 영식과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주의를 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카신이 한쪽 눈썹을 구기며 어깨를 늘어뜨린 플로라를 보았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무어라 말해야 오해를 풀 수 있을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자질구레한 싸움에 내가 왜?”
“…….”
“그냥 같이 식사하자고.”
그게 더 무서워……!
플로라가 진심으로 기겁했다.
“어허. 그건 안 될 일이지.”
그때 누군가 카신의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눈도장 찍히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힘들게 머리 굴려 해야 할 거절을 대신해줬으니 상당한 호감이 생겼다.
그 호감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고 나서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남자는 흑색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카신처럼 상의가 긴 코트 형식으로 되어 있고…… 금수가 놓인 화려한 견장……? 응?
‘나, 오늘 밥은 먹을 수 있는 걸까.’
플로라는 조금 많이 울고 싶어졌다.
“……하키라 경.”
“이거. 이거. 안 돼. 반칙이야.”
흑기사단 단장인 하키라는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치장을 좋아하는 모양인지 행색이 화려했다.
플로라는 하키라가 맨 크레바트 중앙에 달린 짙은 남색 빛깔의 커다란 보석을 힐끗 보았다.
“손 떼지.”
“우리 사이에. 그렇게 섭섭하게 말할 거야?”
“아무 사이도 아니야. 손 떼.”
카신이 짜증스레 하키라의 손을 떼어 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플로라는 이제 하키라를 살피며 느꼈던 흥미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양손으로 식사가 담긴 접시를 꼭 움켜쥔 채, 아옹다옹하는 두 단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단 제의는 두 번째 시험까지 치른 뒤에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이 보석은 너만 탐내는 게 아니니까. 못 데려가면 나 애들한테 구박받아. 그러니까 선수 치지 마. 페어플레이 몰라? 페어플레이!”
“……부하들한테 구박받는단 소릴 자랑이라고.”
카신이 쯧 혀를 찼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플로라는 이제 정말 인내심의 한계였다.
“응? 무슨 일이야?”
그녀의 말에 카신은 그저 냉랭한 시선만 던졌고, 하키라는 무엇이든 다 해 줄 것 같은 친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플로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너무 배고파서요. 볼일 끝나셨으면 이만 밥 먹으러 가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섰다. 등 뒤로 카신이 ‘잠깐……!’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플로라는 듣지 못한 척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아, 당 떨어져.”
불이익, 그딴 거 모르겠고.
일단 배를 채워야겠다.
* * *
플로라가 꼭꼭 숨어 굶주린 배를 어느 정도 채웠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옆에 한 남자가 앉았다.
일단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벌레처럼 사람이 꼬일까.
사람을 왜 이리 귀찮게…….
“으응……?”
고개를 든 플로라는 상대를 보자마자,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굼벵이처럼, 혹은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떠도 눈앞에 있는 이는 여전했다.
“사람을 귀신 취급을 하는군. 너무한 거 아닌가? 이 얼굴이 어디 귀신에 비할 바가 되나.”
“……시몬?”
목소리까지 똑같은 걸 보니 진짜 시몬이었다.
그는 이든이 입던 하얀 로브에 모자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플로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헛숨을 삼켰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런 차림으로 여기 있는 거야?
“시몬, 여기서 뭐 하세요?”
“넌 여기 숨어서 뭐 해? 찾느라 한참 걸렸어.”
“보시다시피 고기 먹어요.”
“그러니까 왜 여기 숨어서.”
“오늘따라 자꾸 사람이 꼬여서요.”
플로라의 대답에 시몬이 짧게 웃었다.
“시험을 잘 봤나 보네.”
“열심히 하긴 했어요.”
“그럼 안 꼬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적당히 잘 봤어야지.”
“루가르 님이 신분만 보고 떨어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요.”
“옛날엔 그랬지. 요새는 바뀌는 추세라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아무래도 루가르 경이 기사가 된 지…… 아, 이런.”
시몬은 말을 삼키며 플로라의 눈치를 슬그머니 봤다. 아무래도 루가르를 감시로 붙인 일 때문인 모양이었다.
“일은 저질러놓고 왜 눈치를 보세요?”
“일을 저질러서 들켰으니 눈치를 보지.”
“괜찮아요. 저 화 안 났어요. 폐하가 저를 온전히 신뢰했다면 그게 더 부담스럽고 수상했을 거예요.”
“…….”
“앞으로 감시를 더 붙이셔도 화 안 내요. 저, 누가 봐도 믿을 만한 사람 아니잖아요. 지금. 아직 신뢰하지 못할 사람을 이리 챙겨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시몬은 플로라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 앞에선 왜 이리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지 모르겠군.”
“…….”
“말을 고르는 법을 잊은 것 같아.”
그는 손을 뻗어 플로라의 뺨에 붙어 있던 은빛 머리칼을 떼었다.
갑작스레 닿은 시몬의 손에 플로라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 의미 없는 호의도 전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떼어주거나 쓰다듬는 건 평소에도 심심찮게 하던 일인데, 오늘따라 불쑥 치닫는 홧홧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까 너무 시달렸더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미쳐가고 있어…….’
플로라는 재빨리 이 이상한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이제 제 질문에 대답해주실 차례에요. 왜 여기 계세요?”
“너 보려고 왔지. 내가 여기까지 나올 다른 일이 뭐가 있겠어?”
“당연한 듯 말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왜 절 보려고…….”
“시험은 잘 보고 있나 궁금해서. 다치진 않았나, 밥은 잘 먹고 있나.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
시몬의 말에 플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뭘 먹고 자라면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난감할 땐 역시 못 들은 척하는 게 최고였다.
“이 옷은 뭐예요?”
“아. 이거. 위장이라고 할까.”
이 차림으로 위장이라니.
“이상해?”
“그럴 리가요.”
이번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아르제카 신도 참 야속하시지. 제복으로도 모자라 신관의 옷마저 잘 어울리게 피조물을 빚어 놓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마 저 시몬은 누더기를 입혀도 완벽할 것이 분명했다.